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기억을 잃어가면서 고집을 부리는 일이 늘었다. 당신은 기억에 없는 이야기고 사건이니 고집을 부릴 수밖에 없다. 엄마의 현실은 당신의 기억 위에 구성된다. 현실을 떠받들던 기억이 무너지자 현실도 모래성처럼 무너진다. 엄마의 어떤 현실은 없는 것이 된다.
엄마의 고집이 세졌다고 해도 아버지의 황소고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엄마와 한바탕 말다툼을 하고 나서 심통이 난 아버지를 겨우 달래고 술자리를 이어간다. 아버지는 술잔을 연거푸 들이키더니 고백하듯이 자신의 말들을 쏟아낸다.
"내가 일기에 쓰는 두 가지 말이 있어. '에이 씨’와 ‘병 주고 약 주고’야." 당신의 현실을 마주할 때마다 화가 치밀어 오른다 했다. 맨 정신으로는 차마 말할 수 없어 일기에 쓴다.
‘병 주고 약 주고’는 엄마를 두고 한 말이었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약을 챙겨 준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마다 아침약 컵과 저녁약 컵에 항암제와 치매예방약을 담아둔다. 이렇게 다 챙겨줬는데도 그것마저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다며 짜증을 낸다. 아버지는 당신이 병을 줬다고 자책하는지도 모르겠다.
약을 왜 먹어야 하는지 기억하지 못하는 엄마는 당신을 타박하는 아버지가 서운할 따름이다. 엄마는 체념한 표정으로 앉아 있다.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울지 않았다. 엄마의 슬픔은 지워지고 있었나.
내일 엄마는 다시 아버지의 밥상을 차릴 것이다. 다정한 말을 건넬 것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이 때로는 좋을 것이다. 긴 침묵이 오히려 다행이다 싶다. 같이 있어도 외로운 우리는 침묵을 위안 삼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