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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Apr 21. 2020

신의 부재

대답 없는 너

주여, 어디 계시나이까?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종교가 있든 없든 간에, 또한 유일신을 믿든 아니든 간에, 사람은 무엇인가 믿고 싶어 한다고, 독일의 기자 출신 학자 '마르틴 우르반'은 주장했다. 인간이 무엇을 믿는다는 것은 어쩌면 본능에 가깝다. 신을 믿지 않더라도, 부모를 믿기도 하고, 내가 가진 환경과 물질을 믿기도 한다. 또한 과학이라는 이성을 믿는다. 세상이 아무리 신이 없다고 부르짖어도, 자신이 감당 못할 순간이 오면 미지의 존재에 대한 열망이 생겨난다. 특히 죽음을 앞두고서는 말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죽음 앞에서 그냥 사그라져가는 연기에 불과하며, 먼지에 불과하며,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한 흔적조차도 의미가 없어져버린다.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문화와 국경, 역사를 넘어서 인간이 무엇인가를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 증명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내 직업은 목사이다. 유명한 목사도 아니고, 삐까뻔쩍한 대형교회 목사도 아니다. 심지어 담임목사도 아니고, 부목사이다. 난 여전히 주류 기독교 사회에서 주변인이다. 사실 뉴스나 방송에 나오는 대단한(?) 목사님들의 이야기는 내 삶과 굉장히 괴리되어 있고,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도 많다. 아직 목사로써 젊은 나이이기도 한 세대차이인지, 환경의 차이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사실 여타 저소득계층의 서민들의 삶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 그러니 저 바벨탑처럼 높으신 분들과는 나는 다른 존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부목사로써 사역(?)이라고 불릴만한 일들을 3년 정도 하고 나니, 아무리 작은 교회라도 타인의 인생의 대소사, 희로애락을 좀 더 가까이에서 경험하게 된다. 결혼식도 경험하고, 장례식도 경험한다. 다른 존재의 고난도 경험하고 고민도 경험한다. 종교인이라는 것은 내가 겪지 않은 일에 대해서 공감해주는 직업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좋은 신부님도 많고, 좋은 스님들도 많다. 개인적으로 내가 가진 종교가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다른 신앙을 가진 종교인들에게 더 호감이 많은 편이다. 내가 만난 다른 종교를 가진 종교인들은 언제나 진중하고 친절했기 때문이다. 물론 개신교에도 그런 분들이 많이 존재한다.라고 피할 구멍을 만들어 놓겠다.


 내가 부목사로 사역할 때 가장 답답한 것은 기도의 문제이다. 아무리 좋은 기도이고, 타인을 위한 기도라도 내가 신이라고 믿는 존재가 응답하지 않을 때가 많기 때문이다. 언제나 나의 신은 부재와 침묵 속에 존재한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여전히 묻는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얼마 전, 40대 초반의 젊은 여자 집사님께서 소천하셨다. 갑자기 돌아가신 것은 아니었고, 오랫동안 지병으로 고생하시던 중에 눈을 감으셨다. 교회에서 그분이 힘겨워하는 모습, 하나님을 부르며 눈물 흘리며 애원하던 모습, 새벽기도회 때, 앉아 있을 힘도 없어 유아실에 누워서 기도하는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또한 많은 교인들이 함께 그 집사님을 위해 오랫동안 기도했다. 하지만, 집사님의 건강은 좋아지지 않았다. 간이 좋지 않으셨기 때문에, 이식을 해야만 회복할 가능성이 있었는데, 이번에 이식 순위 1순위가 됐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병상에서 눈을 감으셨다는 것이다. 담임목사님은 교인의 단톡 방에 기도제목을 올리며, 이 위험한 때를 잘 넘기게 해달라고 바라셨지만, 죽음은 사람의 소망과 관계없이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눈을 감으신 집사님의 가정에게 뭐라고 해야 할지 전혀 생각나지 않았다. 솔직히 나는 내가 믿는 신이 내 기도를, 성도들의 기도를 들어주실 줄 알았다. 하지만 마치 신이 존재하지 않듯이 보기 좋게 나의 기대는 무너졌다. 집사님께서 소천하셨다는 연락을 받고 나는 존재하는지 아니면 존재하지 않는지 모르는 신에게 물었다.


"주여! 어디 계십니까?"


 신의 지독한 부재를 경험했다. 성경을 썼다는 수다쟁이 신이 침묵하는 순간이었다.

 이 순간이 가장 괴롭고 난감한 순간이다. 나는 목사로써 고통당하는 사람에게 아무런 해답도 대답도 할 수 없다. 고통당하는 영혼에 난 아무 말도 걸 수가 없다. 어찌할지 모르는 내 영혼의 동공의 지진만 있을 뿐이다.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입관예배 때 맡은 기도를 읊어대도 내 머릿속은 진정되지 않는다.


 작은 교회임에도 불구하고,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아직 끝나지 않았어도, 교회에는 나오지 않던 교인들이 장례식 입관예배 많이 참석하셨다. 한 달 넘게 보지 못한 교인들을 보니 장례식장에서 반가워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었다. 그들은 조문을 하고, 상주와 가족들을 위로하고, 울고, 기도하고 찬송가를 불렀다. 신의 부재와 침묵과 같은 상황 속에서 말이다. 그리고 입관예배가 끝난 후 돌아가신 집사님의 어머니이신 권사님께서 내 손을 꼭 잡아주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목사님, 감사합니다."


 내가 이 고통받은 가정에게 무슨 감사한 일을 했을까? 없다.

 슬픔 중에 감사를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무엇이 슬픔 가운데 거한 사람을 감사로 이끌었을까?

 나는 신의 부재와 침묵을 경함하고 있지만, 슬픈 당한 사람의 고백 속에는 신의 임재가 있었다.


 무엇이 부재를 넘어 임재로 이끌었는지는 모른다. 신학적으로는 해석할 수 있겠지만, 감정으로 이해되지 않는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코로나라는 위험을 무릅쓰고, 모여 위로하고, 손을 맞잡았다.


"주님! 여기 계십니까?"


 그들의 모습 속에서 신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는 것 같았다.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고, 고통의 자리에 함께 있는 것. 내가 믿는 신은 그런 존재이다. 그럼에도 난 그 신을 다 이해할 수 없다. 왜 그렇게 자신을 찾는 사람을 죽음 앞에서 무력하게 만드는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신의 부재를 경험한다. 하지만, 서로의 위로 속에서 신의 존재를 느낀다. 나는 신의 부재를 통해 존재를 증명받았다.


 당신이 어떤 신을 믿건, 믿지 않건 무엇을 믿으라는 것은 아니다.

인간이 인간답게 만드는 것. 나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 그것은 나 자신이 아니라, 오히려 타인으로 인해 더욱더 명확해지는 경우가 많다.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들 속에서도 난 신을 본다. 난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으로 인해 신의 부재라는 안개를 헤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타인을 통해 걷혀 나간다는 것을.....


 위로를 줘야 할 존재에게 오히려 위로를 받는 것.. 삶은 참 아이러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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