2부 5화. 곰 인형 머리핀의 온도

by 완작가
2-5. 병원 복도의 재회.png


EP 5. 곰 인형 머리핀의 온도


소독약 냄새가 코끝을 스치는 복도

웅크린 마음으로 고른 작은 상자 하나

서툰 손가락 끝에 걸린 갈색 곰 인형

반짝이는 핀 뒤에 숨긴 나의 고백들.


흰 병실 문 너머로 쏟아지던

오후의 볕 환자복을 입고도

당신은 첫눈 같아서

툭, 떨어뜨릴 뻔한 선물 상자 속

가장 정직하게 볶아진 나의 진심이.


먼지 낀 유리창 사이로 흐르는 침묵

당신의 머리카락 사이로 조심스레 스민다

계절은 창밖에서 머뭇거리며 잎을 떨구고

우리의 시간만 소리 없이 깊어지던 날.


기울어진 햇살이 등줄기를 타고 흐를 때

서투름은 때로 가장 선명한 이름이 된다

말하지 못한 문장들이 상자 속에 갇혀

작은 인형의 눈망울로 나를 대신하던 오후.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는 것,


특히 이성에게 마음을 담은 물건을 건넨다는 것은 당시의 내게 에베레스트를 넘는 일만큼이나 거창하고 두려운 숙제였다.


병문안을 가기로 약속한 토요일 아침, 나는 극장 근처의 작은 잡화점을 몇 번이나 뱅뱅 돌았다.


화려한 목걸이나 값비싼 향수는 내 것이 아닌 옷을 입은 듯 어색했고, 그렇다고 빈손으로 가기엔 내 마음이 도저히 허락하지 않았다.


가게 안은 밖의 쌀쌀한 가을 공기와는 달리 노란 전등 불빛이 아늑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수많은 장신구 사이를 헤매다 내 시선이 멈춘 곳은 진열대 구석, 조금은 낡은 벨벳 천 위에 놓인 작은 갈색 곰 인형 머리핀이었다. 촌스러울 정도로 투박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포근하고 정직한 눈을 가진 그 곰 인형이, 사고 소식을 듣고 병원을 오가던 내 서툰 마음을 꼭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것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한참을 바라보았다. 화려하지 않아 다행이었고, 작아서 오히려 내 진심을 숨기기에 적당했다.


"이거... 선물 포장해 주세요. 제일 예쁜 종이로요."


점원이 건네준 작은 상자를 손에 쥐었을 때,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상자의 까슬한 질감이 꼭 내 심장박동처럼 느껴졌다.


서툰 선물에는 가장 정직한 마음이 담긴다는 사실을, 그때의 나는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었던 것 같다. 화려한 수식어를 붙이지 않아도, 이 투박한 곰 인형 하나가 내가 밤새 앓았던 걱정들을 대신 말해줄 것만 같았다.


병원의 공기는 극장의 팝콘 냄새와는 정반대의 극단에 서 있었다.


코끝을 찌르는 알싸한 소독약 냄새와 발소리조차 조심스러운 정막.


나는 2층 검표 구역에서 입었던 노란 유니폼 대신 어색한 사복을 입고, 그녀의 병실 번호를 확인하며 하얀 복도를 걸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상자 안의 곰 인형이 내 마음을 대신해 두근거리는 것만 같았다. 대리석 바닥에 부딪히는 내 운동화 소리가 유독 크게 들려 나는 자꾸만 발끝에 힘을 주어 걸었다.


복도 끝, 창가에서 쏟아지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그녀가 서 있었다.


환자복을 입은 그녀는 평소보다 조금 야위어 보였고, 안색은 창백했다. 하지만 그 모습조차 내 눈에는 극장 계단을 오르던 첫날의 첫눈처럼 눈부셨다.


링거 폴대를 잡은 그녀의 하얀 손이 햇살에 비쳐 투명하게 빛났다. 내가 다가가자 그녀는 특유의 맑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겼다. 그 미소 하나에 병원의 서늘한 공기가 순식간에 온기를 머금었다.


"어... 이거, 오는 길에 그냥 예뻐서 샀어요. 진짜 별건 아닌데..."


말투는 엉성했고 문장은 앞뒤가 맞지 않았다.


등 뒤에 숨겼던 상자를 건네는 내 손은 겨울 서리를 맞은 것처럼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조심스레 상자를 열더니, 작은 곰 인형 머리핀을 보고는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작은 갈색 곰 인형이 비쳤고, 그녀는 마치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석을 발견한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거울도 보지 않은 채, 내가 선물한 핀을 제 머리카락 사이로 꽂았다.


"사수님, 저 어때요? 환자복에 곰 인형이라니, 좀 웃긴가요?"


장난스럽게 묻는 그녀의 얼굴 위로 오후의 노란 볕이 가득 내려앉았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 사이에서 반짝이는 작은 핀은, 차가운 병실의 풍경 속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색채였다. 병실 특유의 퀴퀴한 냄새는 순간적으로 사라지고, 그 자리에 그녀의 투명한 향기와 곰 인형의 보들보들한 온기가 채워졌다.


우리는 창가에 나란히 서서 한참 동안 창밖의 낙엽이 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별다른 대화는 없었지만, 수화기 너머로 들리던 숨소리보다 훨씬 더 생생한 온기가 우리 사이를 메우고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틈만 나면 병원으로 향했다.


2층 상영관 문앞을 지키는 시간보다 그녀의 병실 복도를 서성이는 시간이 더 길어졌다. 상영관 안의 가짜 영화들보다, 병실 복도 끝에서 그녀와 나누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이 내게는 훨씬 더 영화 같았다.


병원 냄새 섞인 복도를 지나 그녀 앞에 선 순간마다, 우리는 유리창 너머로 훔쳐보던 평행선에서 완전히 벗어나 서로의 온기를 나누는 하나의 풍경이 되어가고 있었다.


가장 서툴게 골랐던 그 작은 머리핀은, 우리가 '우리'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한 첫 번째 페이지의 책갈피가 되어주었다. 비로소 필름 밖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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