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준전과와 동아전과

생선 뼈 같은 소년의 등에 닿은 손길

by 따뜻한시선


한여름 정오의 햇빛이 서정시장 뒷길로 쏟아졌다.

반듯하게 떨어지는 빛은 그림자 하나 없이 골목을 채웠다.

정호는 빡빡머리에 손을 얹어 떨어지는 따가운 볕을 가리며 걸었다.

길 한편에 겹겹이 나무 생선상자가 벽을 따라 길게 쌓여 있었다.

텁텁한 비린내가 후욱 풍겼다.

정호는 짧게 숨을 들이마시고 호흡을 참았다.

쌓인 생선상자를 지나 다듬고 남아 버린 채소 더미 부근에 이르자,

그는 작게 숨을 내쉬고 조심스레 코로 숨을 들이쉬었다.

여름볕에 축 늘어지며 내뱉는 바랜 초록냄새가 골목을 희미하게 채우고 있었다.

시장으로 들어서기 전, 정호는 골목 귀퉁이 끝에서 잠시 멈췄다.

몸을 숨긴 채 목을 살짝 뽑아 주변을 살핀 후,

고개를 숙이고 건너편 뒷길 입구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정호야!”

흩어지는 눅눅한 시장 소음 사이로, 익숙한 목소리가 정호를 향해 곧게 뻗어왔다.

교실 안에서만 듣던 그 단정한 소리에 정호는 머리를 가렸던 손을 내리고 어깨를 움츠렸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정호는 선생님께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고개를 숙인 채 빡빡 깎은 머리 뒤통수를 어색하게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까맣게 해진 자신의 운동화 끝을 보자 얼굴이 붉어졌다.


“정호, 방학 잘 보내고 있어?”

선생님은 손을 뻗어 정호의 팔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리고 그를 길 한복판에서 자신의 곁으로 한걸음 끌어왔다.


“정호, 두상이 이렇게 이뻤어?”

그녀는 허리를 굽혀 정호와 눈을 맞추며 그의 민머리를 쓰다듬었다.

정호는 몸보다 큰 반팔 상의를 늘어뜨리고 있었다.

왼쪽 겨드랑이 터진 재봉선 안으로 정호의 속살이 보였다.


“음… 정호야.”

선생님은 정호의 앙상한 어깨에 손을 얹었다.

말없이, 살짝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쥐었다.






5월의 햇살이 복도를 따스하게 비추고 있었다.

청소를 하는 아이들이 일으킨 먼지가 부드럽게 떠다녔다.

정호는 4학년 4반 교실 뒷문에 다다르자 걸레질을 멈췄다.

몸을 돌려 반대 방향을 바라보며 걸레를 뒤집었다.

걸레를 두 손바닥으로 누르며 포복자세를 다시 취했다.

나무복도의 마지막 두 칸을 닦기 전에,

고개를 살짝 들어 결승선인 교실 앞문을 바라보았다.

살짝 다문 입엔 미소가 고여 있었고 눈은 반짝였다.


부웅-

정호는 들릴 듯 말 듯 소리를 내며 힘차게 복도를 미끄러졌다.




“정호야, 오늘 너희 집 잠깐 갈까?”

선생님은 종례를 위해 앞문으로 들어서다,

복도청소를 마침 끝낸 정호를 보며 말했다.


“선생님, 집에 아무도 없어요…”

선생님은 5월부터 가정방문을 하고 있었다.

정호는 아버지와 단둘이 살고 있었다.


“응 알아. 그냥 선생님이 정호 집에 놀러 가는 거야. 네가 집에서는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서.”

4학년 이전의 선생님들은 정호네 집에 방문하지 않았다.

그들에겐 가정환경조사 몇 줄과 정호의 행색으로 가정방문은 충분했다.






“후우… 되게 높네.”

선생님은 숨이 턱까지 차오르기 직전이었다.


“와아. 풍경 좋다.”

그녀는 정호네 집 앞에서 멀리 여수 돌산대교를 바라보며 말했다.


조그만 집은 산을 등지고 있었다.

길과 맞대고 있는 나무판자문을 여니 바로 부엌이었다.

부엌은 칠판과 교탁 사이보다 좁았고 어른 키보다 약간 길었다.

오른쪽으로 방으로 통하는 미닫이문이 있었다.

손잡이 부근의 여러 번 덧댄 창호는 손때로 거뭇했다.

미닫이 문이 달린 방과 맞대고 있는 부엌벽에는

길게 그을음이 천장까지 이어져 있었다.

그 아래에 연탄아궁이가 낮게 입을 벌리고 있었다.

아궁이 옆으로 석유곤로가 놓여 있었고

그 곁에 비닐이 뜯긴 미원봉지와 설탕봉지가

몽고간장 병과 콩기름을 담은 소주병에 기대듯 뒤섞여 있었다.

바닥의 설거지 대야에 밥그릇 두 개와 수저 두 개가 담겨 있었다.

까만 물곰팡이가 핀 나무빨래판이 벽에 세워져 있고

그 아래 반쯤 말라서 갈라진 빨랫비누가 놓여 있었다.




“선생님 들어오세요.”

정호는 천장에 매달린 전구의 스위치를 돌려 불을 켰다.

선생님은 신발을 벗으며 문턱에서 방을 바라보았다.

눅진한 연탄온돌 냄새에 젖은 시멘트 벽 비린내가 희미하게 섞여있었다.

방은 어른 두 명이 누울 수 있는 정도였다.

왼편으로 방 안쪽에 이불이 반듯하게 개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불에 그을려 손잡이가 뭉개진

빛이 바랜 양은 주전자가 놓여 있었다.


미닫이 문과 마주한 방 안쪽 왼편 모서리엔 천옷장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하늘색 바탕에 하얀 꽃문양이 그려진 옷장은 아랫배가 불룩 나온 채 비뚤게 서있었다.

천옷장 옆으로 세 자 남짓한 책장이 반듯이 세워져 있었고

꽤 높은 책장 맨 위에는 한국위인전집 12권이 꽂혀 있었다.

그 아래로 소설책들이 가득 꽂혀 있었고

아래 부분엔 어린이소설과 철 지난 잡다한 잡지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앞에 앉은뱅이 책상이 원래 책장과 한 몸인 양 붙어 있었다.

작은 창으로 오후 끝자락의 햇살이 비스듬히 가르며 들어와서 책장을 길게 비추었다.

책상 위 조그만 빨간 라디오의 안테나가 비껴 들어오는 조각 햇살에 반짝였다.




“정호가 여기 앉아서 숙제하는구나.”

방에는 더 이상 별다른 것 없었다.

둘이 마주 앉으니 방이 꽉 찼다.

선생님은 책상을 한 번 바라보고 다시 방을 둘러봤다.


“아버지는 몇 시쯤 오니?”


“여덟 시… 아홉 시쯤요.”


“그럼… 혼자 저녁 먹어?”

선생님은 정호를 빤히 바라보았다.


“네….”

정호는 대답을 하며 방바닥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은 방바닥을 손바닥으로 쓸며 다시 말없이 방을 둘러보았다.


“가정통신문이야. 아버지께 드리고 도장받아서 가져와. 알았지?”

선생님은 핸드백에서 접힌 종이를 꺼내 책상에 올려두며 일어섰다.


“선생님 갈게.”

선생님과 정호는 출입문 앞에 마주 보고 섰다.


“자, 맛있는 거 사 먹어.”

선생님은 오백 원 동전을 정호에게 내밀었다.

정호는 뒤통수를 어색하게 만지작거렸다.


“받아. 괜찮아.”

선생님은 정호의 손을 잡고 동전을 쥐어 주었다.


“정호야.”

선생님은 잡은 손을 떼며 걸음을 옮기려다 멈칫거렸다.


“음… 공부 열심히 해야 해. 알았지?”

선생님은 정호의 손을 다시 쥐고 살짝 흔들며 웃어 보였다.

정호는 공부를 어떻게 열심히 해야 하는지 몰랐다.

학교에 빠지지 않고 가고, 꾸중을 피하기 위해 숙제를 꼬박하는 정도였다.


“공부를 어떻게 해야 하지?”

정호는 혼잣말을 하며 선생님이 아랫길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았다.




가정통신문은 얇은 갱지에 학교 일정에 대한 안내가 있었다.

그 아래 빈칸에 선생님의 손글씨가 남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정호의 담임 안선희입니다.

정호는 학교에서 조용하고 온순한 아이입니다.

수업에 집중도가 높으며 숙제도 성실히 제출합니다.

정호는 두뇌가 명석하여 교육에 조금만 관심을 가져주면

아주 우수한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라 여겨집니다.’


정호는 통신문을 다시 접어 책상 서랍에 넣었다.






선생님은 정호의 어깨를 토닥이다 그의 등을 쓸었다.

생선 몸통뼈같이 울퉁불퉁한 정호의 척추뼈가 만져졌다.


“정호 점심 먹었니?”

선생님은 정호를 시장 안의 중국집으로 데려갔다.


“뭐 먹고 싶니?”

정호는 벽에 붙은 메뉴판을 빠르게 훑었다.


“짜장면요.”

정호는 터진 왼쪽 팔의 구멍을 가리려고 상의를 앞으로 자꾸 당겼다.




선생님은 하나 남은 만두를 집어 정호에게 건넸다.

“이것도 먹어. 아빠가 공부 열심히 하라는 이야기, 혹시 안 해?”


“별말씀 안 하세요.”

정호는 어색하게 만두를 씹던 입을 멈추었다.


“정호 성적에 아무도 관심이 없어?”

선생님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네?....”

정호의 눈가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정호야, 너에게 뭐라고 하는 게 아니야.”

선생님이 젓가락을 빠르게 놓고 정호에게 휴지를 건넸다.


“정호야. 너는 똑똑한 아이야. 공부를 조금만 더하면 성적이 아주 좋아질 거야.”

그녀는 정호 옆으로 자리를 옮겨 한쪽 팔로 정호를 감싸 안았다.


“음… 정호야. 아무도 관심이 없어도,

네가 열심히 공부해서 성적이 오르면 선생님은 기뻐해 줄게”

선생님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녀는 정호의 어깨를 굳게 쥐었다.






“여기 있다! 두 개나 있어!”

행기가 정호를 보고 웃으며 말했다.


정호는 전과를 찾아보려고 행기네 집에 들렀다.

선생님과 시장에서 헤어지고 오는 길에

갑자기 행기네 창고에 쌓여 있던 문제집들이 생각났다.

밭으로 이어진 행기네 집 뒷마당에는 창고가 있었다.

청소부인 행기네 아버지는 길거리 청소를 하며,

돈이 될 만한 고물들을 가져와 창고에 보관했다.

자전거 휠, 구겨진 놋쇠 대야, 철근 토막 등의 금속과

신문, 잡지, 소설, 문제집 같은 책들과 박스 등의 폐지였다.


정호는 가끔 행기 아버지가 주워 모은 폐전선을 태울 때

뒷마당의 창고에 행기와 함께 가곤 했다.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피복이 모두 타고나면

노란 불길 사이로 신비한 초록빛이 어울거렸다.

정호는 그것을 가만히 쳐다보곤 했다.

그리고 가끔 읽을 만한 책이 있으면 가져와 읽었다.






1983년 4학년 2학기 표준전과와 동아전과.

비록 3년이 지난 것이지만 현재 교과서의 내용과 거의 일치했다.

두 전과 모두 두꺼운 표지는 앞뒤 모두 뜯겨 나갔고

해진 모서리 끝은 둥글게 말려올라 부풀어 있었다.

전과를 펼치니 오래된 종이 냄새가 부드럽게 퍼졌다.

테두리는 누렇게 변해있었다.


정호는 첫 장부터 천천히 보기 시작했다.

학습목표를 검지로 쓸며 주의 깊게 읽었다.

학습내용은 책을 읽듯 이해하며 읽었다.

요약된 학습정리는 공책에 옮겨 적으며 외우려고 했다.

연습문제를 풀어보고 정답을 맞혀보니

학습목표와 관련된 사항들이 변형되어

문제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창문으로 비켜 들어오던 조각빛이 사라지고

천장에 매달린 노란 전구빛에 방그림자가 어느새 진해졌다.

정호는 기지개를 한번 켜고 아직 어색한 자신의 빡빡머리를 매만졌다.

이제 짧게 자란 머리칼이 까슬하게 느껴졌다.

자신의 민머리를 쓰다듬어주던 선생님의 손길이 느껴졌다.


부웅-

그는 이마부터 머리뒤까지 까슬한 머리를 힘주어 쓰다듬었다.

그리고 전과의 다음 장을 펼쳐 두 손으로 힘 있게 눌렀다.

살짝 다문 입엔 미소가 고여 있었고 눈은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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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날들의 온기 – 산 37번지] 연재를 다시 이어갑니다.



지나온 시간 속, 마음 깊은 이야기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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