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주의는 어떻게 탄생했을까?
"피터 린치의 투자 이야기" 1장을 정리해봅니다.
자본주의는 상품이나 서비스를 만들어서 돈을 받고 파는 순간 시작된다. 너무 당연한가? 하지만 인류의 역사에서 이 개념을 생각해본다면, 자본주의가 태동된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세계 인구의 절대다수가 돈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땅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 밑에서 노예나 하인으로 일했다. 급여를 받지 못한 것에 누구도 불평불만하지 않았다. 돈을 사용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돈을 버는 행위 역시 금지 시 되었다. 거래를 통해 이익을 추구하거나 남을 누르고 성공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1700년대 후반 국가 간의 교역을 개방함에 따라 시장이 생겨났다. 그리고 상인 계층은 왕실과 귀족보다 더 강력해졌다.
식민지는 모험가 정신이 있는 투자자가 없었다면 개척될 수 없었다. 초기 주식시장은 식민지 건설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탄생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주식은 세계 최초로 주식시장에서 대중에게 판매된 주식이다. 동인도 회사는 이를 항해에 나설 선박을 구입하는 데 주로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낙관론자들은 더 높은 가격으로 주식을 사들였다. 비관론자들은 흔히 지금도 사용되는 거래 방식인 공매도 방식을 통해 주식 가격이 떨어지는 쪽에 베팅했다.
아메리카에 대륙에 첫발을 내디딘 청교도들은 어떻게 돈을 벌었을까? 청교도들은 수년간의 네덜란드 생활에 싫증을 느꼈고 이주하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주에 필요한 현금을 확보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때, 그들이 이주할 수 있었던 것도 투자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주 6일 근무라는 불공정 계약을 체결하고 이주할 수 있었다.
일반 대중에게 주식을 판매했던 사례 중 파리와 런던 주식시장에서 재밌는 일이 있었다. 파리에 있던 미시시피 회사는 "존로"라는 수완가의 개인 회사였다. 왕실과 관계를 맺는 것이 출세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그는, 프랑스 왕실의 부채를 해결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한다. 이는 지폐를 찍어내 부채를 갚는 것이었다. 지폐를 찍는 권한을 독점하게 된 그는 프랑스 재정의 최고 실력자로 하루아침에 탈바꿈했다.
그리고 그는 미시시피 회사라는 두 번째 프로젝트를 공표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미시시피강 주변에 있는 값진 보물을 프랑스로 가져오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렇게 보면 허황된 꿈처럼 보이나, 그는 거짓을 진실로 믿도록 설득하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광분한 파리 시민들은 그의 주식을 미친 듯이 사들였다. 성공 가능성에 대한 분석보다는 그의 계획이 가져올 낭만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그에 대한 비난을 할 경우 감옥으로 보내졌다. 엄청난 거품이 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거품이 꺼졌다. 매도세가 이어졌지만 아무도 매수를 하지 않았다. 투자자들은 전재산을 잃었고, 프랑스 경제와 은행 시스템도 함께 붕괴했다.
프랑스와 이웃나라인 영국에서는, 이 소식을 듣고 같은 모델을 시장에 도입했다. 남해 회사는 영국 정부가 5% 이자만 부담하면 정부의 전체 부채를 탕감할 수 있을 만큼의 자금을 빌려주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그리고 이 자금은 주식을 팔아 마련했다. 영국 의회에서 주식 투자를 하지 말라는 경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주식은 미친듯이 팔렸다. 거품이 끼는 동안에는 어느 누구도 이성적인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이런 시장 상황에 여기저기서 회사를 세웠다. 무한 동력기계를 만드는 회사, 호두나무를 수입하는 회사, 톱밥으로 목재를 만드는 회사 등 온갖 기업이 넘쳐났다. 그럴듯한 계획은 있지만, 해당 자금을 어떻게 사용하겠다는 구체적인 계획은 없었다. 그리고 거품이 꺼졌다. 투자자들은 모든 돈을 잃었으며, 영국의 경제 시스템도 붕괴 직전으로 내몰렸다.
1700년대 초, 미국에서는 이주 정착민들이 자신의 사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 명맥을 유지하는 기업들이 있다. 시대가 바뀌고, 기술의 발전하고, 유행이 변화하는 사이에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현명한 경영자가 필수적이다. 좋은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은 시대와 상관없이 영원히 생존할 수 있다.
그 당시 이런 기업의 주식을 살 수 없었다. 독립 전쟁 이후 가장 먼저 탄생한 공개 기업은 은행이었다. 1784년에 설립된 뉴욕은행은 뉴욕 주식 거래소에서 거래된 최초의 주식이다.
조지 워싱턴이 미국 건국의 아버지라면, 미국 금융제도의 아버지는 알렉산더 해밀턴이다. 현재 민주주의 제도가 성공하기 위해서 금융제도는 필수적임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돈이 없으면 국가운영이 불가하고, 이를 위해서는 은행이 필수적이라고 주장했다. 조지 워싱턴은 그의 의견에 동의했다. 몇몇 사람들은 은행을 악의 근원으로 보았다. 특히 농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이 그랬다.
하지만 은행에 모인 대규모 자본으로 도로, 운하, 고속도로, 교량, 공장을 설립하고, 이로 인해 수백만의 노동자가 풍요롭게 살 수 있었다. 미국 경제를 이끈 에너지와 역동성은 일반 서민들의 주머니에서 나온 돈이다.
시장이 생겨나고, 거래도 급격하게 증가하면서 이러한 새로운 현상을 분석할 사람들이 필요해졌다. 이들이 경제학자이다.
최초의 경제학자는 애덤 스미스라는 괴짜 스코틀랜드 인이었다. <국부론>에서 왕이나 중앙정부의 경제 계획자가 경제 문제에 대해 지시하는 것보다 각 개인이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때 훨씬 잘 살게 된다고 주장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시장을 균형 있게 유지한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성공하고 싶다는 욕망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긍정적인 본능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자신을 위한 이익을 전적으로 이기적인 것으로만 볼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개인의 욕심을 타인의 삶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하게 만드는 "축척의 법칙"이 있다고 주장했다. 기업의 주인이 부유해지면 사업을 확장하고 더 많은 직원을 고용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자본주의는 봉건 시대의 농업과 달리, 기회를 창출하는 것이라 말했다.
최초의 백만장자들 역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다. 대출은 받아 선박을 구매하고 이를 운용했다. 하지만 자신의 상황 능력보다 과도한 돈을 대출받았고, 운송 사업에 일시적인 침체가 오자 그의 금융제국은 몰락했다.
다른 백만장자 역시 선박 산업을 통해 부를 축적했다. 국제 무역으로 사업을 확장하려 했으나, 그 당시 지폐는 금과 같은 귀금속으로 보증을 받아야 했다. 미국은 금 보유량이 적어 많은 돈을 대출해 줄 수 없었다. 이에 국제 무역을 포기하고 미국 시장에 집중했다. 그리고 많은 부를 얻었다. 그가 죽은 뒤 유산에 대한 문제가 불거졌다. 이런 문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1800년대까지 주식 투자는 매우 절망적이었다. 회사가 소송을 당하더라도 주주의 책임이 제한되지 않았다. 이후 유한 책임 회사가 등장하였고, 투자자들은 투자한 돈 이상으로 더 많은 것을 잃을 수 있다는 두려움 없이 투자를 할 수 있었다.
최초의 주식 거래는 월스트리트 인근 나무 아래에서 이루어졌다. 그 당시 영업시간은 2시간에 불과했다. 지금은 억 단위의 주가 거래되고 있는 수준이다.
1835년에는 철도 종목이 인기 종목이었다. 철도라는 단어만 들어있으면 주식이 불티나게 팔렸다. 투자자들은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더 높은 가격의 주식을 매수했다. 거품이 끼고 있었다.
앞서 본 파리와 런던에서와 마찬가지로 투자자들이 한꺼번에 매물을 쏟아내면서 주식과 토지 가격이 급격하게 하락했다. 투자자들은 대출금을 감당할 수 없었다. 대출금 회수가 어려워진 은행은 자금난에 빠졌고, 일부 은행이 파산했다. 대출금 회수가 이루어지면서 유통되는 자금이 줄어들어 소비도 위축되었다. 이는 기업의 매출 감소로 이어졌다. 이것이 1837년의 공황이다. 역사는 반복된다.
인구밀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미국에서는 이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발명품을 만들었다. 즉, 노동 강도를 덜어줄 기계가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자신의 돈을 기꺼이 투자하게 만든 자본주의가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농기계의 개발은 곡물을 수확하는 방법을 변화시켜, 많은 사람들을 기아로부터 해방시켰다. 요즘 들어 사람들은 단순하고 자연에 가까웠던 "과거 시절"을 그리워한다. 하지만, 새벽부터 저녁까지 힘들게 일했던 그 삶을 실제로 경험해본다면 그런 말이 쏙 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