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상담 후 3주 만에 다시 심리상담을 하러 갔다. 한창 컨디션이 최악이던 시기에 첫 방문을 한 뒤, 연휴다 뭐다 해서 텀이 길어졌더니, 그 사이에 컨디션이 많이 회복되어 있었다. 요즘 어떠냐고 묻는 선생님의 질문엔 너무 좋다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고민이 있냐는 질문엔 없다고 답했다. 상담에 괜히 왔나 싶고, 이제라도 남은 회차를 취소해야 하나 싶었다.
나의 상태를 들은 선생님은, 당장 고민인 게 없으면 문장 완성 검사를 해 보자고 했다.
내가 가장 행복할 때는 [ ]
내가 제일 걱정하는 것은 [ ]
과 같은 문장을 채우는 식이었다. 몇십 가지나 되는 문장들을 거침없이 채워 나갔다. 말없이 혼자 쓰기만 하는 건 왠지 돈이 아깝게 느껴져서, 빨리 제출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엄마는 [ ] 라는 문항에, 엄마는 [멋있다] 라고 답했는데, 그 이유가 뭐예요?”
“엄마는 힘든 일이 많았는데 그걸 다 이겨냈거든요. 한 번도 내색은 안 하지만요. 저는 바보 같게도 한참이 지나서야 그런 일이 있었다는 걸 알곤 해요. 엄마 가게에 깡패가 찾아왔을 때도, 엄마가 건강이 안 좋아서 산속에서 요양해야 했을 때도요. 어느 날은 엄마가 수술을 받고 병상에 누운 채로 저에게 미안하다고 했어요. 강인한 모습만 보이고 싶었는데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면서요. 호스로 소변과 피를 빼내면서 말이에요.”
엄마는 강인한 내면과는 다르게, 신체가 무척이나 약했다. 갑상선, 무릎, 기관지 등 고장 난 곳이 멀쩡한 곳보다 많았다. 아토피도 심했는데, ‘온몸이 아토피로 뒤덮여있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다. 엄마는 항상 헤진 속옷을 입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속옷을 갈아입어야 할 정도로 진물이 나와서, 예쁜 속옷은 필요 없다고 했다.
그래서 엄마는 어릴 적 내가 목욕탕에 가야 할 때면 항상 이모에게 나를 부탁했다. 전염병도 아닌데, 흉측하다며 목욕탕에서 쫓겨난 적도 있다고 했다. 이모가 때를 너무 세게 벗긴다는 핑계로, 엄마랑 가고 싶다고 떼를 써서 한 번쯤 엄마랑 간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때 엄마는 무슨 기분이었을까.
내가 성인이 된 뒤에도 엄마의 상태는 나아지질 않았다. 피부가 벗겨지고 물집이 가득해서 손가락엔 밴드를 붙이고, 한여름에도 장갑을 끼고 생활했다. 샤워할 때는 손에 물이 닿으면 안 돼서 비닐장갑을 끼고 손목을 고무줄로 조여 놓아야 했다.
그런 엄마가 내가 체했을 땐 그 손으로 나를 마사지해 주었다. 그러면서도 덕분에 손에 혈액순환이 돼서 좋다고 했다.
하루에도 서너 번씩 화장실을 들락거리던 어느 날, 화장실이 무료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에 갔을 때 식당 안에 있는 화장실을 써도 이용료를 내야 했던 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엄마는 신장이 안 좋아서 화장실을 자주 가야 했다. 유럽 여행을 갔을 당시만 해도 건강했던 나는 그런 엄마가 귀찮기도 했다. 버스가 출발해야 하는데 화장실을 갔다 온다는 엄마에게 ‘그러게 물을 좀 적게 마시지!’라고 말하기도 했다. 영어를 한마디도 못 하는 엄마에게 화장실을 혼자 갔다 오라며 갑질을 한 적도 있다.
생각할수록 고마운 일만, 미안한 일만 떠올랐다. 엄마가 나 때문에 희생했던 일, 내가 엄마를 고생시켰던 일, 알면서도 엄마 마음에 대못을 박았던 일… 어느새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아무 조건 없이 주는 그 사랑은 너무 큰데, 나는 해 주는 거 없이 받기만 했구나.
“그래서 OO님이 그 힘든 시간을 다 견뎌낼 수 있었나 봐요. 엄마의 지지 덕분에요. 멋진 엄마를 둬서 좋겠어요. 엄마도 OO님 같은 딸을 둬서 좋을 테고요.”
“그럴까요? 저는 쑥스러워서 사랑한다는 그 흔한 표현조차도 못 하는걸요.”
상담이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상담했는데 선생님이 엄마 멋지대. 내가 엄마를 멋지다고 했더니 그 말을 엄마가 들으면 좋아할 거라더라. 근데 내가 말을 안 해서 모를 것 같길래 전화했어.”
“말로 안 해도 다 알아. 엄마가 딸을 30년을 키웠는데 모르겠니.”
아무리 안다지마는 그래도 말로 해 주고 싶었는데, 결국 말 못 했다. 그래서 치사하지만, 이 글에 몰래 그 마음을 담아 본다. 언제나 나의 편이 되어 주어서, 고통 속에서 좌절하지 않도록 해 줘서, 항상 그 자리에 있어 주어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