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버이날즈음이었나? 엄마, 아빠, 오빠와 함께 정읍에 사시는 할머니를 뵈러 갔다. 아침 일찍 출발했는데 점심때가 다 되어서야 정읍에 도착했다. 요양병원에 계시는 할머니를 모시고 바로 식사 장소로 이동했다. 이가 많이 빠져서 부드러운 음식밖에 못 드시는 할머니를 위해 한정식이 한 상 가득 준비됐다. 식사를 마칠 때쯤, 할머니가 화장실에 가고 싶다고 하셨다. 혼자 거동을 못 하시는 할머니를 부축해서 화장실에 모셔다드렸다. 일반 성인이 열 걸음이면 갈 거리를, 할머니는 아주 느릿느릿 작은 보폭으로 한참을 열심히 이동하셨다. 남에게 피해 끼치는 것을 싫어하시는 할머니는, 평소에는 화장실이 가고 싶어도 간호사를 귀찮게 할까 봐 최대한 참으신다고 했다. 하루에도 몇 번씩 화장실로 뛰어가는 나로서는 차마 상상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화장실을 눈앞에 두고도 몸이 안 따라 줘서 바지에… 아, 그만 생각하자.
식사를 마친 뒤, 정읍에 사시는 외삼촌 차를 타고 할아버지 산소로 향했다. 서울에선 빌딩 숲에 화장실이 열매처럼 콕콕 박혀 있었는데, 정읍에선 그냥 숲만 덩그러니 있었다. “엄마, 나 그냥 근처 카페에 있으면 안 돼?”하는 조심스러운 나의 물음에 엄마는 “외삼촌이 이 동네에서만 60년 넘게 살아서, 급하면 아무 집이나 가도 다 아는 사이라 화장실 쓸 수 있어.”라며 자신만만하게 답했다.
실제로 워낙 외진 곳이기도 했고, 장사를 하시는 외삼촌은 그 지역에서 제법 발이 넓어서 충분히 신빙성 있는 위로였다. 그런데 아무리 아는 사이라 한들 대뜸 가서 화장실 좀 쓰겠다고 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보다 애초에 집이 많지도 않아서, 문 두드릴 집이 있을지조차 의문이었다. 그저 그럴 일이 없기만을 바라야 했다.
할아버지 산소는 어느 산에 있었는데, 시골에 있는 산답게 휑했다. 특이하게 바로 옆에는 블루베리 농장이 있었고, 산 밑에는 농기구를 모아놓는 컨테이너가 있었다. 엄마는 친척이 운영하는 농장이라며, 컨테이너에 화장실이 있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저 멀리 작게 보이는 컨테이너를 보며 상상했다. 구조물이 저렇게 작은데 화장실이 어디에 있다는 거지? 문에 자물쇠가 걸려 있으면 화분을 들춰서 열쇠를 찾아야 하나? 도어락이면 전화해서 비밀번호를 물어봐야 할 텐데, 그건 너무 수치스러울 거야. 차라리 아무도 모르게 풀숲에 들어가서 싸는 게 나을지도 몰라.
그러는 동안 때마침 농장 주인인 친척 어르신이 블루베리를 가꾸러 왔다. 오빠와 나를 보더니 잘됐다며 일손을 좀 도와 달라고 했다. 오빠는 물론 아빠에, 외삼촌까지 장갑을 끼더니 농기구를 주워들었다. 갑자기 어디에서 나왔는지 모를 사다리를 물탱크에 설치했다. 아빠는 사다리를 잡고, 외삼촌은 사다리를 오르고, 오빠는 바닥에 있는 짐을 외삼촌에게 건넸다. 친척 어르신의 감독하에 모두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이 집안에서 가장 젊은 피를 가진, 혈기 왕성해야 할 나는 멀찍이 떨어져 바라보기만 했다. 가만히 노는 게 눈치가 보였지만, 괜한 움직임으로 장을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수치스러운 상황이라도 발생했다가는 모두가 내 눈치를 보게 될 판이었다. 그저 화장실 없는 이 허허벌판을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날 저녁 아빠와 오빠는 집으로 돌아가고, 엄마와 나는 목포를 여행하기로 했다. 우리 가족은 정읍에 올 때마다 근처 도시를 여행하는데, 목포는 태어나서 처음 가 보는 거였다. 익숙한 이름만큼이나 발달한 도시일 거라는 기대와는 달리, 길 가다 갈 화장실이 없기는 정읍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항구의 도시답게, 목포여객터미널은 정말 잘 갖춰져 있었다. 터미널은 백화점처럼 크고 깨끗했고, 화장실도 스무 칸이나 있었다. 그런데 어찌 된 영문인지, 그 넓은 건물에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마치 오로지 나를 위해 준비된 것처럼! 그야말로 수많은 화장실이 다 내 차지였다. 화장실에 들어서면 백화점을 통으로 대관한 VIP가 된 기분이었고, 부러울 게 하나도 없었다. 화장실을 다른 사람이 쓰고 있으면 어쩌나, 다음 사람이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면 어쩌나 걱정할 필요도 없었다.
때문에 2박 3일간의 목포 여행은 여객터미널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유달산이니 케이블카니 하는 건 애초에 꿈도 못 꿨다. 길을 걷다가 배가 아프면 터미널로 가서 화장실을 쓰고, 바다를 보다가 배가 아프면 터미널로 가서 화장실을 썼다. 여행 내내 그 주변만 맴돌고 있으니, 터미널에 가기 위해 목포에 온 것 같았다. 어제 갔던 곳은 그제 갔던 곳이고, 오늘 가는 곳은 어제 갔던 곳이었다. 그래도 엄마와 함께 있으니, 별다른 것을 하지 않아도 그곳이 어디든 즐거웠다. 텅 빈 터미널에서 둘이 한참을 떠들기도 했다.
“그래도 바다에 왔으니 회는 먹어야지?”
“싫어, 날생선은 너무 자극적이야.”
“그럼 생선구이를 먹을까?”
“그건 좋아.”
“내일은 지리탕 어때?”
“그것도 좋아!”
엄마는 나를 위한 메뉴를 제안했다. 두 사람이 하는 여행이지만, 전적으로 한 사람에게 맞춰져 있었다. 팀원들과 출장 갈 때와 달리, 여행 내내 마음이 편안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나 때문에 여행이 여행 같지 않았을 엄마에게 미안했다. 그래도 함께하는 사람이 엄마여서 다행이었다. 그 휑한 시골에서도 엄마가 있어서 의지가 됐고, 터미널에 수도 없이 가면서도 엄마라서 덜 민망했다. 엄마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