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보고 싶어서, 포틀랜드_여행과 음악은 하나
여행을 기억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자석이나 스노우볼 같은 기념품을 사기도 하고, 현지 작가의 스냅샷이나 카메라를 들고 가 사진을 찍기도 하는 등 각자의 방법으로 모두들 자신의 여행을 남겨둔다. 나는 두 가지의 방법으로 여행지를 기억하는데, 하나는 여행지의 교통카드를 사 모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여행지에서 꽂혀서 듣는 노래를 고른다는 것이다.
교통카드를 모으는 것은 꽤 쉬운 미션이다. 차를 렌트하지 않는다면, 도시를 여행하는 데 있어 교통카드
는 필수품이니까. 여행자용 투어 카드를 파는 도시도 있지만,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현지인들이 사용하는 것과 동일한 교통카드를 사서 이용한다. 언젠가는 이 도시에 다시 돌아와 교통카드를 다시 쓰겠다는 바람도 약간은 섞여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교통카드는 파리의 교통카드인 나비고(NaviGo)였다. 딱히 구매에 제한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신분증과 증명사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덕분에 한국에서 여행을 준비하며 집에 있는 증명사진을 찾느라 온 서랍을 뒤졌던 기억이 난다. 이 외에도 우연찮게 구매하게 된 런던의 지하철(언더그라운드) 150주년 한정판 교통카드 등 몇몇 아이템은 여행지에서의 행운과 같은 기쁨을 주기도 했다. 덕분인지 이후 몇 번 더 런던을 가게 되었고, 공항에서 티켓을 사기 위한 긴 줄을 가뿐히 지나 빠르게 히드로 익스프레스를 타기도 했다.
여행지와 어울리는 노래를 찾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미션이다. 우선, 여행지를 돌아다니며 노래를 듣는 것은 조금 어려운 일이다. 혹시나 일어날지 모르는 위험상황에 비해 귀를 열어놓아야 하기에 이어폰을 찾지 않게 된다. 행여나 노래를 들을 수 있는 상황이 되어도, 그 도시의 날씨와 분위기, 내 기분이 온전히 합일되는 노래를 찾는 것 은 모래 속에 묻힌 반지를 찾는 것과 같이 어려운 일이다. 수많은 노래 중에 위의 조건을 맞추는 바로 그 노래를 찾는건 소소하게 마주칠 수 있는 행운인 것이다.
내가 다녔던 여행지 중, 위 조건을 만족하는 곳은 딱 세 곳뿐이었다. 스코틀랜드와 바르셀로나, 리스본이 그곳이다. 아, 뉴욕에서 제이-지(Jay-Z)의 Empire state of mind는 논외로 하자. 이건 반칙 수준이니까.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와 아일레이 섬에서는 에드 시런(Ed Sheeran)의 Galway Girl / Nancy Mulligan이 그런 노래였다. 켈틱풍의 멜로디가 깔려있는 이 노래를 들으면, 아직도 스코틀랜드의 풍경이 떠오른다. 바르셀로나에서는 같은 가수의 Barcelona가 잘 맞았다. 정말 이 도시에서 노래를 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바르셀로나의 분위기를 잘 살려주었다. 리스본은 한참 방영중이었던 TV 예능 프로그램인 ‘비긴 어게인’에 나왔던 자우림의 ‘스물다섯, 스물하나’가 그런 노래였다. 드넓은 테주강을 보며 들은 김윤아의 목소리는 포르투갈의 전통 음악인 파두와 닮아있는 듯했다.
이번 미국 여행은 포스트 말론(Post Malone)의 노래와 함께했다. 대부분 포틀랜드에서 시애틀로 가는 길을 기차나 비행기를 이용하곤 하지만, 나는 차를 렌트해서 이동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미국에서 차를 운전하는 것이 내게 무언가 다른 의미로 다가올 것 같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로드트립은 나름 유명하지 않던가! 마침 이동경로 안에 있는 곳들이 미국에서도 손꼽히는 와인 생산 지역이기 때문에, 와이너리 투어도 참가할 겸 운전을 해 보기로 결심했다.
컬럼비아 강을 따라 쭉 뻗은 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차의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마일 단위로 표기된 계기판이나 표지판이 조금 헛갈렸지만, 점점 머릿속에서 적응이 되니 운전도 조금씩 여유로워졌다. 바로 그때, 당시 가장 최근에 발표된 포스트 말론의 Hollywood’s Bleeding 앨범이 카오디오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앨범을 순서대로 쭉 듣고 있다 보니, 40분 동안 계속 직진하라는 내비게이션의 안내가 조금씩 끝나가고 있었다. (물론, 그 길의 끝에서는 한 시간 20분 동안 한 번 더 직진하라는 안내가 떠서 좌절하기도 했다.) 수록곡 중 'Goodbyes'에서 포스트 말론과 영떠그Young Thug가 내지르는 목소리는 끝없이 펼쳐진 길과 광활한 미국 내륙 풍경에 잘 어우러져 저절로 흥이 오르게 만들었다.
여행이 끝난 지금도 집에서 유튜브 자동재생으로 나오는 포스트 말론의 음악을 듣고 있으면 그때 미국에서 끝없이 펼쳐진 평원에서 운전했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리고 조금은 설렌다. 다음 여행지는 어떤 노래로 기억할 수 있을까? 어느새 유튜브의 알고리즘에 몸을 맡긴 채 다음 여행의 비행기표를 검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