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들레헴의 기념품 가게
팔레스타인에 들어온 뒤 분리장벽을 볼수 있는 곳을 안내해달라고 하자, 제일 먼저 간 곳은 베들레헴이었다. 예수님이 태어난 곳, 그곳 베들레헴 말이다. 다른 분리장벽이 황량한 광야에 있다면, 이곳 분리장벽은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까지 깊숙히 들어와있다.
8미터 높이의 분리장벽에서 제일 먼저 눈길을 끈 것은, 얼마전 가자지구에서 이스라엘군에게 저격당한 의료봉사자 라잔 알 나자르의 그림이었다. 21살의 나이에 숨진 그의 그림을 착잡하게 쳐다보고 있는데, 라잔을 그렸다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장벽 앞쪽에 있는 기념품 가게 주인이라고 했다. 그림 앞에서 건장한 체격의 흰색 티셔츠를 입은 그를 만났다. 그는 “여기에 그림을 그려 우리의 메시지를 보여주려 한다”며 “사람들의 눈을 피해 주로 밤에 그림을 그린다”고 했다.
그와 몇마디를 주고 받았는데 길에서 관광객들이 밀려왔다. 그는 관광객들과 몇마디 말을 나누더니 자신의 상점으로 이끌었다. 미국에서 온 관광객들이었다. 이스라엘의 강력한 후원자인 미국에서 온 이들에게 그는 이 분리장벽이 왜 ’불법’인지 한참을 이야기하는 듯 했다. 정의와 평화가 사라진 팔레스타인 땅에 대해서도 이야기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상점에서 분리장벽이 그려진 티셔츠와 컵, 사진을 팔았다.
그에게 ‘상품을 팔기 위해 라잔을 이용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다. 그는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우리의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 기념품 가게를 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서라면 장벽에 그리는 그림도 필요하다고 했다.
미국 관광객들은 그의 상점에서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대놓고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투표했던 사람들이었을까. 아니면 이제는 앞으로 트럼프 대통령에게 투표를 하지 않겠다는 마음을 먹게 되었을까. 난 그가 ’목소리’와 이익을 넘나드는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는 그의 작업이 잘되기를 바랄 수 밖에 없었다. 베들레헴에서 본 장벽은 숨막히게 높고 튼튼해 장벽 너머로 아무런 목소리를 전달하기 어려울 것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미 2018년 이스라엘에 의해 갇힌 가자지구는 피로 얼룩져 있었다. 팔레스타인은 요르단강 서안지구와 이스라엘 남쪽 가자지구로 구분된다. 가자지구는 길이 40킬로미터, 폭 10킬로미터 남짓 좁은 지역이다. 하지만 2007년 팔레스타인의 무장정파 하마스가 선거를 통해 실권을 잡자, 이스라엘은 테러를 막는다며 이곳을 봉쇄해버렸다. 약 200만명의 사람들이 살고 있는 곳을 말이다.
가자지구 사람들은 이에 항의해 이스라엘에 뺏긴 고향으로 돌아가자는 행진을 했다. 이스라엘군은 이들을 무력으로 막아섰고, 2018년 두달이 채 안되는 기간 동안 100여명의 사망자와 부상자 1만여명이 발생했다. 라잔은 이들을 돕는 의료봉사자였다. 그는 의료진 임을 알리는 조끼를 입었지만 이스라엘군의 총격을 피하지 못했다. 21살 여성의 비극적인 죽음은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다시 세계에 환기시키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데도 세계는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에 더이상 나서지 못하고 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노르웨이에서 합의한 오슬로 협정이 있지만, 이마저도 지켜지지 못했다. 미국 트럼프 행정부는 노골적으로 이스라엘 편을 들고 있고, 팔레스타인에 대한 재정 지원도 끊었다. 이제 장벽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도 모르는 상황이다.
그만큼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을 가두는 분리장벽의 규모는 엄청나다. 2003년 이스라엘 정부는 잠재적인 테러 공격을 방지하겠다며 요르단강 서안지구를 에워싸는 약 714킬로미터의 경계선에 차단벽을 설치하는 계획을 세운 것이다. 차단벽 대부분은 철조망이나 웅덩이, 울타리, 동태를 감시하는 초소로 이뤄졌다. 사람들이 많이 사는 지역 근처에는 최대 8미터에 이르는 콘크리트 장벽을 설치했다.
장벽 뿐만이 아니다. 이스라엘 군기지 83곳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있다. 25곳의 산업기지도 만들었다. 26곳의 서비스 지역도 있다. 주유소, 레스토랑도 만들어서 이스라엘 정착촌의 정착을 돕고 있다. 이스라엘이 만든 장벽과 기지는 “뱀처럼(like snake)” 서안지구를 옥죄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