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드 카빙 : 손으로 무언가를 만지작거리고 있으면 잡생각이 사라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림이나 십자수 같은 덴 영 소질이 없기도 했고, 마침, 아빠랑 해 보면 좋을 것 같아서 우드 카빙을 골랐다. 생각보다 힘이 많이 들어갔고, 가루가 엄청나게 날렸다. 하다 말았는데, 다시 할 엄두가 안 난다.
멘사 문제 풀이 : 위와 비슷하게, 어느 하나에 몰두하고 싶었다. 마침, 엄마가 수학 문제 푸는 걸 좋아해서 같이 풀어 보려고 샀다. 이성적 사고를 통해 풍부한 상상력, 특히 최악을 상상하는 게 줄어들길 기대했다. 그러나 도파민의 노예인 나는 금방 질려 버렸다.
드라마 : 유튜브는 너무 짧고 자주 끊어지니 다른 생각이 들어올 틈이 많았다. 특히 쇼츠는 금물. 재미없는 영상이 떠서 자칫 몰입이 깨지면 위험하다. 영상 찾아 헤매는 시간을 줄이기 위해, 유튜브든 넷플릭스든 집중 안 끊기고 볼 영상을 미리 찾아둬야 한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드라마를 고르는 게 제일 어려웠다. 가장 큰 문제는, 다음 에피소드를 시작하기 애매하게 시간이 남으면, 그 시간을 견디기 힘들었다. (심리 문제를 다루는 ‘언스테이블’이라는 코미디 드라마를 봤는데 재미있었다.)
모바일 게임 : 이동 중에 잡생각 없이 집중하기 좋을 것 같았다. 나는 게임을 안 좋아해서 금방 지루해졌지만,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에겐 효과적일 수 있겠다.
교회 :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기도하면 들어줄 것 같기도 했고. 하지만 신앙심이 깊지도 않고, 일요일 낮에 시간을 빼는 게 어려워서 잘 안 갔다.
아로마 마사지 : 방에 불을 끄고, 주황빛 탁상 조명만 켜고, 잔잔한 노래를 틀고, 아로마 오일 향을 맡으며 마사지를 했다. 평화롭고 좋았다.
명상 : 다들 칭찬 일색이던데, 나는 잡생각이 너무 많이 들고 졸리기만 했다.
일기쓰기 : 하루를 정리하면서 내 감정도 정리되는 기분이었다. 특히, 한참이고 다꾸하는 게 효과가 있었다.
글쓰기 : 내가 아팠던 과정을 글로 쓰면서 거쳐온 사건과 생각을 정리하는 게 정말 좋았다. 지금 이 시간을 괴롭고 말 순간이 아니라, 하나의 추억으로 만들어 주었다.
운동 : 사실 운동이 제일 중요하다. 밥을 잘 못 먹으니 특히 더 중요하다. 근데 나에게는 너무 힘들었다. 실외에서 햇빛을 좀 보고 싶지만 러닝, 특히 등산은 화장실이 없으므로 절대 불가. 요즘 많이 한다는 테니스는 화장실 가면 상대가 기다려야 해서 불가. 헬스나 필라테스처럼 1:1 PT도 화장실 다녀오면 머쓱해서 불가. 아이스 하키 같은 이색 스포츠에 도전해 볼까 했지만 그건 신발 벗고 화장실 뛰어가기 힘들어서 불가. 요즘은 여자 축구도 많이 한다던데 그건 내 마음대로 경기 중에 뛰쳐나올 수 없어서 불가. 그럼, 결국 남는 건 혼자 헬스장에서 운동하거나 홈트하는 건데, 그건 너무 재미없었다.
식단 관리 : 뻔하지만 골고루 먹어야 건강해진다, 의사 선생님은 단순 과민성이니 아무거나 먹으라고 하셨지만 쉽지 않다. 기분 탓이니 뭐니 해도 자극적인 걸 먹으면 배가 바로 아픈 걸 어쩌란 말인가.
영양제 복용 : 스트레스 감소에 도움이 된다는 영양제를 사서 먹었다. 뭐가 효과가 있을지 몰라서 두 가지 종류를 샀다. 나는 ‘홀인원 릴렉스’와 ‘스트레스 앤 테아닌’을 구매했다. 둘 다 2개월에 2만 원대로 가격도, 용량도 비슷했다. 보통은 L-테아닌, 로사빈(홍경천추출물), 마그네슘으로 구성되는데, 세 가지 다 들어가면 4만 원 후반대, 그중 두 개만 들어가면 2만 원대인 듯하다. 효과는, 글쎄…
단계적으로 테스트하기 : 병원에서는 화장실 참는 시간을 점차 늘려 보고, 단계적으로 서서히 멀리 이동해 보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도무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혹시라도 테스트한답시고 나댔다가 괜한 트라우마만 생길 것 같았다.
안정액 복용 : 치과 진료가 예약되어 있던 날, 입을 벌리고 누워 있는 동안에는 화장실을 못 갈 거라는 생각에 심장이 너무 빨리 뛰었다. 불안한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약국 가서 청심환을 달라고 했다가 안정액의 존재를 알게 됐다. 평소 엄살이 심한 편인데도 치과 치료를 받다가 졸음이 왔다. 안정액 효과인 건지, 안정액을 찾을 정도로 이미 너무 불안해한 탓에 지쳐버린 건지는 모르겠다. 안정액은 길쭉한 비닐에 담겨 있는데, 모양이나 맛이 홍삼이랑 비슷하다. 가격은 개당 2,000원, 10개들이 한 박스에 18,000원.
정보 공유 : 크론병, 과민대장증후군, 불안장애 등 나에게 해당하는 것 같은 질병들의 네이버 카페에 가입하거나 단톡방에 입장했다. 정보를 얻고, 질문하고,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통해 위로받는 게 좋았다.
불안 키트 만들기 : 밖에서 급하게 불안을 잠재울 수 있도록, 나만의 불안 키트를 제작해서 가지고 다녔다. 금방 열이 올라서 배에 올려놓기 좋은 충전식 핫팩, 언제 어디서든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휴지, 급하게 장거리 이동할 때를 대비한 지사제, 정신이 혼미할 때를 위한 상큼하고 달콤한 젤리,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도록 빗과 심신 안정용 아로마 오일도 챙긴다. 끝으로, 혹시라도 길에서 싸면 바지를 가릴 수 있도록 이것들을 큼지막한 크기의 에코백에 담아 다녔다. 마음 같아선 여분의 속옷과 바지도 챙겨서 배낭을 메고 다니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