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CT 스타트업 생태계 도약을 위한 정부의 역할
직업 특성상 업계 애로사항을 자주, 그리고 많이 접하게 되는데, 많은 분들께서 하시는 말씀이 한국 사회가 변화와 혁신을 수용하지 못해 글로벌 트렌드에 뒤처지고 있다는 위기론이다.
이 위기론의 문제의식에 공감하기도 하고, 또 한국 사회의 기회와 가능성을 변호하고 싶은 부분도 있고, 반성하고 노력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부분도 있는데...
< 문제 의식 >
위기론에 공감하는 이유는, 정말로 오늘날 한국 사회가 변화와 혁신에 둔감해졌기 때문이다.
소비 측면과 산업 측면 양쪽이 모두 그런 것 같은데,
먼저 소비 측면에서 한국 소비자들이 예전만큼 새로운 서비스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2000년대 초반 한국 사람들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인터넷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소비자들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천리안, 넷츠고, 원클릭, 버디버디, 다이얼패드, 한메일, 다나와, 한게임, 아이러브스쿨, 싸이월드, 리니지, 어둠의 전설... 인터넷 서비스에 한국 소비자들이 열광하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다. (인터넷이 가져올 변화에 대한 막연한 낭만적 기대도 있었던 것 같고) 지금 벤처 1세대로 자리잡은 회사들도 이런 소비자 기반을 바탕으로 오늘날에 이르렀다고 봐야 할 것 같고.
하지만 요새 한국 소비자들은 그렇지 않다. 핀테크도 좀처럼 확산이 잘 안되고 웨어러블도 가격에 대한 심리적 저항이 거의 없는 미밴드를 제외하고는 거의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해외에서 많은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드론이나 VR기기도 한국 소비자들 앞에서는 맥을 못춘다. 그나마 성공적으로 자리잡은 서비스가 O2O인 카카오택시 정도. 반면 외국인들은 지금의 2차 벤처붐을 통해 생겨난 서비스를 받아들이는데 보다 적극적인 것 같다. 중국인들에게 알리페이 결제가 보편화되고, 해외 유투브 채널에는 드론을 활용해 촬영한 영상도 많이 올라온다.
산업 측면에서도 새로운 시도에 둔감해졌다.
대학교 시절에 학교 멘토링 프로그램을 통해서 휴맥스 변대규 대표님에게 멘토링을 받을 기회가 있었는데, 기업의 성장 과정에 따라서 리더로서 회사 경영을 대하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고 말씀 하셨던 기억이 난다. 기업이 성장할 때는 정복 전쟁을 하는 장수의 전략을 사용 한다면, 어느정도 사업이 자리를 잡고 난 다음에는 정복한 성을 지키는 수성의 전략을 사용 해야한다는 내용이었다. 같은 이유로 삼성/LG/현대는 관리에 집중했던 것 같은데, 문제는 같은 기간 동안 실리콘밸리나 중국의 대기업들은 직접 신산업을 개발하거나 스타트업을 M&A하면서 시장 잠식도 불사하고 신기술 개발에 나서왔다는 점인 것 같다.
삼성/LG/현대와 같이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들은 기존 시장(삼성은 스마트폰/반도체, LG는 가전/디스플레이, 현대는 가솔린/디젤 자동차)에서 너무 잘나가서 새로운 시도에 둔감해진 것 같다.. 그러니까 엉덩이가 무거워졌다. 얼마 전 오랜만에 삼성에 다니는 친구랑 대화를 나누다가 스타트업과 개방형 혁신에 대해 얘기를 했더니 대뜸 '스타트업에게 배울 것이 없다'고 대답을 했다. 대기업도 물론 훌륭한 사람들이 많이 모인 조직이다. 하지만 그 대답에서 나는 삼성의 사고방식이 얼마나 경직되고 시대에 뒤떨어지는지 느낄수가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 사회는 위기가 맞다.
< 기회와 가능성 >
한편 한국 ICT 산업과 스타트업 생태계가 조금씩 바뀌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14년 4월부터 시작해서 이제 16년 1월까지, 창업 생태계 관련 업무를 맡아 일하기 시작한지가 이제 1년 8개월 가량 된 것 같다. 느낀 점을 짧게 요약하자면 한국 스타트업 생태계는 hyper growth는 아니지만 분명히 발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전문적인 앤젤 투자자나 액셀러레이터들이 어느정도 자리를 잡았고, 이들이 초기에 투자하고 멘토링한 스타트업들의 성과가 조금씩 가시화되는 것이 눈에 띈다. 라인같은 ICT 선도벤처는 물론 스마트스터디나, ASD코리아처럼 스타트업들도 해외 시장 개척 성과도 조금씩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쿠팡이나 옐로모바일 같은 유니콘도 나왔고, 배달의 민족, 쏘카, 직방처럼 해외로부터 대형 투자를 받은 스타트업들도 나오고 있다. 카카오(김기사,셀잇...), 배달의민족(덤앤더머스, 옹가솜씨..)와 같이 크고 작은 M&A도 일어나고 있다. 모두 한국 생태계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이다.
흔히 큰 변화가 일어나기 전에 그와 연관된 수많은 사건들이 선행한다는 규칙을 이야기한다. 공무원들이 좋아하는 표현 중에 핵반응을 위한 임계 질량이라는 표현도 있고. 한국 ICT 산업과 스타트업 생태계가 큰 변화가 일어나기 위한 임계질량까지는 도달하지 못한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조만간 우리 생태계가 임계 질량을 넘어서 도약의 시기를 맞이할 것이라고 기대한다. 지금 성공의 경험을 쌓고 있는 스타트업들이 다시 후배 스타트업에 멘토가 될 수 있는 시점이 되면, 지금 생태계가 조금씩 경험하고 있는 해외 시장 개척, 투자유치, 고속 성장, M&A의 경험이 반복적으로 확산되면서 우리 생태계도 고속 성장을 경험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실리콘 밸리가 지금에 이를 수 있었던 데에는 문화적, 제도적인 배경이 주요한 역할을 했다. 그런데 우리 사회가 그간 축적해온 인/물적 자본과 사회적 경험은 실리콘밸리의 그것과는 수준과 종류에서 차이가 많이 난다. 단박에 따라잡을 수가 없는 차이인 것이다. 이 같은 차이에도 불구하고 한국 스타트업이 꾸준히 성공을 경험하고, 한국 생태계가 조금씩이나마 성장한다는 점은 한국 사람들의 땀과 열정, 실력과 도전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된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어쨋건 꾸준히 골을 넣고 있는거다. 나는 대단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생태계에는 아직 기회와 가능성이 있다.
< 반성과 노력 >
다만 문제는, 지식정보사회에서 세계 시장은 승자독식의 구조라는 점이다. 우리 생태계가 빨리 임계질량에 도달하지 못하면 지금 싹틔우고 있는 한국 창업 생태계는 영영 고속성장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하고 고사할지도 모른다. 승자독식의 세계에서는 빠르게 자원을 투입해 1등이 되지 못하면 투자금을 회수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 우리 생태계가 고사하지 않고 빨리 성장하여 임계질량에 도달하게 만드는 것은 정책과 제도의 역할이다. 그런 의미에서 창조경제라는 정책 방향은 무척 중요하고, 또 정책 입안자들이 이 정책의 중요성을 인지하는 것도 중요하다.
정책 입안자들이 어떻게 하면 창조경제 생태계를 실현할 수 있을지에 대한 높은 전문성을 갖춰야 함은 물론이다. 민간 전문가와의, 또는 공무원 간의 정책 토론도 활발하게 이뤄저야하고, 영문 정책 자료의 통/번역도 활발하게 이뤄져야 하고, 해외 정책 전문가들과의 교류 소통도 확대 되어야 하고, 필요하면 출장도 팍팍 다녀야 한다. 국회와 법원도 고민을 공유해야한다.
사람들이 정부의 역할이 축소되는 시기라고 말하는데 나는 반대라고 생각한다. 나는 지금이 거의 메이지 유신 급의 정책적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하는데.. 일부 사람들이 말하는 것처럼 무조건 정부가 빠지고, 제도는 없애버리는 것이 능사는 아니다.
공부가 많이 부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