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그만하시죠. 돈키호테

by 와온


이전까지의 전쟁방식이 출중한 전사로서 소수의 기사가 적과의 일기토 승부를 통해 승패를 가르던 것이었다면, 화약이 발명되어 전장에 도입된 14세기 이후 유럽의 전쟁은 대포와 화승총이 지배하는 양상으로 빠르게 변해 갔다.

따라서 소설 돈키호테의 시대적 배경이 된 16세기말은, 더 이상 영웅 서사의 주인공으로서 기사라는 인간 형식이 존경과 선망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시대였다. 그것은 기능을 상실한 유물이었고, 고전 문학 속에서만 회자되며 연명하던 존재였다.


돈키호테는 몰락한 하급 기사의 마지막 아들이었다. 독서광인 그는 기사도 소설만을 집요하게 읽으며 기사도 정신과 그 영광이 부활한다면, 자신의 가문 역시 다시 부흥할 것이라는 믿음을 키워갔다.

그러던 어느 날 돈키호테는 결국 그 자신이 직접 용을 물리친 뒤 공주를 구하고, 마침내 영주가 되어 기사 영웅 서사의 주인공이 되겠다는, 될 리 없는 포부를 안고 모험을 시작한다.

소설 원문을 인용하자면, 꿈의 출정은 그의 나이 쉰 살이 될 무렵이다.


돈키호테는 정말 우리들에게 현실에 안주하지 말고 무모해 보여도 희망을 품고 앞으로 달려 나가라는 이상주의자의 꿈과 희망에 관한 이야기일까?


돈키호테 곁에는 늘 그를 말리거나 얻어터져 기절한 그를 들쳐 맨 채 도망 다니고, 긴 창을 대신 들어주며 믿고 (사실은 속은 거다) 지지하던 배 불뚝이 농부 산초 판사(Sancho Panza, 배 나온 산초)가 있었다.

또한, 공주가 아니라고, 용이 아니라며 현실을 설명하는 세상의 수많은 목소리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말을 듣지 않았다. 아니 말을 듣지 않을 뿐만 아니었다.

세상을 향해, 반박을 거부하는 주장들을 끊임없이 해 댔었다. 자기 언어는 하나 없이 그동안 숱하게 읽었던 기사도 책의 문장들만 담겨진, 오래되고 낡아서 폐기된 말들로만 꽉 채워진 주장들을.

그래서 그의 싸움은 언제나 일정했다.

시비를 먼저 건다.
설명을 듣지만, 듣지 않는다.
대답을 하지만 자기 언어가 없다. 온통 인용문들이다.
달려 나간다.
그리고 맞는다.


돈키호테.

그는 기사도라는 과거의 영광에 기대어 살았다. 문제는 그 영광이 낡았다는 데만 있지 않았다. 그 영광을 다시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그는 질문하지 않았고, 갱신하지 않았으며, 오직 인용만 했다.

그는 이상주의자가 아니라 소통을 멈춘 인간이었다.

자기 사유 없이, 과거의 언어를 현재에 들이대는 사람.

설명은 많고, 대화는 없으며, 경험은 넘치지만 질문은 없는 사람.


나는 나와 세대를 달리하는 이들 무리와 단 한 사람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 역시 이런 언어를 너무 쉽게 빌려 써왔다.

“원래 그래.”

“내가 해봐서 아는데 그건 안 돼.”

나의 문장은 정확했고, 절차는 안전했다.

그래서 나는 ‘나의 말’을 하고 있다 믿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이미 죽은 텍스트(나의 지식과 경험)들로 지금 내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을 덮고 지우는 방식으로만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때마다 나보다 늦게 태어난 이들은 조용했다.

반박하지 않았고, 나를 설득하지도 않았다. 나와의 ‘대화’는 성립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거나, 이미 결론이 정해진 대화에 굳이 참여할 이유가 없다는, 말해도 소용없다는 체념 같은 것을 했던 것 같다.


그들 앞에서 나는 설명을 줄이고 질문을 늘려야 했었다. 경험을 근거로 쓰기보다 참고 자료로 내려놓아야 했었다. ‘나 때는’이라는 말 대신, ‘너희는 어떻게 보고 있나’로 바꾸어 말했어야 했다.


돈키호테는 산초에게 늘 섬 하나를 약속했다. 계약서 없이, 임금도 없이 그저 총독이 되게 해 주겠다는 장담을 공수표로 던질 뿐이었다. 그러나 산초에게 돌아온 것은 돈키호테가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싸움터에 함께 끌려 들어가 치르는 곤욕들뿐이었다.

돈키호테가 무모한 싸움 끝에 두들겨 맞고 피죽이 되면, 그를 들쳐 매고 성으로—정확히는 여관으로—돌아온 사람은 매번 산초였다.

블랙코미디 같은 장면은 반복되고 약속은 다음 전투 이후로 미뤄졌으며 보상은 여전히 유보 되었다.


그럼에도 산초는 떠나지 않았다.

약속을 믿어서라기보다, 그 약속 말고는 이 무임금 노동을 스스로 납득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돈키호테적 출정 옆에도 배 불뚝이 농부 산초 판사(Sancho Panza, 배 나온 산초)와 같은 사람이 있다. 현실을 대신 챙기고, 다음 날을 계산하고, 내가 쓰러질 경우를 미리 감당해야 하는 사람. 나 홀로 세상과 싸우고 있다 믿었지만, 정작 가장 많은 전투를 내 곁에서 함께 치러온 사람.

나의 산초, 아내.


다만 산초는 총독이 되게 해 주리라는 말을 철석같이 믿고 따라나섰지만, 아내는 나에게 이렇게 말한다. 자기는 내 번지르르한 말에 속아서 결혼했다고. 다음 생에 나에게는 기회가 없다고.

호락호락하지 않은 그 말 앞에서 나는 변명할 문장을 찾지 못한다. 기사도 소설을 인용할 수도 없고, 약속을 다음 전투로 미룰 수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아내에게 정서적 지지를 요청한다고 생각했지만, 대부분의 그 지지는 육체적이고 물질적인 ‘수발’로 변해 있었다. 나의 불안은 설명되지 않은 채 전달되었고, 아내는 내 불안의 결과를 감당해야 했다. 나는 도움을 청한다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거절하기 어려운 요구를 반복하고 있었던 것이다.

돈키호테가 창을 들고 세상을 향해 달려 나간 나이와, 내가 이 소설을 처음 텍스트로 읽게 된 나이가 거의 같다는 공교로움 때문에 나는 돈키호테를 마음 놓고 비웃지 못한다. 조롱은 늘 안전한 거리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와 겹쳐 있다.


돈키호테를 통한 통찰은 여기까지다.

더 옳은 말을 찾는 데서 멈추지 않고, 말을 멈춰야 할 순간을 정확히 분별하는 것.

나보다 늦게 태어난 이들 앞에서는 질문부터 꺼내고, 나와 가장 오래 살아온 사람 앞에서는 설명 대신 선택권을 내려놓는 것.


돈키호테는 정상으로 돌아왔을 때 죽었다. 나는 그 결말을 애도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마지막에야 자기 말을 되찾았다는 사실만 기억한다.

나는 더 이상 ‘기사도 소설’의 문장들을 인용하지 않으려 한다. 대신에 나의 말이 언제 과거의 언어로 변질되는지 스스로 감시하며 살기로 했다.

p.s. 그렇다고 해서 내 아내가 배 불뚝이라는 말은 아니니 오해는 마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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