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재 보험 본 모습 찾아야"
반도체 등 전자산업의 희귀질환 노동자에 대한 보상은 대부분 개별 기업이 꾸린 보상위원회에 맡겨져 있다.
국가가 피해 노동자나 가족을 산재보험의 우산에 충분히 끌어들이지 못한 탓이다. 정부가 반도체 희귀질환 산재를 인정한 것은 열 손가락에 들 정도로 적다. 희귀질환 노동자는 소속 기업에 따라 아예 보상을 받지 못하거나 다른 보상 수준을 받아들여야 한다.
엘지(LG)디스플레이와 에스케이(SK)하이닉스는 법무법인 등 외부 독립기관에 지원보상 절차를 맡겼다. 하이닉스는 이달까지 백혈병 등 희귀질환(약 100여건)과 갑상선암, 자연유산을 포함해 800여명에게 지원보상을 결정했다. 하이닉스 관계자는 “복지 차원에서 갑상선암(약 120건)과 자연유산(약 600건)을 포함해 포괄적으로 지원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에 비해 삼성전자의 보상범위는 훨씬 협소하다. 2015년 ‘삼성전자 반도체 사업장에서의 백혈병 등 질환 발병과 관련한 문제해결을 위한 조정위원회’가 낸 권고안과 달리, 삼성전자는 공익 법인을 만들지 않았다. 대신 회사는 스스로 전문가들을 위촉해 보상위원회를 꾸렸다. 엘지와 에스케이 사례와는 달랐다.
삼성전자는 유산과 불임, 퇴직 뒤 10년 이후의 발병자 등은 보상 대상에서 제외했다. 그 결과 26일 현재까지 127명이 보상받았다. 지난해 말 기준 하이닉스 직원 수는 2만2000여명으로, 삼성 반도체 부문 직원 수(4만2000여명)가 훨씬 많다.
이 기사를 쓰고 며칠 뒤 한 언론은 반도체 업계 관계자 말을 인용해 127명에게 195억원이 보상됐다고 기사를 썼다. 보상 액수가 공개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 기사를 찬찬히 읽어보면, 삼성전자가 예상했던 금액보다 더 적은 보상금이 지출될만큼 피해자가 적다는 뉘앙스가 느껴진다. 보상액수를 언론에 흘린 목적이 아니었을까.
반올림 활동가인 공유정옥 직업환경의는 “세 기업의 공통점은 최소한의 지원만 한다는 것”이라며 “삼성전자가 조정에 대한 합의를 깨고 일방적으로 보상을 진행하고 있는 것과 하이닉스의 보상지원금 수준이 낮은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삼성전자는 “공익 사단법인을 설립할 경우 상근 인력의 운영 등 보상 이외의 목적에 출연금이 쓰일 수 있어 개별 보상 절차를 진행했고, 보상 기준 역시 조정권고안의 보상 기준과 원칙을 대부분 원안대로 수용했다”며 “불임은 작업장과 연관되어 있는지 증명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또 삼성이 지난해 1월부터 작업장 실태를 점검하고 대책을 마련하기 위해 가동한 옴부즈만 위원회를 두고는 내부의 폐쇄성을 뚫고 제대로 된 정보접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도 산업안전 전문가들 사이에서 제기된다. 옴부즈만위원회가 연 토론회에 참석했던 한 대학 교수는 “토론회에 참석하면 삼성 쪽 이야기에 찬성하는 것처럼 기사화 되는 등 우려스러운 부분이 있어 다음부터는 가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또다른 산업보건 전문가 역시 "삼성 옴부즈만위가 의미있는 연구결과를 냈다는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고 전했다.
옴부즈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이철수 서울대 교수(법학)는 “내년 3월에 삼성전자 사업장 안전 관련 종합보고서를 내고 대국민 보고를 하겠다”며 “외부에서 색안경을 끼고 보는 측면이 있지만 차질 없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반도체 난치병 문제 해결을 위해선 개별 기업에 보상을 맡길 게 아니라 정부가 산재 보상 범위를 확대하는 등 사회보험의 틀 안으로 끌어들이는 방식의 해결책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장재연 아주대 교수(예방의학)는 “다른 산업 분야에도 전부 보상위원회를 만들라고 할 수는 없다. 이미 법원에서 따지고 전문가가 조사하는 비용이 더 들고 있다. 사회적으로 산재기금을 늘리고 보상 범위를 확대해 산재보험의 본모습을 되찾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