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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형란 May 28. 2017

천사 땡큐!

내겐 누구에게나 마찬가지로 수호천사가 있다. 원래는 무척 조용히 따라다니는 존재일 터이나, 내가 워낙 칠칠치 못하다 보니 내 수호천사는 가끔 자신을 드러내기도 한다.


한번은 탈북자 교육기관인 여명학교에 설겆이 봉사를 갔다가, 설겆이거리가 잔뜩 든 함지를 끌고 뒷걸음질로 후다닥 부엌 끝으로 달려간 적이 있었다. 그 부엌 끝에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다는 것은 몸이 뒤로 휙 넘어가는 순간에야 알았다. 그 순간 누군가 뒤에서 나를 쑥 밀어주었는데, 아무도 없는 어두운 부엌 구석에서 혼자 영화 매트릭스를 찍고서 천사의 존재를 처음 분명하게 느꼈던 기억이 있다.


그뒤로도 나는 천사를 바쁘게도 하고 가끔 곤란하게도 하며 지냈다.

나는 돈을 많이 버는 강사는 아닌데, 몇 년 전인가 뜬금없이 새해 기도를 하면서 "올해 8월에 십일조 백만원 내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한 달에 삼백 만원 정도를 벌었는데, 방학 때를 겨냥해서 준비하던 프로젝트가 있었고, 거기에 은근히 기대를 걸었던 것 같다. 그런데 7월에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오히려 평소 때보다도 수입이 적어서 8월에는 십일조를 22만원 밖에 못 내게 생겼다.  혼자 얼마나 쑥스러웠던지 "하나님, 취소예요~, 잊어주세요"하고 다시 취소 기도를 했는데, 8월에 갑자기 인세가 뜬금없이 800만원이 들어와서 정확히 8월에 십일조 102만원을 낸 기억이 있다.  

너무 신기해서 출판사에 사연을 물어봤더니, 무슨 이유에서인지 지급이 미뤄지던 저작권료가 여기저기서 한꺼번에 다 들어와서 그렇다는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그걸 8월에 내게 전달하기 위해서 천사가 여기저기서 이런저런 사유를 만들며 지급이 늦춰지게 만들었을 걸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웃음도 나왔다. 그 이후로는 다시 돈 기도를 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난 돈보다는, 그저 하나님이 내 기도를 들으신다는 확신이 필요했던 것 같다.


나는 술을 좋아한다. 술 자체야 뭐 딱히 나쁘겠나마는, 술 먹는 자리는 종종 퇴폐스럽기 쉽다. 한번은 꽤나 퇴폐스러운 자리에서 함께 술을 마시고 있는데, 편안히 술을 마시고 있는 나와는 달리 천사가 안절부절하는 게 느껴졌다. 내게 말을 걸어오는 것 같았다. "나는? 나는 나가 있을까? 나는 여기 있기 힘든데;; "

아, 천사가 있었지. 너무 미안했다. 그 이후로 나는 술은 그래도 끊지 못하고 마시지만 조금이라도 이상한 곳은 가지 않는다. 그건 의리 문제다.


내 수호천사는 나와는 달리 대인관계도 좋은 듯하다. 종종 동료 천사들과 협업을 한다.

얼마전엔 교회친구의 어머니가 수술을 하신 적이 있었다. 수술 당일 회복을 위해 이인실에 입원을 하셨는데, 옆침대 환자와 보호자가 너무 시끄럽게 이야기도 하고 음악도 듣고 해서, 어머니가 쉬실 수 없는 상황이라고 했다. 양해를 구해보기도 했지만 퉁명스러운 대답만이 돌아왔다는 말에, 나는 단톡방에 짧은 기도문을 올렸다. "얼른 천사를 보내서, 옆침대 환자와 보호자 머리 위에 잠 오는 가루를 솔솔 뿌려주세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오분도 안되어서 옆침대 환자와 보호자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너무 졸리다며 불을 끄고 쿨쿨 잠이 들었다는 문자가 올라왔다.


우리집에서 강남으로 가려면 파란색 간선버스 241번을 타야 한다. 엊그제도 출근을 위해 241번을 기다리다가 버스가 와서 타고 보니, 같은 파란색 간선버스인 110번을 탄 게 아닌가. 분명히 정확히 보고 탄 것 같은데 엉뚱한 차를 탄 내가 한심해서 막 내리려던 찰나에 옆을 보니, 말도 안되게 커다랗고 무거운 짐을 가진 할머니가 차를 내릴 준비를 하고 계셨다. 난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내 천사가 그 할머니의 수호천사와 협력을 해서 날 헷갈리게 만든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어차피 나도 차를 갈아타야 하는 참이어서, 짐을 들고 내리면서 천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잘 했어, 천사! 


종종 다짐을 하곤 한다, 같이 다니는 천사 곤란하게 하지 않으면서 사이좋게 잘 지내다가 나중에 천국에서 만나면 복분자주 한 잔 대접해야겠다고.

천사, 늘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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