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장 시 재입장 불가’
너무 흔해서 아무도 집중하지 않는 그 짧은 문구를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내가 중간에 퇴장하지 않고 끝까지 버틸 수 있을까? 재입장 못 하면 15만 원을 날리는 건데 그래도 시도해 볼 가치가 있을까? 엄마가 보고 싶어 한 뮤지컬 예약 페이지를 띄워 놓고 한참을 망설였다. 고민 끝에, 무대가 잘 보이는 무대 중앙 대신 화장실에 가기 좋은 복도 자리를 골라 예매했다. 관객이 되는 것조차 이렇게 어려운데, 배우가 되는 건 꿈도 못 꾸겠네. 뮤지컬 배우들은 공연 중에 갑자기 배가 아프면 어떡하지? 노래를 부르다 말고 뛰쳐나가나? 아, 아니구나. 원래 일반인들은 시도 때도 없이 배가 아프지 않구나.
얼마 전에 지인에게 연락이 왔다. 배탈이 나서 길에서 배가 아파 보니 네 마음을 알겠더라며. 길에서 갑자기 배가 아파서 당황스러웠으려나? 나야 뭐 그런 삶이 너무 익숙한데 안 그러던 사람이 배가 아프면 무슨 기분일까. 내가 처음 그런 고통을 느꼈을 때 기분이 어땠더라.
요즘은 불안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하다. 어느 날 배가 아프지 않으면 ‘왜 배 안 아프지? 나 왜 안 불안하지?’ 하며 이상해한다. 그러다 문득 ‘일반인들은 원래 이렇게 살아가는 거겠지?’ 하며 아리송한 기분이 든다. 그 낯선 기분을 마음껏 즐기지도 못한다. ‘아플 때가 됐는데?’ 하며 아프기만을 기다린다. 오히려 아프길 바라는 것 같기도 하다. 지사제를 먹고 속이 편안한 상태가 하루 이상 지속되면 평소엔 절대 안 마시는 아이스 카페라테, 오렌지 주스 등을 마시며 속을 다시 뒤집어 놓아서 불안하게 만들어야, 이제야 좀 나답다며 마음이 놓였다.
그러고 보면 내가 이 병을 붙들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병은 나를 떠나려고 하는데, 병과 함께하는 것에 이미 너무 익숙해져서, 병 없이 사는 게 상상이 안 되나 보다. 내가 기회를 놓치고 불편한 게 당연해졌다. 연애도, 이직도, 여행도 못 하는 게 너무 당연해서 불편하다는 생각도 못 했다. 그것들은 애초에 내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를 세뇌했다. 어째서인지 고칠 생각을 안 한다. 죽기 살기로 나아야 하는데, 그러질 않고 있었다.
“나도 건강해지고 싶지, 극복하려고 해 봤지만 안 돼~ 내가 제일 괴로우니까 잔소리하지 마.”라는 말로 모든 걸 합리화했다. 해결할 생각은 않고, 주저앉아 불평만 하는 사람을 제일 싫어하는데, 내가 어느 순간 그러고 있었다.
사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많고 많은 병 중에 왜 하필 똥쟁이일까. 토를 하는 거면 차라리 낫지 않았을까? 화장실이 없어도 길거리 하수구에 토하면 되니까. 변비면 괜찮았을까? 차라리 가스가 많이 차는 것도 나쁘지 않았겠다.
그러다가 최근에는 장이 안 좋다 못해 위까지 망가져서 먹자마자 토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밤새 변기를 붙들고 몇 번이고 토를 했다. 소화제를 먹으면 그마저도 토해냈다. 토하기 직전엔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고, 어쩔 줄 모르게 괴롭다. 그리고 깨달았다. 차라리 똥쟁이가 낫다고.
잠깐이면 끝날 줄 알았던 고통이 예기치 못하게 길어지면서 다양한 생각의 변화를 겪었다. 지독히도 고통스러웠지만, 그 안에서 다행이기도, 기쁘기도, 심지어 감사하기도 했다.
정말이지 그나마 다행이다. 수업 시간에 손들고 선생님께 화장실을 간다며 허락받아야 하는 학생이 아니라서. 택시 운전기사, 콜센터 직원처럼 원할 때 자리를 비울 수 없는 직업이 아닌, 평범한 사무직 직장인이라서. 심지어 일하는 건물에 화장실이 많다니!
수많은 불안함을 겪었고, 식은땀이 나는 일도 있었고, 빈 건물에서 누군가 나오길 바라며 문을 두드린 적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다행히 바지에 싼 적은 없다. 스트레스로 M자 탈모가 생겼지만 머리숱이 많아 다행이다. 아직 젊어서 배가 아프면 뛸 수 있어 다행, 수치스러운 모습을 보여도 잃을 게 덜한 젊은이라 다행, 지나고 보니 크론병이나 대장암이 아니었던 건 진짜 다행이다.
아픈 동안에도 소소한 일로 기뻤다. 자주 다니는 길에 새로운 화장실을 발견하면 신기했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면 기뻤다. 광역버스 타게 될 날을 기다리며 설렜다. 아프고 난 뒤 매운 것과 밀가루를 끊어서, 조금 괜찮다 싶은 어느 날 떡볶이를 딱 한 번 먹었는데, 그날의 내가 제법 자랑스러웠다. 오랜만에 월간회의에 참여했을 때, 내가 있는 곳 근처에 화장실이 있을 때, 그런 모든 순간이 기뻤다.
오히려 아파서 감사하기도 했다. 원래는 남의 눈치를 제법 봤다. 그런데 아픈 뒤로는 미팅 중에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고 말하는 것쯤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여기 화장실이 어디냐고 묻는 것쯤은 당당히 할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글쓰기를 시작했다. 글 쓰는 사람들을 존경하면서도 섣불리 시작하지 못했는데 좋은 경험이었다. 술, 탄산, 밀가루 등을 끊은 덕분에 피부가 좋아졌다. 밖에 못 나가는 대신에 집에서 대청소를 했더니 집이 깨끗해졌다. 사람들이 정신과에 다녀왔단 얘기할 땐 공감할 수 있었고, 몸이 아픈데 이기적이라고 오해받을까 봐 걱정된다는 친구의 말에 진심으로 공감해 줄 수 있었다.
아픈 지 1년쯤 되었을 때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어느덧 1년 하고도 9개월이 지나고 있다. 글을 쓰는 사이에도 많은 일이 있었다. 건강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아파지기도 했다. 마음 편하게 먹어야지, 불안해하지 말아야지, 하는데 잘 안된다. 아무 일 없을 걸 알지만 너무 불안하다. 여전히 단 하루도 마음이 편해 본 적이 없다. 어느 순간부터 하루하루가 긴장이고, 예민하고, 여유가 없어서 세상을 부정적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지만 이제 이 글을 마치면서 내 병도 함께 떠나보내야겠다. 하고 싶은 게 많다. 거창한 게 아니어도 그냥 평범하게만이라도 살고 싶다. 불안해하지 않으며. 함께해서 즐거웠고, 다시는 만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