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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완 기자 Dec 10. 2017

반도체 백혈병 논란 10년…끊이지 않는 감광액 유출

고칠 수 있는 위험은 아직 남아있다

‘퍽∼’

한가위 연휴를 며칠 앞둔 지난 9월19일 경기 이천에 있는 에스케이(SK)하이닉스 반도체 공장 자재창고에서 화학물질 누출 사고가 났다. 슈퍼 호황을 맞아 바삐 움직이던 지게차가 감광액이 든 상자들을 잘못 건드렸다. 그중 2개가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상자 1개 안엔 4리터짜리 감광액 유리병이 4개씩 들어 있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사내하청 노동자들은 새어나온 감광액에 그대로 노출됐다. 하이닉스 쪽은 “지게차 운전사 등 협력업체 직원 4명이 아주대병원에 가서 특수검진도 받았지만 건강에 이상은 없었다”고 설명했다.


이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긴 쉽지 않다. 감광액의 구성 성분은 여태껏 회사 영업비밀을 이유로 온전히 공개된 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삼성전자나 하이닉스 같은 대기업도 협력업체에서 납품받는 탓에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현장 노동자도 알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인체에 얼마나 유해한지는 정부조차 모른다.




단서는 있다. 반도체 제조공정의 감광액은 예전부터 위험한 물질로 꼽혀왔다. 2009년 서울대 산학협력단이 삼성전자 등 국내 반도체 공장 생산라인을 조사한 결과, 감광액에서 1급 발암물질로 백혈병을 유발할 수 있는 벤젠 등이 검출된 바 있다. 삼성전자와 하이닉스 쪽은 “현재 감광액에 유해물질은 없다”고 설명한다. 납품받는 감광액의 구성 성분을 알지 못한다면서도 이들은 이렇게 주장한다.


<한겨레> 취재 결과, 에스케이하이닉스와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자재창고나 내부 공정 과정에서 감광액이 누출되는 사고가 1년에 한두건 이상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으로 밝혀졌다. 하이닉스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는 <한겨레>에 “2013년 감광액 누출 사고가 언론에 보도된 뒤로도 매해 한두건 이상 감광액 노출 사고가 났다”며 “청주 사업장 노조에서 감광액 보호커버 적용을 요청했지만 회사 쪽에서 거절해 현재 방치되고 있다. 비용이 더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지난해까지 일한 김아무개(25)씨도 “라인에서 병이 깨진 것을 본 적이 있다”며 “감광액은 독특한 강한 휘발성 냄새가 나서 바로 알 수 있다”고 말했다.



한겨레신문 사진


2007년 3월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던 황유미(당시 22살)씨가 급성 백혈병으로 숨지고 그해 11월 ‘반도체 노동자의 건강과 인권 지킴이, 반올림’이 결성되면서 국내 반도체와 엘시디(LCD) 사업장에서 백혈병 등 난치병 집단 발병 문제가 잇따라 사회 이슈화한 지 10년째를 맞은 현재, 국내 대기업 반도체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 가운데 일부는 여전히 불안한 노동환경을 호소한다.


가장 문제가 되는 곳은 포토공정이다. 반도체 제조 과정 가운데 가장 많은 화학물질을 사용하는 곳이다. 반도체 제조 공정은 급속히 자동화되는 중이나, 포토공정에선 여전히 노동자가 직접 손으로 감광액을 교체한다. 한 공장에서만 하루에 200여개, 한달이면 6000여개를 교체한다.


파손 등 사고로 감광액에 노출되는 이들은 보관·설치 업무를 주로 맡은 사내하청 노동자다. 최첨단 기술의 총아인 반도체 공장의 일부 공정은 외주화된 인력으로 돌아간다. 이른바 ‘위험의 외주화’가 진행된 결과다. 전 삼성전자 노동자 김씨는 “예전에는 감광액이 떨어지면 엔지니어한테 전화를 해서 감광액을 교체해달라고 했는데, 지금은 협력업체 직원들이 교체업무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제공



에스케이하이닉스는 작업 중 감광액 용기 파손을 막기 위한 개선책을 마련하고 있다고 밝혔다. 조재현 에스케이하이닉스 안전보건팀장은 “감광액 용기의 20% 정도는 플라스틱 재질로 교체했다. 나머지는 플라스틱 용기에 담았을 때 품질 문제가 발생할 수 있어 교체를 하지 못했다. 두꺼운 플라스틱 보호 커버를 도입하려 했으나 감광액 공급업체 쪽에서 오로지 하이닉스만을 위해 할 수 없다고 해 대안을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삼성전자 등 다른 반도체 업체들 역시 유리병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조 팀장은 “용기 교체 외에도 감광액 운반 전용 카트와 작업자 보호구 착용 등을 통해 안전을 확보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한 에스케이하이닉스 노동자는 “감광액 공급업체에 보호 용기를 바꾸기 위해 지급하는 비용은 화학물질에 대해 알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일하는 사내하청 노동자와 어린 오퍼레이터들을 위한 안전비용”이라고 짚었다.


아직까지 감광액 등 반도체 사업장 내 화학물질이 희귀질환 발병과 명확한 인과관계에 있다는 사실이 뚜렷이 밝혀진 적은 없다. 하지만 법원도 일정한 연계성은 인정한다. 서울고법은 지난 5월 2005년까지 삼성전자 반도체 기흥사업장 포토공정에서 일한 뒤 다발성경화증을 앓은 노동자가 제기한 재판에서 햇빛노출 부족, 20대 이전의 교대근무와 함께 유기용제 노출을 들어 “그런 요인들이 합쳐져 발병 또는 악화를 일으킬 정도는 됐다”고 판결했다.



전문가들은 작업장 내부 화학물질 정보 공개와 일터의 민주주의 없인 안전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백도명 서울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화학물질의 위험은 그 물질들을 파악·관리하는 조처, 그리고 그 조처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 등과 연결돼 있다. 이전보다 반도체 회사들이 안전에 관해 투자를 많이 하고 있지만, 작업자들의 알 권리가 행사되지 못하고, 내부적으로 문제제기를 할 수 없는 기업문화가 하나도 바뀌지 않는다면 반도체 안전 문제는 여전하다고 할 수 있다”고 짚었다.


노동자들이 불안한 작업환경에서 일하는 사이에도 한국 반도체 산업은 쑥쑥 자라 올해 사상 최대 영업이익을 기록하는 샴페인을 터뜨릴 전망이다. 올해 국내 반도체 산업은 787억달러(10월 기준)를 수출해 역대 최고액을 기록 중이다. 한국 전체 수출액(4951억2000만달러) 가운데 16.6%에 이른다. 동시에 실적도 고공비행 중이다. 삼성전자는 지난 3분기까지 67조6480억원(반도체 부문), 에스케이하이닉스는 21조820억원 매출을 달성했다. 이들의 영업이익률은 50%에 육박한다. 그 사이 반도체 등 첨단산업에서 일했던 노동자가 앓고 있는 희귀질병으로 인해 산재를 인정해달라며 신청한 건수가 100건(누적)에 가까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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