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땅크 시리즈 2탄
제4차 중동전. 초장엔 아랍인들의 개가였다. ‘기습’이라는 게, 이스라엘의 전유물만은 아니라는 걸 보여준 한판이었으니까. 이집트의 기습은 보기 좋게 성공했고, 이스라엘은 쇠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 혼란에 빠진다. 그러나 클래스는 어디 가는게 아니었다. 초기의 충격을 수습하고, 곧이어 반격에 나선다.
북쪽 골란고원에선, 밀고 내려오는 시리아 탱크 1500대를 향해 10분지 1밖에 안 되는 기갑부대가 과감히 돌격, 제2차 대전이래 가장 큰 탱크 배틀을 벌이면서 승리를 쟁취, 뒤이어 시리아 수도 다마스쿠스 39킬로 전까지 전진하는데, 이때 같은 아랍의 형제국가들인 이라크가 1개 기갑사단, 요르단도 1개 기갑여단까지 보내 가세했지만 이스라엘 군 탱크 센추리온의 진격을 막을 수 없었다.
다음 상대는 이집트였다. 오히려 수에즈 운하를 기급 도하, 운하 너머의 이집트 본토로 침입한다. 그리고 카이로까지 100여 킬로! 이번엔 이집트가 뒤통수를 맞은 것이다. 경악의 이집트 군은 시나이 반도 내의 진격을 중단하고 방향을 꺾어, 도하 지점을 치기 위해 대량의 탱크들을 보내는데, 이게 바로 그레이트 비터 호(湖) 부근의 전차전. 여기에서도 이집트 탱크들은 녹아버린다. 도하지점으로 올라오는 이집트 제 25전차 여단을 요격, 완전 전멸시켜버리는데, 여기에서 격파된 이집트 탱크는 1백여 대. 1개 기갑 여단의 탱크가 보통 1백 대 수준이니(이스라엘은 이것보다 적은 80대 정도다), 기갑 여단 하나가, 순식간에 사라진 셈이다. 이때 이스라엘 기갑부대의 손실은? 제로였다. 단 1대의 손실도 기록하지 않으며, 이집트 육군 제25전차 여단을 말소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20년 쯤 뒤 벌어진 걸프전. ‘스파르타의 3백과 걸프전의 3백’이라는 글에서도 나왔듯, 여기서도 소련제 전차는 일방적으로 당한다.
전쟁이 끝난 후 미국은 3천 대 이상의 이라크 탱크를 부셨다고 발표했는데, 지나치게 과장됐다는 비판과 함께, 1천 수 백 대 선으로 수정 돼야 한다는 얘기도 나중에 나오며 이게 정설로 받아지는 분위기이긴 하나, 어쨌든 중동에서의 강자였던 이라크 탱크들이 일방적으로 당하고, 일방적으로 궤멸됐다는 사실만은 세상 누구도 부인하지 못 한다. 한 마디로 말해 시나이 반도건, 스에즈 운하 근처건, 또 이라크나 쿠웨이트 근처건 소련제 탱크들만 박살난 것이다.
그리고 잘 알려지지 않은 전차전이 있다.
아프리카 맨 아래, 관목들이 있는 들판에서 벌어진 부쉬 전쟁. 백인 정권 시대의 남아프리카 공화국과, 앙골라와의 전쟁이다. 앙골라엔 6백여 대가 넘는 탱크가 있었고, 큐바 용병들이 크루로 참가하기도 해, 제법 중규모의 전차전이 벌어졌는데, 여기서도 소련제가 당한 건 마찬가지. 앙골라의 소련제 T54, T55가, 센추리온 탱크를 개량한 남아공의 올리판트(남아공에 올리판트라는 산이 있는데, 그래서 산 이름을 탱크 명으로 한 건지, 아니면 코끼리를 뜻하는 엘레판트의 그 곳 말인지는 모르겠다)와 붙어, 단 한 번의 전투로 60여대가 몰살당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때 올리판트의 피해는 없었고, 지뢰를 잘 못 밟아 손상을 입은게 몇 대. 물론 그 탱크들은 곧바로 회수돼, 수리가 끝난 후 부대로 복귀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소련제 탱크들은 왜 붙었다고 하면, 깨지기만 하는가? 그것도 모조리, 형편없이, 일방적으로 깨지느냐고? 정말 이게 사실인가? 상식적이지 않은 킬 레이쇼들, 깡통으로 만든 탱크도 아니고, 그 숫자에 리얼리티가 있냐고? 그러나 사실이다. 백 프로는 아니라 해도 거의 다 팩트다.
물론 그 와중에 이긴 것도 없는 건 아니나.. 거의 다 팩트다. 딱 한 번 이긴 적이 있었다. 레바논 사태 초기에 벌어졌던, 시리아와 이스라엘의 전차전, 당시 시리아는 비밀리 장비한 최신예 탱크 T72를 느닷없이 출동시켰다. 그때가 80년대 초니까, T72는 거의 환상이었다. 어떤 서방측 탱크한테도 이긴다는 소문과 함께, 하도 빠르게 달려 ‘플라잉 탱크’라는 별명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 플라잉 탱크는 125밀리 활강포로 이스라엘의 메르카바와 M시리즈 탱크 몇 대를 격파한다. 물론 시리아 쪽도 피해를 본게 있었겠으나, 이 전투를 그들의 승리로 보는 이유가, 주저앉아서 나포된 이스라엘 탱크로부터(아마 M60일 것이다), 폭발반응장갑이라는 ERA를 뜯어내, 그걸 모스크바로 급히 보냈고, 소련은 그걸 또 연구해, 오늘 날 러시아나 동부 유럽 쪽 탱크 ERA의 기초가 됐다는 얘기 때문이다(아마 그 기술이 북한까지 흘러들어가지 않았을까? 그들 탱크에 ERA를 덕지덕지 붙인 게 있으니까). 그러나 어찌됐던 소규모 전차전이었다. 이름조차 특별히 붙지 않을 정도의... 그리고 필자가 알기로는 소련 측이 이긴 유일무이한 경우다.
소련은 전차왕국 아니었나?
그러면 이쯤에서 생각해 볼게 있다. 소련제 탱크들이 왜 이러느냐고? 그야말로 ‘전차 왕국’ 아니었던가? 독일을 흔히 ‘전차군단’이라 표현하면, 소련은 아예 ‘전차왕국’이다. KV와 함께 T34라는 걸작 전차를 내놓고, 이걸 잡기 위해 독일이 판테르와 티게르(타이거)를 내놓자, 이번엔 ‘맹수 도살자’라는 닉네임의 중탱크 1S(요셉 스탈린) 시리즈들을 내놔, 결국은 베를린까지 진격한 나라다. 그리고 히틀러를 자살케 하고, 나치를 지상에서 사라지게 했다.
그뿐인가? 전후에도 유력한 탱크들을 대량 생산, 여차하면 서부 유럽으로 밀고 들어갈 듯 폼을 잡아, 나토 지휘관들을 공포에 떨게 했다. 당시 소련 기갑부대의 진격은 ‘스팀롤러’가 굴러오는 것 같아서 일단 국경을 뚫고 오면, 이걸 저지할 물리적 방법이 없었기에.. 그런데 어째서 소련제 탱크들은 사냥터의 사냥감으로 전락해, 골란 고원이건 이라크의 사막이건, 앙골라 부쉬 지대 건, 가는 곳 마다 족족 얻어터지기만 할까? 공포의 스팀롤러가 허명(虛名)이었나?
결코 그렇지 않다.
소련제 탱크는 그래도 만만치 않다.
지구 곳곳에서 벌어졌던 전차전. 그리고 죽을 쓰기만 했던 전차전. 그러나 그 안에는 소련제 크루가 타고 있지 않았다. 기껏해야 큐바 용병. 따라서 소련 전차가 약한 게 아니라, 소련제 전차에 탄 승무원들의 실력에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흔히 알고 있는 공중전 얘기에, 이런 게 있다. ‘구닥다리 기종을 모는 노련한 파일럿보다, 최신형 기종의 신참과 붙는 게 훨씬 편하다’ 크루의 질이 어떤 면에선 신형무기보다 앞설 수 있다는 건데, 당연히 아랍 쪽은 후자였던 것이다.
좋은 무기에 타는 저급의 크루. 아니면 그저 그런 무기에 타는 저급의 크루. 그런데 상대방 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다. 그들의 실력은 일류였다. 아니 초일류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이런 얘기가 나왔을까. 아마 이스라엘 공군이, 이라크의 오시라크 핵발전소를 장거리 폭격, 그래서 후세인의 원자폭탄 개발 야망을 그대로 주저 앉히는데 성공한 다음, 나온 이야기가 아닐까 싶은데.
“세상천지엔 믿을 만한게 딱 3가지 있다. 이들은 절대 배신 안 한다.”
첫 번째는 늙은 마누라.
두 번째는 늙은 개.
세 번째는 미국제 전투기에 탄 이스라엘 파일럿.
'미제 전투기'에 탄 '미국 파일럿'이 믿을만 하다는게 아니다.
'미제 전투기'에 탄 '이스라엘 파일럿'만 믿을만 하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전차병들은 어떤가? 당연히 이 반열에 오른다. 영국제 센추리온, 미국제 M 시리즈, 자국제 메르카바에 탄 탱크 배틀의 프로페셔널들. 그런데 아랍이나 앙골라 쪽은 어떤가? 훈련이 충실치 못하고, 지휘관의 질이 떨어지며, 부대원 상하 전체의 전술 구사능력도 떨어지는 데다, 모랄(사기)도 부족하다. 그러니 세상에서 가장 영악스럽고 효율적으로 싸우는 유대인한테, 아니면 남아공 백인들한테 얻어터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거 하나만 가지고, 100대 0이니, 300대 0이니 하는 참패의 이유를 갖다 대기에는 불충분하다. 또 다른 게 있다.
이것 때문에 소련제 무기는 쉽게 패한다. 아니 이게 뭔놈의 타입인데? 소련이 무기를 수출할 때, 자기네 것보다 약간 떨어지는 걸 주는데, 그걸 몽키 타입이라 말한다. 예를 들어 전투기를 수출한다고 치자. 이때 성능 좋은 레이더나 화기 관제 장치 등, 고가이면서 최신예 장비는 빼고, 저급품으로 달아주는 경우가 왕왕 있다. 쉬운 말로 ‘다운 그레이드’인데, 미그 23전투기의 수출 라인에서 미그 23MS 같은 게 이런 타입이다. (국격을 드높이는 우리 기업이 자국민을 상대로 내놓는 제품 퀄리티를 생각하면 이해가 쉽다.)
겉보기에는 멀쩡해도 레이더나 화기 관제장치 같은건 구형이다. 특히 레이더 같은 경우, 한 세대 전의 미그 21것을 달아, 단순한 열 추적 미사일 이외에는 달기가 어렵다. 서방측 미사일로 예를 들면, 단거리인 사이드와인더는 다는데 스패로우나 AMRAAM 같은 중거리 미사일은 달지 못 한다는 의미다.
이는 자기네 일급 군사 기밀의 해외 유출을 막고, 겸사겸사 가격도 낮추기 위한 방안인데, 아프리카나 중동 등지의 발전도상국이라면, 이란 타입이 별 문제가 안 될 수 있다. 정비나 유지가 까다롭지도 않으면서 가격이 다운되니까. 거기에다 또 상대국들도 고만고만한 전투기를 운영하니, 크게 불만족스럽지는 않다. 그런데 상대 나름이지, 이스라엘이나 서방측의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라면 사정이 달라진다. 그들의 무기는 최고이고, 그 무기를 모는 크루 또한 일류 아닌가? 그러니 몽키 타입 내지는 짝퉁 수준의 무기로, 어떻게 당할까?
아사드 바빌(바빌론의 사자), 이름은 멋있지만..
걸프전 시, 후세인의 지상전 ‘으뜸패’는 T72 탱크와 아사드 바빌이었다. 특히 아사드 바빌. T-72의 녹다운 생산형인데, 피탄 면적이 작은 포탑에 두터운 장갑, 거기에 125밀리 자동포를 장비했으니, 스펙이 상당했다.
그런데 이 스펙상으로 일류이던 아사드 바빌, 실상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가 않았다. 폴란드가 자기네 T72를 실컷 생산하고 난 뒤, 그 시설을, 이라크에다 통채로 수출, 아사드 바빌 탱크 공장을 만들어줬는데(체코슬로바키아 쪽에서도 많은 도움을 줬다는 얘기도 있다), 문제는 그 공장이 15년이나 된 낡고 오래된 시설이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포탑엔 복합 장갑이 전혀 들어가 있지 않아, 방어력에서 동종의 T72와는 한참 차이가 나고, 주포에서 쏘는 125밀리의 철갑탄도, 상대 전차를 뚫고 들어 갈 때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탄심(彈芯)이 소련처럼 텅스텐이 아니고, 그냥 강철 탄심. 그래서 당연히 관통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데, 급한 데로 마련한 최신형 포탄도 1천 미터에서 450밀리.
헌데 M-1에이브럼즈는 어떤가? 그 거리에서의 대(對) 철갑탄 방어력은 600밀리 플러스다. 반면 거기에서 상대를 쏘면, 명중률 98프로! 백발백중은 안 되도, ‘백발 구십팔중’은 된다. 그러니 ‘바빌론의 사자’는 ‘바빌론의 필패’ 내지, ‘바빌론의 루저(패배자)’로 전락하는 길 이외에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또 이라크가 이 T-72 시리즈를 대량 보유했나? 그렇지 않다. 중국산 수입 탱크 59식과 69식이 가장 많았다. 두 타입 모두 소련제 T-54, 55의 라이선스 판으로, 100밀리 주포를 장비한 1세대 전차다(그나마 소량의 59식에, 105밀리를 장착했다는 얘기도 있지만). 그런데 이라크는 이란과의 전쟁을 치르느라, 이걸 무려 2천 7백 대나 수입했다. 59식이 700대, 69식이 2천 대! 정말 엄청나게 많은 숫자다.
그런데 이 중국제 T-54, 55는 걸프전이 벌어지기 전, 이란과 상당히 흥미로운 전투를 벌인 적이 있다. 이란이 소련으로부터 수입한 T-54, 55와 전차전이다. 양쪽 다, 모양과 장갑, 주포가 동일하나, 좀 다르게 표현하면 ‘허가 받은 짝퉁’과 오리지널의 대결. 다른 의미에서는 중국과 소련 제품의 대결이기도 했는데, 승무원의 질에서, 한 수 떨어지는 이란이 이긴다.
오리지널 소련제의 승리였고, 중국제의 패배였다. 사실 이란, 이라크 전쟁에서 돌아가는 모양새는, 이라크가 우세한 편이었다. 상대방 이란은 예전의 팔레비 왕 시대 고급장교들을 다수 숙청했기에, 대폭 질이 낮아짐을 피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란이 승리를 거둔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다.
탱크 품질의 차이.
중국의 금형 품질이 떨어지고, 부속품들도 소련만큼의 수준이 안 되기에, 전체적으로 한 차원 떨어지는 물건이 굴러 나왔던 것이다. 이것은 필자의 ‘북한 기갑부대, 일주일이면 부산까지 진격한다?’에서도 잠깐 언급한 부분이다. 북한이 T-62를 설계도대로 만든다 해도, 그들의 낮은 제철, 제강 수준과 금형 및 기타 산업 수준으로 인해, 썩 좋은 품질은 내 놓지 못 할 거라는 부분.
그리고 또 하나가 있다.
소련제 탱크가 당하기만 하는 3번째 이유.
사실 소련 탱크들의 주 무대는 유럽이다. 독일 북부의 광대한 평야와 하천 지대를 돌파해, 서부 유럽의 내륙부로 쳐들어가는 게, 그들의 본명(本命). 그렇게 될 때, 소련 기갑부대의 무시무시한 진격을 상징하는 단어, ‘스팀롤러’와 합치가 된다. 더군다나 스팀롤러를 더욱 더 무섭게 만드는 건 공중엄호다. 수많은 전투기와 지대공 미사일, 그리고 같이 따라다니는 대공자주포.
허나 중동은 다르다. 제공권을 이스라엘이나 다국적군이 갖고 있어, 엄호는커녕 공중 공격을 당하지 않으면 다행이고, 사막 지형 대부분이 평탄한 데다, 날씨까지 흐린 경우가 드물어, 언제나 시야가 트여있다. 더구나 탱크라는 물건은 기동 시 다량의 먼지를 발생시킨다. 따라서 전투 이동할 때 기도비닉은 커녕, 움직이기 시작하면 곧바로 적에게 탐지된다. 더군다나 유럽보다 훨씬 더 일찍, 훨씬 더 먼 거리에서부터 첫 방이 발사된다.
걸프전 시 첫 발포 거리가, 평균 2.5 킬로에서 3킬로라면 말 다하지 않았나? 그야말로 고수급 장창(長槍)잡이와, 엉성한 칼잡이의 대결이 된다. 상대는 칼이 주무기인데, 그렇다고 칼 솜씨나 좋은가? 세미프로 이하다. 그런데 이쪽은 완전 프로페셔널 창잡이(칼도 잘 쓴다), 그래서 자기의 ‘위협 바운더리’에 들어오기도 전, 상대를 그냥 찍어 버린다.
따라서 소련 탱크의, 형편없는 성적의 이유를 정리하면 이렇게 된다.
첫째, 승무원 기량의 차이.
둘째, 몽키 타입 아니면 엉성한 짝퉁 전차.
그리고 셋째가, 사막이라는 환경.
거기에다 또 제대로 된 공중 엄호를 받아 봤나? 알다시피 걸프전의 제공권은 백프로 다국적군한테 있고, 중동전도 IAF(이스라엘 공군)의 독무대였다. 정말이지, 한 번이라도 제대로 된 조건하에서 싸워 본 적이 없는게, 소련제 탱크다. 그래서 그들 탱크 설계자들은 상당히 억울해 할게 틀림없다.
“우리 소련 기갑부대하고 정식으로 붙어봐라, 그렇게 당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걸프전에서의 참패는, 그들로서도 대단한 쇼크였다. 짝퉁이건 라이선스건, 아니면 승무원의 질이 저급이건, 펀다멘탈은 소련 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러시아 인에게 있어, 탱크는 어떤 의미인가? 대 조국 전쟁(제2차 대전의 소련 명칭, 원래는 그레이트 패트리오트 워, 거대한 애국전쟁이라 한다)에서 ‘어머니 러시아’를 지켜내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 무기인 동시에, 반세기 이상 엄청난 외화를 가져다 준 효자 수출 상품이었다.
T-54, 55가 무려 10만 대나 만들어졌는데, 그걸 다 소련이 사용했겠는가? 그렇지 않다. 반 이상이 외국으로 팔려나갔다. 바로 그런 것처럼 소련의 외화 획득은, 예나 지금이나 ‘무기하고 석유’다. 따라서 러시아의 탱크 설계자와 기술자들은 다시 전차 왕국을 세우기 위해, 지금 절치부심 중이다. 그들의 당면 목표는 아브람스키 킬러(에이브럼즈 킬러)! 걸프전 시 욕을 바가지로 먹었던 T72를 대폭 개량해, 사통장치는 물론이고, 주포 발사속도도 분당 6발까지 올렸으나,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모두 리타이어 시키고, 좀 더 전투력이 확대된 T80에다 T84, T90, 최근엔 T90의 결정판 T90MS까지 내 놓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러시아 무기하고, 우리 군도 무관치 않다. 불곰 사업으로 인해, 1백 여 대가 넘는 그들 장갑차량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T80U 탱크와 BMP3 보병전투차다. 어찌됐든 지금 국방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 그리고 또 성능이 괜찮다. 아니 괜찮은 정도를 지나, 군에서 상당히 흡족해 한다. BMP3는 100밀리 포를 가지고 있어, 경탱크 역할과 함께 대 전차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그리고 T-80U 탱크. 무엇보다 관통력이 죽여준다고 한다.
그래서 T-80U는 한반도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알다시피 북한에는 5개나 되는 기계화 군단에다, 전차 군단까지 보유해, 같은 혈통이 무수히 많기 때문이다. 단지 숫자만 많은 게 아니라, 종류도 다양하다. 제2차 대전까지 거슬러 올라 가, 그때 나온 T34를 아직도 사용 중이고(최근 사진에 T34가 확인된 적이 있다), 역시 같은 시대의 100밀리 포 탑재 SU100 대전차 자주포도, 전쟁이 터지면 갖고 나오려고, 예비 물자로 보관 중이다.
그리고 T54, 55를 비롯해 천마호와 그 개량 형들인 폭풍호, 선군호 모두가 T62에서 갈라져 나온 소련 혈통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같은 혈족 T80U.
이중 누가 가장 센가?
논의할 필요조차 없다. T80U가 완전 ‘스페셜 원’이다. 월등하다.
탱크도 전투기와 마찬가지로 세대 구분을 하기도 하는데, T80U는 3세대와 4세대 중간쯤인 전차다. 그래서 3.5세대 탱크라고도 하는데, 휴전선 너머 북한은 그렇지 않다. 올디스 벗 구디(Oldies But Goodies)라는 얘기가 있으나, 그것은 추억을 작동시키는 물건이나, 팝송, 가령 조던 운동화나, 토토가의 터보, SES 같은데서 적용 가능한 이야기다.
전쟁은 추억을 더듬으면서 하는 게 아니라, 가용할 수 있는 모든 무기에 모든 수단방법을 동원해 한다. 그래서 1세대나 2세대 연로(年老)하신 탱크들이 전쟁터로 나오면, 여지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저들의 최신예라고 할 만한 선군호도, 조금은 까다로운 상대이겠으나, 어찌됐던 그 펀다멘탈이 제2세대 전차 T62에 있지 않은가? 그래서 T80U에겐 힘들다. T80U와 같은 125밀리 포를 단 것으로 추정되나, 그쪽은 소련 탱크 혈통으로 볼 때 서자(庶子)에 불과하고, 이쪽은 정통파 적자(嫡子)이기 때문이다(불곰 사업으로 우리가 T80U를 들어올 시, 소련 당국은 어떤 장비도 다운그레이드 시키지 않고, 당시로서 최신예의 T80U를 그대로 내주는 성의를 보였었다).
그러나 우리 쪽에서도, 애석한 부분도 없는 건 아니다. 그것은 T80U의 도입 숫자가 상당히 적다는 것. 당시, 이 탱크의 성능에 몹시 만족한 군은, 도입 숫자를 대폭 늘려 1개 기갑 여단을 창설하려고 했다는데(러시아한테 받을 돈이 꽤 남았었고, 탱크 단가도 저렴했으니까), 이 계획이 불발로 끝나버렸기 때문이다. 이유야 여러 가지 있겠으나, 우선 미국이 압력을 넣었을 테고, 국내 재벌업체의 로비도 있었을 게 틀림없다.
그리고 이후 들어 선 보수 정권의, 친미 성향에다 생리적 러시아제 무기의 경원. 그렇지 않겠는가? 미국으로 봐선 한국이 영원한 미국 무기 시장이며, 언제나 미국 군산 복합체의 봉이 되길 원하는데, 난 데 없이 러시아 제 무기를 수입하고 자빠졌으니, 극히 못 마땅해 했을 것이고, 국내 탱크 제조업체 역시 T80U가 맘에 안 드는 건 마찬가지... 잘 못 하다간 K시리즈 탱크의 주문량이 줄어드니까. 그래서 T80으로 이뤄진 기갑여단 창설은, 이뤄지지 못 했다고 한다. 물론 결단코 오피셜은 아니다. 그저 인터넷 밀리터리 팬들 사이에 돌아다니는 이야기일 뿐이다. 그러나 충분히 유추할 만 한 내용이고, 그 내용에 리얼리티가 있음직 하다는 건 국군의 날 행사를 보면 된다.
국군의 날 행사에서 T80U을 본 적 있는가? T80U은 커녕, 100밀리 포의 보병 전투차 BMP-3도 본 적이 없다. 특히 T80U, 나오기만 하면 그 작은 포탑에 장대한 포신, 그리고 한국에선 접해 보지 못 한 소련제 무리라는 점에서, 상당히 인기를 끌 것 같은데, 우리 국민의 돈으로 사오고, 국군이 장비한 우리 무기가, 도입이 꽤 오래 전 일인데도 나온 적이 없다.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미국이 싫어하고, 한국 쪽은 미리 알아서 안 내보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휘관 용 2대를 포함해 35대, 기갑부대 편성으로 딱 1개 대대 분의 T80U가 주는 상징성은 무시 못 한다. 소련제 정통파 탱크로, 소련제 탱크의 아류를 너끈히 제압한다는 의미가 크기 때문이다. 북한 지휘관들도 T80U에 대해 상당한 껄끄러움과 함께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을 게 틀림없다. 자기네들이 수 십 년에 걸쳐 애쓰고 애써서(70년 말부터 T-62를 라이선스 생산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폭풍호와 선군호까지 만들기에 이르렀는데, 남반부는 단번에, 그걸 뛰어넘어 버렸으니까.
뛰어넘는다는 의미가 무엇인가?
T80U한테 북한의 모든 탱크는 역부족이라는 얘기다. 선군호만이 조금 폼 잡을지 몰라도, 폭풍호니 뭐니, 천마호 시리즈니 뭐니 하는 것들은, T80U에 달린 125밀리 자동 활강포에 그냥 뚫려 버리니까.
그리고 덧붙이는 DU(열화 우라늄)탄 이야기...
'스파르타의 300과 걸프전의 300'을 시작으로 탱크 킬러이면서 미니 어태커(mini attacker)인, ‘G91’등, 몇 개의 밀리터리 칼럼을 써 왔습니다. 전하려는 의도와 다르게 비껴가 아쉬운 적도 있었고, 의외의 호응에 신이 나기도 했습니다. 다행히 반응이 나쁘진 않은듯해 감사하고 참 힘이 납니다. 그래도 뒤를 돌아보니, 잘못 쓴 데가 없지않아, 말미에 몇 자 적습니다. 활강포를 활공포라 적었는가 하면, 서양에서 13자가 들어가는 부대가 없듯, 우리도 4자가 들어가는 부대가 없는데, 기갑 여단 얘기를 할 때, 제 4여단이 있는 것처럼 적었네요. 바로 잡아주신 분들 이 자릴 빌어 감사의 말씀 전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이와 약간 다른 경우로 ‘스파르타의 300...’ 편에 나오는 DU 즉, 열화우라늄탄. 몇 몇 고수 분들께서 이 포탄은, 관통하기만 할 뿐, 탱크 내를 불바다로 만들진 않는다고 지적하셨는데, 물론 그런 경우도 있겠습니다만.. (제가 아는 경우를 적어 보겠습니다.) DU 탄의 금속 비중은 몹시 높아, 두꺼운 장갑도 그냥 뚫고 들어갑니다. 특히 우수한 점은, 일단 적 탱크에 접촉, 장갑 속으로 들어가면, 들어가는 도중에 앞머리가 쐐기처럼 변형이 된다는 거죠. 왜냐하면 DU 탄에게는 Self Sharpenes, 다시 말해 ‘스스로를 뾰족하게 만들면서 전진하는 첨두 자기형성(尖頭 自己形成)이라는 성질’이 발휘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탄보다 관통력이 월등한데, 문제는 이때부터입니다. 파편들이죠. 쐐기 끝처럼 뾰족하게 변할 때 깎여나간 파편들이, 공기와 접촉하면서 발화가 됩니다. 어떤 발화약이 없어도 불이 붙죠. 그런데 탱크 안쪽은 ‘인화질물 지입 금지’ 구역이 아니라, ‘인화질물 만땅 지역’입니다. 주포탄 수십 발이 여기 저기 있고, 기관총 총탄도 수백, 수천발이 있으니까요. 또 방금 쏜 포의 약실에서 화약 연기가 흘러나오고, 자동 배출 장치가 없는 탱크라면, 커다란 탄피들이 매캐한 내뿜으며 굴러다닙니다.
가뜩이나 비좁은 소련의 T시리즈라면 그냥 쥐약이죠. 순식간에 불이 번지며 불바다 되기 십상이니까. 걸프전에서 특히 숫자적으로 가장 많았던 T-54, 55 계열은 탄피 자동배출 시스템이 없어, 맞으면 그냥 발화가 됐을 거라 생각합니다(T-62는 조금 발달해, 쏘고 나서 탄피 배출구에 포 후미를 연결시킬 때, 자동 배출됩니다. 이것도 불편하지만, 지금 한창 싸우는 중에, 눈과 코를 따갑게 하는 탄피가 굴러다니는 것보다는 낫죠). 그러나 탱크가 아니라 인화질물이 드문, 건물이나 다른 델 쏜다면, 발화가 안 될 수 있죠. 탄심 쪼가리들이 공기와 접촉하면서 일으키는 불은, 그리 크지 않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