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보고 싶어서, 포틀랜드_선에 대한 의지
언젠가 친구들끼리 우스갯소리로, ‘서울도 해외여행을 갔을 때처럼 정신없이 돈을 쓴다면 좋은 도시일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여행자에게는 현지인과 같은 경제관념이나 사회문제에 대해 정보가 적기 때문에, 방문한 그곳이 원더랜드와 같은 곳으로 느껴지는 일이 더러 있다. 그러나, 내가 마주한 포틀랜드와 시애틀 또한 여행자의 시각에서 보이는 즐거움만 가득한 곳은 당연히 아닐 것이다.
포틀랜드 공항에서 숙소로 이동하는 우버에서는 캘리포니아에서 온 미술 큐레이터가 동승하게 되었다. 여행자들이 으레 그렇듯, 여기에 무슨 일로 왔는지, 어떤 것을 기대하는지와 같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우버 기사와 나누게 되었다. 일상적인 대화 소재가 떨어지자, 우버 기사는 캘리포니아에서 온 손님에게 홈리스에 관한 이야기를 조심히 꺼내기 시작했다. 노숙자 문제는 캘리포니아를 포함해, 서부지역인 오리건, 워싱턴주 모두의 공통 문제로 떠오르는 주제인 듯 했다. 문제는 딱히 시원한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미국 내 대도시권에서는 워싱턴 DC-뉴욕-보스턴 연선상에 있는 동부에 노숙자 수가 제일 많지만, 주 단위로 보았을 때는 서부 3개 주의 노숙자 문제가 제일 심각한 상황이다. 특히 캘리포니아에서는 2019년 현재 미국의 노숙자 전체 중 1/4이 캘리포니아에 집중되어있는데, 따듯한 기후 특성상 거리에 숙식을 해결하는 노숙자 수가 매우 많아 사회적인 문제로 떠오르고 있는 상황이다. 오리건, 워싱턴주 또한 캘리포니아에 가려져있지만 노숙자 문제가 가장 심각한 지역 중의 하나이다.
이 지역에 노숙자가 집중된 것은 간명한 이유가 있다. IT를 위시한 산업 호황에 따른 부동산 가격 상승이다. 샌프란시스코와 실리콘밸리, 시애틀은 마이크로소프트, 아마존, 애플, 구글과 같은 글로벌 IT 기업의 본사가 집중적으로 몰려있다.
포틀랜드 또한 나이키, 아디다스, 언더아머와 같은 글로벌 스포츠 기업과 인텔과 같은 IT기업이 들어선 첨단산업도시이다. 고임금 노동자들과 외부 이주민은 부동산 가격을 천정부지로 끌어올렸고, 저임금 비숙련 지역 노동자들은 자연스럽게 집을 잃고 도시 외곽으로 빠져나가거나 집을 포기하게 되었다. 결국 이는 미국의 고질적인 양극화 문제와 맞물려 노숙자 문제로 폭발하게 된 것이다.
이 중 문제가 되는 경우는 자발적 노숙이다. 긍정적으로 보자면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는 점에서 크게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노숙 상태를 벗어나려 하지 않는다는 점은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게 만든다. LA의 원베드 아파트 평균 월세는 한화 270만원이다. 집을 포기하고 차와 길거리에서 숙식을 해결하는 정규 임금노동자가 발생하는 이유이다. 한편 미국의 풍요는 길거리의 쓰레기를 뒤져서 얻을 수 있는 수입을 만들어내었다. 부촌의 쓰레기통에 처박힌 아이패드, 핸드폰, 각종 생활폐기물들의 값이 이들의 노숙을 유지하게 만드는 것이다.
북서부 캐스캐디아의 주민들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시애틀은 비록 한 달만에 폐지하긴 했지만, 대기업들에게 부동산 가격을 높인 책임을 물어 ‘노숙자세’를 물리기도 했다. 포틀랜드시는 부동산 임대료 인상률 최대치를 제한하는 법률을 시행하고 있다. 또한 아마존은 노숙자를 위한 시설을 운영하고 MS가 노숙자 기금을 운영하는 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
좀 더 적극적인 시민들은 정치적인 해법을 모색하고 있었다. 미 서부는 현재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지역이다. 내가 방문한 2019년 하반기를 기점으로 발생한 트럼프의 탄핵 이슈와 연계하여, 시민단체들은 민주당 대선주자들에게 노숙자 문제를 우선 문제로 해결하도록 강한 압박을 가하고 있었다.
또한, 마리화나와 성소수자 이슈에도 이들은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오리건주와 워싱턴주는 기호용 마리화나를 사용을 합법화하였으며, 성소수자의 권익을 최대한 보장하려 한다.
그러나, 캐스캐이드 산맥 너머의 내륙 도시들은 이러한 해안가 도시들의 진보적 성향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심지어 맷 셰아 워싱턴주 공화당 의원은 워싱턴/오리건주를 포함한 내륙지역을 하나로 묶어 51번째 주를 발족시키자는 과격한 주장을 하기도 한다. 오리건주 동부 내륙에서는 일부 지역에 대해 무장점거 사태까지 발생할 정도로 지역 내 갈등의 골은 깊은 편이다.
정말 신기하게도 위와 같은 문제는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비슷하다. 부동산 문제, 정치적/경제적 양극화는 한국에서도 뉴스만 틀면 쏟아져 나오는 문제들이다.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서나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쏟아져 나온다는 뜻일테다. 그러나 나는 이 여행 중에 도시 어디에서나 발견할 수 있는 아래 사진과 같은 글귀를 보며, 포틀랜드와 시애틀에 사는 사람들의 선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볼 수 있어 무척이나 고마웠다.
이 글을 쓰고 난 이후, 최근 두 가지 새로운 이슈가 내 이목을 집중시켰다. 하나는 모두가 알고 있을 법한 조지 플로이드 사건과 크로스핏의 창시자인 그렉 글래스먼의 설화(舌禍)이다. 그리고 이 이슈에 가장 선도적으로 반응했던 지역은 다름 아닌 미국 북서부의 캐스캐디아 지역이었다. 그리고 이 두 사건 모두 불합리한 상황을 타파하겠다는 강한 의지와 행동하는 시민들의 모습으로 내게 기억되었다.
흑인들에게 가해진 미국의 구조적인 불평등을 이번을 기회로 타파하자는 Black lives matter 운동이 정점에 달한 곳은 워싱턴주의 시애틀이다. 포틀랜드를 포함한 미국 전역에서 관련된 시위들이 발생했지만, 내 이목을 끈 사건은 바로 시애틀 다운타운과 멀지 않은 캐피톨 힐 구역에서 벌어진 시위이다. 시위대가 '자치구'를 설정하고, 경찰이 없이 생활하는 일종의 히피 공동체와 같은 모습을 만들어 낸 것이다. 철 지난 히피 놀이같이 보일 수 있어도, 공권력 없이도 자생하고 자치할 수 있다는 선에 대한 의지가 없다면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크로스핏 창시자인 그랙 글래스먼의 독선적인 행태에 문제를 제기하고 변화를 이끌어낸 주역 중 한 곳이 시애틀의 박스인 점도 흥미로웠다. 시애틀의 크로스핏 센터였던 로켓은 그간 있어왔던 크로스핏 본사의 리더십 부재와 사회적 이슈에 대한 의견 표명 회피, LGBT 이슈에 대한 부정적 자세 등이 코로나 이슈를 거치며 극대화된 것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였고, 회신은 모욕적인 형태의 메일로 돌아왔다.
이 메일에 대한 분노로 많은 크로스핏 관장들과 엘리트 선수들은 크로스핏과의 제휴 및 대회 출전을 중단하기 시작하였다. 설상가상으로 또 다른 트윗에서, 그랙 글래스먼은 "FLOYD-19"라는 리트윗 코멘트를 새로이 올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해당 트윗 직후, 크로스핏과 파트너십을 유지했던 리복, 로그와 같은 대형 스폰서십이 계약을 해지하겠다는 성명을 발표했고, 곧이어 그랙 글래스먼은 오너십을 포기하고 대표직을 사임했으며, 곧이어 크로스핏의 지분을 커뮤니티 내 다른 사업가에게 판매하기 이르렀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갈등이 발생하기 마련이다. 특히 사회/정치적 문제라면 더더욱 첨예하고 골이 깊어지는 것이 최근 경향이다. 그러나 그게 무엇이든,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있고 실천하겠다는 행동력이 있다면 어디든 어떤 식으로든 사회는 발전해나가지 않을까. 학습된 무기력보다는 활동하고 행동하는 모습이 험난한 이 지구 생활의 몇 안 되는 희망이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