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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Apr 28. 2020

좋은 목자 되세요!

여자 셋과 사는 남자 이야기-3

 몇년 전 충청남도 서산에 S청소년수련원에서 1년간 근무한 경험이 있다. 인천과 부천에서 주로 생활하고 활동 해왔던 삶이 갑자기 충남 서산으로 옮겨 갔는지는 매우 복잡한 사정이 있긴 했다. 덕분에 아내는 갓 태어난 둘째와 발달장애가 있는 첫째를 오롯이 혼자 키워야 하는 극한의 상황에 내몰렸다. 그럼에도 나는 곧 인천과 부천에 복귀할 수 있다는 약속을 믿고 간 것이었기 때문에, 처음 갈 때는 희망을 가지고 서산으로 내려갔었다. 그리고 부모님도 서산으로 귀촌한 상태였기 때문에 서산으로 내려가는 심리적 저항이 더 적었던 것 같았다.


 사실, 충남 서산에 있는 큰 교회에서 전도사로 청빙을 받긴 했지만 딱히 마음이 끌리지도 않았고, 첫째 아이가 꾸준히 다니던 센터 때문에도 거절하게 되었다. 지금 생각해봐도 안 가길 잘한 것 같긴 하다. 나는 청소년수련원에서 주 업무는 카페를 운영하는 것이었고, 부업무는 수련원 안에 있는 교회 사역이었다. 교회 사역이라고 해봤자, 주일예배 찬양인도 정도였다. 카페를 운영하는 것은 딱히 별건 없었고, 재고 관리하고, 커피 타고, 한 달에 한 번씩 정산하고 이 정도였다. 그래도 카페 교회에서 사역해본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적응하는 데에는 괜찮았다. 다만 수련원이 깊은 산속에 있는지라 밤에 산짐승 소리에 놀라기도 했다.


 카페라 산속 깊은 곳에 있다 보니, 조간신문에 홍보지를 넣어도 손님은 그렇게 많이 찾아오진 않았다. 심지어 겨울에 눈이 올 경우에는 산을 올라오는 길 자체가 얼어 차가 올라갈 수가 없어 하루에 한 명도 오지 않았던 때가 꽤나 많았다. 수련원 직원 분들도 한 겨울에는 수련원 자체에 일이 없기 때문에 돌아가며 종종 쉬곤 했는데, 나 혼자 깊은 산속에 남아 있어야 하는 경우도 많이 생겼다. 그럴 땐 카페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노래를 따라 부르곤 했다. 이 기다림도 몇 개월이면 끝나겠지 라는 희망을 가지고 말이다.


 하지만, 그 희망이 무너지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수련원을 관리하는 본 교회의 상황이 이리저리 바뀌면서 결국 나는 잊혀진 존재가 되고 말았고, 나에게 했던 약속들은 휴지조각처럼 버려졌다. 나를 이쁘게 봐주시는 본 교회 목사님들이 노력해주시긴 했지만, 오너(?)의 마음을 돌리기엔 역부족이었고, 나는 사임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카페가 자리 잡을 때까지 있어줄 사람이 필요했던 것이지, 차세대 사역자를 키운다는 마인드는 전혀 없었던 것 같다. 난 그저 순진해서 당했을 뿐이다.


 어느 날, 한 노부부가 깊은 산속의 카페를 찾아왔다. 그래도 커피 맛은 굉장히 좋았기 때문에 내 나름 자신감이 있었다. 역시 노부부 중 남편 되시는 분이 커피 맛을 매우 칭찬하며, 내가 읽고 있던 책을 쓱 보시더니(신학 책이었다;;) 나에게 목사냐고 물어보셨다. 그래서 나는 "아직 목사는 아니고, 곧 목사고시를 봅니다."라고 대답해 주었더니, 본인도 오랫동안 기독교 관련 단체에서 일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그런데 지금은 가톨릭을 믿고 있습니다."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분의 눈빛 속에서 잠시 슬픈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분께 되물었다.


"그곳에서 상처 받은 게 있으신가 봐요?"

내 물음에 그분은 "허허~"하고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곧 카페를 나가시면서 저에게 가톨릭식 인사를 하며 이렇게 말하셨다.


"좋은 목자 되세요." 


 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했다. 그 노부부가 가고 나서 혹시 하나님이 보내신 메신저나 천사가 아닐까도 생각했다. 목사를 준비하고 있는 나에게 목자를 되라니....


 우리나라에서 이상한 '목사'라는 단어는 권위주의적인 말이 됐다. 목사말에 충성해야 집안에 복을 받고 자녀가 잘되고 사업이 성공하는 이상한 주장들이 난무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목사가 권위가 있어야 교회를 다스리기 편리하다는 이점도 있기 때문이다. 저 광화문 광장에 태극기와 성조기와 이스라엘 국기(?)가 흩날리는 한가운데, 저 권위적인 목사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저주의 말을 쏟아내고, 정죄하고, 지옥 보내고, 21세기 종교재판이 그곳에서 열린다.


 예수가 부활한 후 실패감과 낙망에 쌓여, 고향으로 돌아간 제자 베드로를 찾아 밥을 직접 지어 먹이신 후 이런 이야기를 그에게 하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예수는 제자들에게 권위적인 삶을 요구하지 않으셨다. 오직 '목자'의 역할을 요구하셨다. 목사는 위에 군림하지만, 목자는 아래에서 섬긴다. 목사는 사람을 다스리지만, 목자는 양을 보호한다. 목사는 헌금을 요구하지만, 목자는 양에게 좋은 시냇물가로 이끌며 꼴을 먹인다. 목사는 자신을 따라오지 못하는 사람을 버리고 저주하지만, 목자는 쓰러진 양을 짊어지고 간다.


 그 노부부가 다녀간 후 난 목사가 되기 원하는 삶이 180도 바뀌었다. 목사로 불릴지언정 목자의 삶을 사는 것이 나의 삶의 방향성이 되었다. 


 때론 우연한 만남이 나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을 수도 있다. 그 노부부를 다시 만날 수는 없었지만(진짜 천사인가?) 그들로 인해 내 삶은 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내 마음이 높은 곳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그 노부부의 만남을 생각하면 다시 내려가는 삶을 선택할 수 있다. 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곳은 병실이다. 왜냐하면 교통사고가 났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타고 가던 중 비보호 좌회전 차량이 나에게 몸통 박치기를 시전 했다. 덕분에 왼쪽 허벅지와 엉치쪽은 심한 타박상을 입고, 갈비뼈가 골절되었다. 한 주가 넘게 교회 일을 하지 못하고, 병원에 갇혀 있으니, 환자의 삶이 녹녹지가 않았다.


 입원하고 며칠간은 걷지를 못해서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고, 지금은 갈비뼈 때문에 복대를 하고, 옆으로 눕지도 못하는 신세를 느끼고, 코로나 때문에 제한된 면회 때문에 사람들도 찾아오기가 어려워 극도의 고립을 경험하고 있는 신세이다. 하지만, 이 고립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러한 경험들이 나를 낮은 곳에 머물게 하는 목자의 삶의 자양분이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파도 웃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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