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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너비 아티스트 Oct 12. 2022

어쩌다 부업, 그 첫 1년

지금은 아득하게 느껴지는 2020년. 코로나가 6개월이나 지났는데도 시절은 하 수상하기 그지없었고, 재택근무의 일상은 권태로웠던 그 해 가을, 모든 일은 시작되었다. 갑갑한 나날 속에서 그나마 회사 짝꿍 산드라와 종종 만나 한 번은 우리 집에서, 한 번은 그녀의 집에서 차 한잔 하며 무료함을 달랬다. 그녀와는 출장을 함께 다니며, 일하는 틈틈이 맛집과 미술관 방문을 챙기는 안목이 비슷해 친해졌다. 일로, 휴가로 늘 동분서주하던 그녀는 집안에만 박혀 지내는 게 힘들다고 했다. 당시 네덜란드의 사람들이 대부분 그랬듯, 친구들이 모두 뉴스만 오매불망 바라보며 제재 조치가 해제되길 기다리고 있다는 거다. 그러나 나는 그해 시작한 가드닝과 꽃꽂이에 빠져 조용히 집구석 세상을 오히려 즐기고 있었다. 


11월이었던가. 새해에도 락다운이 연장될 거란 소식이 들려왔다. 자유를 되찾나 희망을 가졌던 이들이 시무룩해졌다. 한편 나는 이런 뒤숭숭한 분위기가 연장된다니까 오히려 이를 이용해 뭔가를 벌이고 싶어졌다. 세상이 엉뚱하게 가고 있으니, 나도 좀 그래 볼까 하는 심산이었다. 그런 생각의 기저에는 물론 꽃꽂이가 있었다. 갈수록 너무나 신기하고 행복한 꽃꽂이. 재택근무의 연장은 곧 시간적 여유를 의미하니, 이 참에 꽃꽂이 실력도 키우고 뭔가 실험적인 것도 해보고 싶었다. 예를 들어, 작게나마 꽃집 간판 걸어보기 같은. 돈 들일 일 없이, 인스타그램 계정 하나 만들어 온라인 꽃집이라 명명하고 꾸준히 꽃 사진을 올리면 어떨까. 최악의 경우는 아무런 매출 없이 꽃꽂이 연습만 들입다 하는 거고, 최상의 경우는 언젠가 정말 고객층이 생겨, 내가 플로리스트로 입지를 다지는 거고. 그렇다면 잃을 게 없었다. 그러면.. 해볼까? 


그러나 마케팅 27년 차인 나에게는 꽤 정확한 현실감각이란 것이 있었다. 내 꽃꽂이가 아직 간판을 걸고 장사를 할 만한 실력이 아니란 건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아직 취미로도 초보인 걸 아무리 적은 규모라도 상거래하기엔 스스로가 민망했다. 그래서 생각한 게 산드라와 그녀의 케이크였다. 그녀는 나와 비슷한 고참 마케터였음에도 오래전부터 틈틈이 공부해 너무 훌륭한 케이크를 척척 만들어냈다. 남는 시간에 꽃 & 케이크를 겸한 온라인 가게나 해보자고 의중을 떠봤더니 의외로 긍정적이었다. 락다운만 끝나면 자기는 바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나한테 경고했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시작할 용기를 주는 것, 초보 플로리스트의 단점을 가려주는 것만으로도 그녀의 역할은 너무나 중요했다. 이렇게 우리의 작은 사업은 심심한 코로나 대비용 오락 프로그램 같은 느낌으로 진행이 되고 있었다.


코로나는 나에게 시간뿐만 아니라 엉뚱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 용기도 함께 덤으로 준 듯했다. 별일 없는 평범한 한 해였으면 시간이 생긴 들 이런 모험을 할 수 있었을까? 난 세컨드 잡에 대한 필요성과 욕구를 4-5년 전부터 느끼기 시작했었다. 분명 회사라는 조직에 속해 일할 수 있는 기간은 한계가 있을 텐데 그 이후에 계속될 긴긴 인생, 걱정 없이 살려면 세컨드 커리어를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닌가? 이런 생각은 40대 중반부터 들었고 난 마음이 급했다. 


그래서 그런지, 막상 꽃꽂이로 세컨드 커리어의 방향이 잡히기 시작하자 일이 척척 진행되었다. 일단, 이런 나의 행보를 회사에서 문책할 사유가 있을까를 알아봤다. 회사에 소속되어 있는 동안, 다른 기업과 고용 계약을 맺는 것은 문제이지만, 내 명의로 기업을 등록하고 활동하는 것은 괜찮았다. 꽃집이라는 게 매장이 없이 존재할 수 있을까도 초반에 했던 걱정인데, 있던 매장도 망해가고, 모든 상업활동은 온라인으로 대체되고 있는 시기여서, 그 역시 별 거부감이 없었다. 


비즈니스에 필요한 인프라나 비용도 생각해야 했다. 일단 꽃꽂이할 공간이 필요했는데, 난 마침 정원의 오두막 하나를 작업실로 공사해 놓은 터였다. 향후 들어갈 비용의 가장 큰 부분은 꽃인데, 정원에 그간 심은 꽃들이 이 비용을 절감해 줄 것이니, 내겐 큰 경쟁력이었다. 두루두루 생각해 봐도 잃을 게 없는 모험이었고 웬만하면 해봐야 하는 시도였다.


산드라와 나. 늘 신났던 런던 출장(좌)과 Flower and Flour 소개용 촬영(우).


그러고 나서 제일 먼저 결정한 건 가게 이름이었다. 산드라의 케이크 공급이 얼마나 안정적 일지, 얼마나 지속될지 몰랐지만 그녀에 대한 나의 심심한 감사의 표시로 이름의 절반을 케이크에 할애했다. 그래서 지은 이름이 Flower and Flour (꽃과 밀가루. 발음은 플라워 앤 플라워)였다. 다음엔 바로 URL 등록과 인스타그램 계정을 오픈했다. 디자이너 후배를 며칠 잘 먹이고 재워 준 뒤 로고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것들이 준비된 후, 네덜란드 상공회의소에 가서 1인 기업으로 Flower and Flour를 등록했다. 이렇게 우리의 부업은 2021년 1월 1일 공식적으로 론칭하였다. 


회사일 틈틈이, 또는 주말에 시간을 내어 우리는 인스타그램에 올릴 콘텐츠 제작을 준비하였다. 테마는 무궁무진했다 - 밸런타인데이, 부활절, King's Day, Mother's Day etc. 이런 특별한 날에 맞는 꽃과 케이크를 세트로 구성하고, 준비해서 촬영했다. 하던 일이 광고이고 수많은 촬영장을 다녔으니 촬영에서 뭐가 중요한지는 파악하고 있었다. 다만, 모든 걸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드는 경험 - 제품도 만들고, 시안도 기획하고 촬영, 카피라이팅, 편집, 업로드까지 - 은 처음이었다. 모든 게 서툴렀고, 재미있었다. 


이때 즈음에 나는 사진의 중요성 및 이로 인한 문제점을 간파했다. 나만의 비주얼 에지(edge)가 없으면 내 꽃과 꽃가게는 광활한 인터넷의 바다에 그냥 묻혀 버릴 것이다. 잘해야 하는 건 분명한데, 그렇다면 사진에 전혀 경험도 관심도 없는 내가 처음부터 배울 것인가, 아니면 전문가를 구할 것인가. 결론은 당연했다. 남는 건 시간, 없는 건 돈이니 내가 배워서 해야 했다. 그런데 딱 하나, 좀 제대로 된 카메라를 구입하는 것은, 어떻게 피해 갈 도리가 없었다. 투자를 해서 장만해야 하는 거였다. 잠시 DSLR을 고민했지만, 지인의 강한 추천으로 iPhone 12로 결정을 하고 폰을 질렀다. 물론, 전혀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 


우리의 촬영 데이. 


그렇게 열심히 꽃꽂이도 하고 사진도 찍고 인스타그램에 매달려 산지 반년. 뭐, 예상했지만 매출이라곤 정말 지인들의 서포트가 전부였다. 처음의 허황된 기대가 무너지자 살짝 힘이 빠졌지만 다행히 금세 초심으로 돌아와 마음을 다잡았다. 어차피 실력 기르기와 연습이 메인이었고 장사는 어림도 없는 이야기였쟎아... 꽃꽂이하는 동안이 제일 행복하잖아...


여름에 규제가 좀 완화되면서 모임이 생기기 시작했다. 친구들이 오랜만에 모여 신나게 놀자며 파티를 기획했는데 없는 예산을 쪼개어 나름 꽃을 주문(?) 해 주었다. 나는 받은 돈 두배 이상의 비용을 들여 넉넉하게 꽃을 사고, 최선을 다해 데코레이션을 해봤다. 초짜 플로리스트가 이런 디너파티를 경험을 할 기회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으니까. 돈은 좀 깨졌지만 엄청난 경험과 멋들어진 사진들을 건져 지금까지 쓰고 있으니 남는 장사한 셈이다. 


디너 파티 테이블 데코레이션. 나는 플로리스트 겸 게스트였다.


이렇듯 꽃가게의 비즈니스적 가능성은 희박해 보였지만 난 개의치 않았다. 큰돈은 못 벌지만, 누군가의 돈으로 내가 좋아하는 활동의 밑천이 마련된다면 그것만으로도 쾌재를 부를 일이지 않은가. 물론 이런 해석(?)은 내가 회사에서 월급을 받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난 조급해하지 않으려고 마음을 다스렸다. 길게는 나름 야망도 있었다. 언젠가 내가 더 이상 월급쟁이 생활을 하고 싶지 않을 때, 그나마 길을 닦아 놓은 꽃꽂이라는 게 있다는 것이 든든한 나만의 무기가 되리라 확신했다. 난 10,000 시간의 힘을 믿고 꾸준히 했다.


그렇게 꽃집 개업의 첫 해가 넘어가던 때, 점차 꽃꽂이 실력에 꽤 자신감이 생겼다. 심지어 나의 디자인을 열렬히 좋아해 주는 마니아 고객도 한 명 생겼다. 나는 꾸준히 2-3일에 한 번씩 내가 작업한 꽃들을 정성스럽게 찍어 포스팅했다. 말이 부업이었지 쏟아부은 마음과 시간, 노력으로는 완전히 주업 그 이상인 열정을 다했다. 그래서 그랬을까. 난 이때 즈음에 만 8년 근무한 필립스 본사에서의 생활을 마무리 중이었다. 그동안에 있던 여러 가지 생활과 심경의 변화, 코로나로 인한 회사와 기업 문화의 변질 등이 모두 엮이고 섞인 탓이었다. 재택근무로 회사 생활의 틈이 보일 때 부업을 시작했는데, 그 새로운 일에서 얻은 에너지와 사색 덕분에 지지부진한 회사 생활을 정리할 용기를 반대로 얻은 셈이었다. 물론 그 이야기도 언젠가는 할 예정이다. 


2021년 가을에 했던 이 작품은 지금 봐도 뿌듯하다.


순수하게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을 수 있는 건 세상에서 제일 큰 복 중 하나이다. 그리고, 그 일이 반드시 먹고사는 전부를 해결해 줄 필요도 없다. 취미가 인생의 낙이 되는 걸 알아가는 시점에 나는 그걸 다시 업으로 삼는 실험을 해 보고 싶었다. 특히 인생에서 '즐거움'이 중요하다면, 취미를 파서 어느 경지에 오르고, 그 노하우를 나눔으로 부수입을 얻는 그런 삶의 실험은 누구라도 해보시라고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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