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늘이 길어질 때

머리를 밀던 오후

by 따뜻한시선

“안 되겠는데?”

깡 할아버지가 정호의 머리칼을 들추며 고개를 저었다.


“심해요?”

아버지가 목을 낮춰 정호 머리칼 속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귓불까지 빨개진 정호는 시멘트 바닥을 불안한 눈으로 훑고 있었다.

공동수도 바로 아래 시멘트 바닥은

오랜 시간 물방울을 견디며 도자기처럼 매끈해졌다.

가운데는 쇳물에 진하게 붉어졌고,

가장자리는 석회가 연회색으로 부드럽게 펴져 있었다.

그 위로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맑게 공터에 퍼졌다.


공터 한가운데, 몸에 두른 해진 쥐색 보자기 위로 정호의 머리만 둥 떠있었다.

동네 아이들은 공터로 이어진 양쪽 길모퉁이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담벼락에 몸을 숨긴 채 고개만 빼꼼히 내밀었다.


“이눔시키들, 저리 안가!”

가끔 아이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고,

그러면 깡 할아버지는 발을 구르며 소리쳤다.

아이들은 즐거운 소리를 지르며 달아났다가,

고무줄처럼 다시 돌아와 담 모서리에 나란히 고개들을 걸쳤다.






정호는 밥상을 펴고 위에 두툼한 달력 뒷장을 깔았다.

다가오는 1986년의 모든 달들이 인쇄된 맨 뒷장의 반대면은 백지였다.

하얀 달력종이 위에 검붉게 피가 마른 점들이 흩어져 있었다.

그는 달력 위로 머리를 숙이며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갸웃한 채 참빗을 오른편 귀 위쪽 머릿속으로 깊게 넣었다.

그는 참빗을 눌러 두피를 긁듯 머리칼을 빗었다.

귀 뒤를 지나 뒷목으로 빼낸 참빗을 빠르게 달력 쪽으로 내려 털었다.


톡- 톡-

조그만 모래알 몇 개가 두꺼운 종이에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배가 통통한 조그만 머릿니가 뒤집어져 발을 허우적대었다.

정호는 검지로 머릿니를 눌렀다.


틱-

조그만 압력이 터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손가락을 떼니 통통한 배를 채웠던 맑은 피가,

자그맣게 사방으로 퍼지며 달력을 빨갛게 물들였다.

정호는 검지에 묻은 피를 달력 끝에 문질렀다.


똑-

서캐를 손톱등으로 꾹 눌러 터트렸다.

오선지 위 바장조의 플랫(b)을 닮은 하얀 서캐는

묽은 액체를 뿜으며 납작해졌다.


정호는 하얀 달력 위의 참빗을 바라보았다.

할머니의 손때가 묻어 대나무 몸통은 맨들거렸다.

몸통 양옆으로 생선가시 같은 빗살이 붙어있었다.

빗살이 좀 더 촘촘한 쪽의 이가 몇 개 빠져 있었다.

참빗을 쥐고 검지와 엄지로 이간 빠진 곳을 가만히 훑어 내렸다.


“할머니….”

그는 조용히 읊조렸다.






할머니는 조용히 눈을 떴다.

손주의 손을 가슴에서 조심히 떼어내고 일어났다.

천장 가운데 길게 늘어진 실 끝의 플라스틱 손잡이를 댕겼다.

한쪽 끝이 검게 그을린 형광등이 꺼질 듯 서너 번 껌뻑이다,

양쪽 끝부터 천천히 밝아지며 방 안에 서린 새벽빛을 하얗게 밀어냈다.


정호는 눈을 찡그리다 살짝 떴다.

누운 채 애벌레처럼 몸을 꿈틀거려 할머니에게 기어가,

솜이불에 배인 따뜻한 온돌냄새를 지나 할머니 품으로 파고들었다.

머리를 다듬던 할머니는 손자의 머리를 가만히 얹었다.


할머니는 참빗으로 얇은 머리를 한 올 한 올 빗어 뒤로 넘겼다.

그리고 곱게 모은 잿빛 머리칼을 말아 잡아 나무비녀를 꽂았다.

오랜 시간 머리칼에 닳은 나무비녀 끝에 형광등이 작게 맺혀 반짝였다.


할머니는 무릎에서 새근새근 잠이 든 정호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손자의 머리칼을 손으로 가만히 쓸다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거칠하지만 따뜻하고 단단한 할머니의 손끝이 느껴지자

정호는 잠결에 할머니 품으로 조금 더 파고들었다.


그녀는 손수건 끝으로 빗살을 하나씩 닦아 내고

손자의 머리칼을 앞에서 귀 뒤로 부드럽게 빗겼다.


“그래도 에미를 닮아 머리칼이 참 고와… 아이구 내 새끼.”


할머니는 자신의 베개를 끌어와 손자의 머리를 들어 조심스레 옮겼다.

정호는 베개 밑으로 두 손을 집어넣으며 머리를 옆으로 뉘었다.

베개에 배인 할머니의 구수한 내음이 볼을 따라 펴졌다.

할머니가 부산하게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가

미닫이 창호문 건너 부엌에서 아련하게 들려왔다.






“아이그, 머크락이 이리 고운디…”

깡 할아버지가 바리깡으로 정호의 머리를 밀며 말했다.

머릿니와 서캐로 뭉친 머리칼이 보자기를 따라 미끄러지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열 살인디. 느그 할매가 없응께 니가 바랜다.”

갑자기 정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정호는 입을 꾹 다물고 바닥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턱을 타고 내려 잿빛 보자기를 진하게 물들였다.


“울지 말어, 날도 더운데 시원하고 좋구먼.

아따 누구 새끼인지 대가리도 잘 생겼네.”

깡 할아버지는 정호의 맨머리를 보다

정호 아버지에게 시선을 옮기며 웃으며 말했다.


“방학 끝나고 시간이 지나믄 이쁘게 다시 자랄 것이여.”

정호 귓가의 머리칼을 떼어내는 깡 할아버지의 손끝은

거칠고 단단하지만 따뜻했다.


“서러워하지 말어… 다 지나갈 것이다.”

깡 할아버지가 혼잣말처럼 조용히 말했다.


여름 해가 장군산에 걸치며 공터에 그늘이 길어졌다.

동네 아이들은 어느새 하나둘 집으로 돌아갔다.

정호의 반짝이는 맨머리에 산등성이의 고운 빛이 맺혔다.

매미소리가 차츰 스러지기 시작했다.




깡할아버지.png




[고단한 날들의 온기 – 산 37번지] 연재를 다시 이어갑니다.



지나온 시간 속, 마음 깊은 이야기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가족 #기억 #바리깡 #참빗 #머릿니 #서캐 #따뜻한시선

이전 01화애양병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