압축된 하루 압축된 가을
차를 몰고 창원에서 서울로 올라왔다. 어떤 일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걱정하는 스타일이 아니라 그런지, 주변의 우려와는 달리 정작 나는 아무 걱정이 되지 않았다. 어제 비맞은 모습을 보고 와서 계속 신경이 쓰이던 차라, 닭고기와 습식사료를 가지고 창원역에 들러 역냥이들을 살펴 보고 출발했다. 다행히 모두 건강히 잘 있었다. 아이들이 직원들이 주는 건식사료를 안 먹는 다는 얘기를 듣고 괜히 가슴이 뜨끔했다. 간식을 좀 뜸하게 갖다 줘야하나....
울산을 지나 포항으로 올라 갈 줄 알았던 예상과는 달리, 진주로 해서 중부내륙 고속도로를 타는 노선이었다. 4시간 30분. 요즘은 운전하면서 음악보다는 팟캐스트나 유튜브를 즐겨 듣는 편이었는데, 장거리를 한 호흡에 달리려고 하니 짧은 에피소드들은 운전 시간을 더 길게 느껴지게 하고 집중력을 흐트릴 거 같아서 5년간 쌓아놓은 나의 playlist를 틀고 가기로 했다.
순간순간 충동적으로 받아 놓았던 내 음악들은 그 때 당시의 감정으로 나를 몰고 가 당시의 기억을 소름돋도록 깨우쳐 놓았다. 나의 히스토리를 돌아보라고 한다면 나의 플레이 리스트를 꺼내 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BU기숙사의 휑하고 차가운 공기, 가슴이 따뜻해 지던 아름빌의 좁은 부엌, 녹초가 되면서도 끝까지 뭔가 해내고 싶었던 출근길, 겨울밤 레슨 마치기를 기다리며 히터도 들지 않고 입김을 내뿜던 새문안로 경찰서 앞 주차장, 그리고 달이 잘 보이는 곳을 찾아서 헤맸던 해운대 달맞이길...마치 유체이탈한 듯 몸은 핸들만 기계적으로 잡고 있고 영혼은 이리로 저리로 떠다니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 앞만 바라보는 육신의 눈. 처음에는 노란색과 초록색이 섞여 있더니 올라갈 수록 노랑과 붉은 색, 그리고 점점 온 산이 점점 붉어져 마치 단풍이 물든 산 한가운데 서 있는 듯 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충청도로 접어드는 순간 비를 뿌리는 검은 먹구름은 갑자기 타임워프를 한 듯 정신을 번쩍 깨우며 핸들을 쥐고 있는 손에 모든 공상을 접고 그 에너지를 집중하게 만들었다.
마치 시공간을 헤매다니는 비행을 끝낸듯 한 5시간여의 장거리 운전.
그 시간동안 몇 명의 사람들이 내 머리 속을 지나가고, 내 인생의 몇 장면들이 다시 깨어났던가...
그들은 소리없이 내 안에 숨어 있다가 그때 그게 나였어, 너를 그렇게 만든 건 그때의 나야...라고 외치며 나를 좀 더 자세히 알게 만들었다. 정신과 육체의 박리가 일어나는 신기하고 오싹한 순간. 육체가 달린 길은 500킬로미터인데 정신이 달린 길은 쪼개어지고 쪼개어지고 또 삼차원적으로 오르내리고 사방으로 휘저어 무한의 길을 다녀온 듯 하다.
퇴근시간에 겹쳐 서울에 도착하니 붉은 빛의 레어라이트가 반짝이고 있다. 마치 잘 돌아왔어라고 웃어 주듯이. 집에 도착하니 무한대의 여행을 마친 피로감이 쏟아 지는데도 그 여파로 이제 땅속 싶은 곳까지 생각이 내려간다. 침대로 달려가 베개를 껴안고 눈을 감는다. 대사도 알아 들을 수 없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영화를 틀어놓고. 자고 나면 긴긴 생각의 끈이 끊어지겠지. 꿈에서는 이어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에게는 서울이 현실의 세계니까.
여기는 서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