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없는 빵식이는 없다.

땅콩샌드 한 조각에 담긴 열여섯의 기록

by 따뜻한시선


까앙-

마이!


알루미늄 배트의 쇳소리가

가을 아침 하늘을 경쾌하게 가르자,

야구공이 바닥을 빠르게 굴렀다.

야구부원들이 힘찬 구령을 외치며

차례로 뛰어나갔다.


달려 나간 선수는 흙먼지를 일으키며 멈춰 서서

자세를 낮춰 공을 잡아 홈으로 힘껏 던졌다.


“성길이! 아침 못 먹었나?”

한 선수가 공을 놓치자 감독이 웃으며 말했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이른 아침 운동장에 선선하게 퍼졌다.



정호는 교문에 들어서 잠시 야구부의 연습을 바라보았다.

선수가 놓친 공이 조그맣게 흙먼지를 피우며 정호 앞에 천천히 멈추었다.


“형!”

정호는 놓친 공을 가지러 오는 성길이에게 공을 주워 던졌다.

성길이는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온 공을 가볍게 잡으며 정호에게 웃음을 보냈다.

‘여수중학교’라고 새겨진 유니폼의 가슴이 땀에 젖어 있었다.


정호는 돌아서가는 성길이의 등번호를 바라보다 멀리 홈으로 시선을 옮겼다.

학교담장 너머 커다란 은행나무들이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그는 운동장 가장자리를 따라 매점으로 향했다.






“정호, 왔냐?”

소사아저씨가 교무실 앞에 있던 정호에게 인사를 건넸다.


“많이 춥지? 새벽에 안 힘들었어?”

정호가 건넨 신문을 옆구리에 끼고 아저씨는 열쇠꾸러미를 뒤적였다.


교무실 문을 열자 옅은 온기가 흘러나왔다.

정호는 아저씨를 따라 교무실로 들어가 창가에 섰다.

창밖으로 빈 운동장을 잠시 바라보았다.

멀리 오동도 방파제 너머 하늘이 희미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방파제 끝, 등대 불빛이 하늘에 묻혀갔다.


아저씨가 난로에 불을 붙이자 석유냄새가 번졌다.

정호는 신문 한 부를 담임선생님 책상에 두었다.


교무실 입구의 나무판에는 교실열쇠들이 나란히 걸려있었다.

정호는 ‘1-5’라고 적힌 플라스틱 딱지에 매달린 열쇠를 꺼내었다.


아저씨에게 목례를 하고 정호는 교실로 향했다.

짤랑거리는 열쇠소리와 삐걱대는 마루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울렸다.






“정호. 여기 앉아.”

정호는 종례 후 담임선생님의 호출에 교무실로 갔다.


“1학년 성적이 나왔네. 정호는 반에서 7등, 전체 530명 중 66등 했어. 잘했어!”

선생님은 활짝 웃으며 정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내일 방학식 때 성적표 다 줄 거긴 한데, 그냥 알고 있어. 음…”

선생님은 정호의 어깨를 살짝 쥔 채 입을 일자로 꼭 물었다.


“정호야. 2학년부터 학교 매점에서 일해보지 않을래?”

정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선생님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그 뭐야. 매점에서 일하면 수업료도 면제받고, 빵도 하나씩 먹을 수 있고….”

선생님은 조심스럽게 정호를 바라보았다.

정호는 입술을 안으로 말아 물고 무릎에 올린 손을 만지작거렸다.


“정호가 빵식이 하는 거야? 선생님이 정호를 많이 챙기네.”

옆 자리의 김 선생님이 밝은 목소리와 함께 정호 머리를 쓰다듬었다.


“김 선생! 빵식이라니! 빵식이가 뭐야!”

담임선생님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졌다.


“아이고, 형님. 그런 게 아니라… 아이참, 정호야 ‘네, 하겠습니다.’ 해”

김 선생님이 가볍게 어깨동무를 하며 정호를 감쌌다.


“네, 선생님. 하고 싶습니다.”

정호는 무릎 위의 두 손을 꽉 쥐었다.


“그래? 2학년부터 정호가 매점 맡아서 하는 거다. 내가 서무실에 이야기할게.”

담임 선생님이 활짝 웃었다.


“자 그리고 이거. 2학년 참고서야. 내년엔 이거 가지고 공부해.”

‘교사용’이라는 문구가 인쇄된 책들을 선생님이 내밀었다.


“2학년 되면 담임이 바뀌겠지만, 신문 계속 가져다줘야 해? 알았지?

나도 문제집 챙겨줄 테니까. 이거 정당한 거래야.”

선생님이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장난스럽게 톤을 낮추며 말했다.


교무실 문을 닫기 전 정호는 다시 선생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애 듣는데 빵식이가 뭐야? 빵식이가?”

문이 닫히자 최 선생은 김 선생에게 핀잔을 주었다.


“아이고 내가 잘못했네. 정호가 많이 어려운가?”

김 선생이 고개를 들어 정호가 나간 문을 살피며 말했다.


“부모 없이 형이랑 둘이 사는데, 형이 몸이 불편해.

차라리 고아원에 있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는데… 형이 성인이라…”






담너머 팔을 뻗은 은행나무에서 떨어진 잎들이

매점 앞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다.


바람이 살며시 불자 은행잎이 아침햇살에 반짝이며

팽그르르 돌아 떨어졌다.

매점 앞에 쌓여 있는 빵상자로 떨어진 은행잎은

빵봉지에 부딪히며 바스락 소리를 내었다.


빛바랜 노란색 플라스틱 빵상자 마흔 개가량이

세 줄로 높게 맞물려 매점 입구에 가득 쌓여있었다.


정호는 셔터의 자물쇠를 열고 힘껏 위로 밀어 올렸다.

묵직한 철제셔터는 중간쯤부터 스스로 말려 올라갔다.

쇳조각들이 맞물리는 경쾌한 소리가 조용한 학교를 깨웠다.


정호는 맨 위 상자에 놓인 영수증을 집어 펼쳤다.

영수증에는 품목과 수량, 그리고 정산해야 할 납품가격이 적혀 있었다.

크림빵 180개, 보름달 150개, 땅콩샌드 120개, 소보루 90개, 단팥빵 60개.

2교시 쉬는 시간과 점심시간에 판매하는 빵이었다.


정호는 상자를 매점 안으로 빠르게 옮겼다.

매점은 전당포처럼 매대를 가운데로 두고 두 공간으로 나뉘어 있었다.

어른 허리쯤까지는 시멘트벽이었고, 그 위로는 견고한 쇠프레임에 유리가 끼워져 있었다.

빵과 돈을 주고받을 수 있는 구멍이 네 군데 뚫려 있었다.

안쪽 매대로 들어가려면 아래쪽의 작은 문을 통해야 했다.


정호는 빵의 개수를 모두 확인하였다.

가장 잘 팔리는 크림빵 한 상자를 매대 가운데에 올렸다.

그 왼쪽으로 보름달과 단팥빵을,

오른쪽으로 땅콩샌드와 소보루를 한 상자씩 두었다.

나머지 빵상자들은 뒤편에 같은 순서로 분류해 쌓아 두었다.


아침해가 비스듬하게 매점 안으로 들이치기 시작했다.

정호는 셔터를 내리고 매점 앞에 걸터앉아,

잠시 노란 은행나무 사이로 푸른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는 땅콩샌드 빵비닐봉지를 익숙하게 뜯었다.

한 조각을 꺼내어 괜스레 사이를 벌려 땅콩잼을 확인하였다.

고소하고 달콤한 향이 허기를 더 보채었다.

식빵에 발라진 땅콩잼의 모양새는 양에 따라 매일 달랐고,

갈색잼이 두텁고 넓게 발라진 날은 왠지 하루 종일 행복한 기분이었다.


그는 빵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식빵은 이가 닿기도 전에 부드럽게 끊겼다.

서두르지 않고 입안에서 식빵을 침으로 적셔 녹여

그 위로 배어 나오는 잼의 고소하고 달콤한 맛을 천천히 맛보았다.


점심으로 먹을 남은 한 조각은 반으로 접어 봉지에 넣고

봉지도 반으로 접어 책가방에 넣었다.


“으차!”

정호는 일어나 기지개를 한번 쭉 켜고 교실로 향했다.






칙-

스피커가 켜지는 소리가 들리자, 칠판을 바라보던 정호는 빠르게 책을 덮었다.

그리고 수업종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자마자 가볍게 선생님께 목례를 하고
수업마무리를 하는 선생님의 음성을 뒤로한 채 서둘러 뒷문으로 나갔다.

아침 봄볕은 따뜻했고 화단에는 매화꽃 몇 송이가 새하얗게 피어 있었다.


정호는 2학년이 되며 매점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고,

2교시 후 쉬는 시간은 매점을 여는 시간이었다.

아무리 일찍 나가도, 학생들은 늘 매점 앞에 먼저 와 있었다.

매점에서 함께 일하는 민기가 기다리는 학생들을 등에 둔 채 자물쇠를 풀고 있었다.

민기가 자물쇠를 풀자 정호가 셔터를 올렸다.

둘은 학생들에게 떠밀리 듯 매점 안으로 들어갔다.


매점 안은 순식간에 학생들로 가득 차고

빵을 주문하는 목소리와 잡담과 웃음소리로 소란스러워졌다.

정호와 민기는 빠르게 주문을 받고 구멍으로 빵과 거스름 돈을 내주었다.

매대 가운데 있던 크림빵이 가장 먼저 소진되자,

정호는 익숙하게 빈 상자를 매대 밑으로 내리고

뒤편에 쌓아둔 새로운 빵상자를 잡아 올리려 손을 뻗었다.


“야, 여기! 빵식아! 크림빵 두 개!”

야구복을 입은 3학년 야구팀 주장이 민기에게 주문을 하였다.

정호는 잡아 올리려던 빵상자를 손에 쥔 채 그대로 멈추었다.

고개를 천천히 돌려 민기 쪽의 매대 너머 야구부 주장을 바라보았다.

민기는 멈춰 서있는 정호를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저희를 빵식이라고 부르지 말아 주세요.”

모든 소리가 한순간에 매점 문밖으로 밀려났다.

정호의 목소리는 정중하고 단호하였고

거기엔 어떠한 비난이나 원망이 배어 있지 않았다.

마치 뭔가를 굳게 자신에게 다짐하는 목소리 같았다.


매점에 가득 찬 학생들은 갑자기 들이닥친 정적을 이해하지 못해

손 안의 동전을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정호는 민기가 맡고 있는 매대의 오른편으로 천천히 다가갔다.


“선배님. 저희는 2학년 정호 그리고 민기라고 합니다.”

정호는 주장을 올려보며 매대 구멍으로 크림빵을 건넸다.


“어….”

주장은 말을 하려다 멈추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학생들의 시선이 주장에게 몰려 있었다.


“어, 나는 성길이라고 해. 빵 고마워.”

성길이는 어색하게 웃으며 빵을 건네받았다.


“네, 선배님.”

정호가 조용히 웃으며 답하였다.


새로운 학생들이 매점 안으로 들어서면서

쾌활한 소리가 매점 안으로 다시 가득 밀려들었다.






마지막 수업를 끝내는 종소리가 울렸다.

정호는 자신의 책상과 걸상을 교실 뒤편으로 밀어 두고,

분주하게 청소를 시작하는 학생들을 뒤로한 채 매점으로 향했다.

“민기야. 일찍 왔네?”

민기가 빈 빵상자를 매점 밖으로 날라 쌓고 있었다.


“응, 선생님이 3학년 마지막날이라고 일찍 끝내주셨어.”

민기는 빗자루를 손에 쥐어 들었다.


“그래? 매점도 오늘이 마지막이네?”

정호는 매점을 한눈에 담으려는 듯 한 발짝 물러나 잠시 바라보았다.



정호는 매대에 동전을 분류한 후 5개씩 묶어 빠르게 세었다.

동전 별로 셈을 다시 한 후, 각각 봉투에 금액을 적고 담았다.

많지 않은 지폐도 두 번 세어 금액을 확인하였다.

그리고 오늘 판매개수와 금액을 맞추어 보았다.


민기는 매점 안 청소를 끝내고, 입구를 쓸고 있었다.

2년 동안, 정호는 아침 판매준비와 매출정산을,

민기는 마감 후 정리를 담당하였다.


정호는 판매금액 수납을 위해 매점을 나섰다.

민기가 잠바를 빵상자 위에 벗어두고 입구청소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민기는 르까프 농구화를 신고 청바지를 발목까지 좁게 접어 올려 입었다.

하얀색 목폴라를 옅은 분홍색 와이셔츠 안으로 받쳐 입고 있었다.

주름 없이 빳빳한 와이셔츠는 청바지 속으로 넣어 입었고,

가운데 빨강줄 양쪽으로 초록색 줄이 있고,

금색의 금속버클이 달린 허리띠를 매고 있었다.


“우와! 허리띠 멋진데? 누나가 사줬어? 오! 멋쟁이!”

정호의 칭찬에 민기는 버클을 손으로 가리며 멋쩍게 웃었다.


“서무실 가려고?”

민기는 빗자루를 빵상자에 기대어 놓고 머뭇거리며 정호에게 다가왔다.


“음… 정호야… 그동안 고마웠어.”

민기의 귀가 연하게 붉어졌다.


“무슨 소리야? 내가 고마웠지!”

정호는 양손을 잠바 주머니에 넣고 괜히 팔을 살짝 흔들었다.


“민기야! 이제 보니 너 콧수염이 몇 가닥 있네? 간신 같아! 하하!”

정호가 한쪽 손을 주머니에서 꺼내 민기 얼굴을 가리키며 웃었다.


“야! 너는 시커멓거든!”

민기가 정호에게 오른 주먹을 장난스레 휘둘렀다.




정호는 서무실에 마지막 수납을 하고 교문으로 향했다.

오후 햇살에 제법 따뜻한 겨울 오후였지만

바다에서 불어온 바람은 얼굴을 아리게 하였다.

화단의 커다란 겨울나무들은 하늘로 뿌리를 뻗고 있었다.

정호는 잠시 나무 끝 너머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입을 모아 입김을 멀리 보냈다.




빵식이.png





[고단한 날들의 온기 – 산 37번지] 연재를 다시 이어갑니다.



지나온 시간 속, 마음 깊은 이야기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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