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열대성기후의 바하마는 4월 말도 한 여름처럼 덥다. 낮의 온도는 30도를 웃돌며 틈날 때마다 물속에 뛰어들고 싶게 만든다. 한국에서 비행기로 바하마를 간다는 건 정말 큰 모험이다. 미국 동부의 올랜도나 뉴욕등을 경유해 총 19시간 이상의 비행을 해야만 갈 수 있는 곳. 카리브해 곳곳에 흩어져 있는 700여 개의 열대 섬으로 이루어진 그 바하마 낫소에 크루즈가 정박했다. 한여름과 같은 낫소에서의 조식은 갑판 위 야외 테이블로 자리를 잡았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내려야 외식비용을 좀 아낄 수 있으니 아침부터 거하게 먹어준다.
처음 발을 디딘 낫소의 풍경은 굉장히 새로웠는데 뜨거운 햇볕아래 레게머리를 한 사람들이 눈에 띄었다. 레게 음악이 들리지 않지만 소울이 넘치는 그런 곳이었다. 컬러풀한 건물들과 파란 하늘은 대비가 확실히 되는 포스터를 보는 느낌이었다.
낫소에 도착하면 항구 근처 카리브해에서의 스노클링이 가능하다는 정보를 들었다. 보통은 미리 알아보고 예약을 해야 하지만 우리는 예약 없이 직접 부딪혀 보기로 했다. 아니나 다를까 크루즈에서 내리니 삐끼들이 몰려든다. 우리는 그들을 멀리하고 낫소(NASSAU) 워터 페리 서비스센터로 갔다. 아이들과 함께 움직이는 거라 안전이 가장 중요하기도 하고 혹시나 바가지요금에 속을 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보트를 타고 카리브해 주변을 둘러보고 스노클링도 할 수 있는 보트를 소개받았다. 깜한 피부에 키도 길쭉한 보트 선장이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우리를 환영했다. 보트에 올라타니 눈을 뜨기도 어렵게 강렬한 태양이 내려짼다. 선글라스를 씌워주니 신이 난 아이들은 보트가 속력을 내기 시작하니 움찔 긴장하기 시작했다.
보트가 조금 속력을 내 나오니 떠나온 해변 주변으로 백만 불짜리 저택과 별장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저 멀리 아틀란티스 호텔도 보였다. 마이클잭슨이 묵고 난 뒤 저 호텔을 매매하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는 그 호텔이다. 규모도 크지만 상어를 볼 수 있는 워터슬라이드가 있는 곳. 물론 비싸기도 하고 워낙 규모가 커서 가볼 엄두도 못 냈지만 보트를 타고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만족스러웠다.
스노클링을 신청하긴 했지만 난 사실 물을 무서워한다. 수영은커녕 튜브에 의지해 물에 들어가는 것도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물 겁쟁이다. 그런데 '이 먼곳 카리브해까지 왔는데 그냥 갈 수는 없지' 하며 덥썩 바다에 들어가겠다고 했다. 사실 진짜 이유는 아이들 때문이었다. 겁쟁이 엄마가 되고 싶지 않았다. 멋진 엄마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엄마가 수영하는 모습을 보며 아이들도 물에 대한 겁이 사라지길 바라는 마음이었다.
입술이 파래지고 위 아래 두 이빨이 박자를 맞추듯 따다닥 떨려왔다. 가슴이 벌렁거리고 이대로 죽으면 어떡하지 하는 마음으로 들어간 물속 풍경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여전히 두려움이 있었지만 이제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낫소에서 뜨겁고 열정적인 시간을 보내고 크루즈로 돌아오니 너무 피곤했다. 아마 긴장이 풀린 탓에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저녁 만찬도 건너뛰고 대신 야식으로 갑판 위에 나오는 피자를 먹기로 했다.
늦은 밤 올라간 피자 레스토랑엔 큼직하지만 심플해 보이는 피자들이 몇 가지 있었다. 늦은 밤이라 그런지 구워놓은지 좀 되어 보였지만 여전히 군침이 고인다. MSC나 COSTA처럼 이탈리아 선사들의 피자들이 본고장이니 훨씬 더 맛있긴 하지만 한국인의 입맛엔 미국 피자도 뒤지지 않는다.
큼직한 페페로니 피자와 치즈 피자 한 조각씩을 플라스틱 접시에 받아 들고 갑판 위로 나갔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더웠던 낮의 열기를 식혀주고 있다. 갑판 위 커다란 전광판은 야외 극장으로 변신해 백설공주가 상영 중인데 아주 오래돼 보이는 필름이다. 밤 10시가 넘은 시간이라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승객들보다 하루의 일과를 정리하고 수영장을 청소하는 크루즈 직원들이 눈인사를 하며 지나간다. 그 사이로 썬배드에 누워 영화를 즐기고 있는 백발의 노부부가 눈에 들어왔다. 특별한 대화 없이 그저 편안하게 영상을 감상하고 계신 모습을 보니 갑자기 울컥한다. 이럴 땐 너무 감상적인 내가 너무 주책이다. 하지만 밤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들과 간간히 불어오는 바닷바람, 잘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음악보다 아름다운 오래된 듯한 영화 속의 목소리는 유년 시절을 회상하며 늙어지고 느려진 노부부에게 완벽한 위로가 되어 주는 듯했다. 나도 뒤편에 마련된 썬베드에 기대어 앉았다. 피자를 한 입 물고 나의 유년시절을 떠 올렸다. 내가 어릴 땐 뭐 하고 놀았지? 어떤 만화 영화를 봤었지? 그러고 보니 두 아이를 키우면서 뽀로로와 로보카폴리에 익숙해져 나의 유년시절에 즐겨보던 만화를 본 지 오래다. 눈은 백설공주를 향해 있지만 어느새 나의 머릿속엔 빨간 머리 앤과 소공녀 세라가 그려지고 있다.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고 마음도 몽글몽글해진다.
그 시절 디즈니 작품들은 굉장히 고급 만화였던 것 같다. 귀여운 캐릭터들과 디즈니의 재미있는 스토리는 다양한 굿즈를 탄생시켰다. 하지만 난 앤이나 세라처럼 위기에 처한 여자 아이들이 용감하고 씩씩하게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고 멋지게 성장하는 이야기에 더 마음을 주었던 것 같다. 변변치 못했던 어린 시절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고 위로해 주는 그녀들이 그리워졌다.
누구에게나 있는 소중한 유년시절.
지지직 깔끔하지 못한 옛날 화면 그대로 상영되던 그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는 갑판 위 노부부처럼 나에게도 추억의 만화는 아니었지만 나를 단단하고 행복하게 만들어줬던 소중한 유년시절의 추억을 되살려 주기에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