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 할부로 산 텔레비전이 우리 집에서 사라진 날
딸깍- 치이이이이이-
볼륨손잡이를 돌리자 순간 화면이 하얗게 번쩍였다.
중앙으로 빨려 들어가듯 꺼지더니 잠깐 화면이 일렁대다가
곧바로 거친 흰점과 검은점들이 화면 위를 들끓었다.
떠덕-
창무는 위쪽 채널손잡이를 한 칸씩 조심히 돌렸다.
채널 손잡이가 다음 칸으로 완전히 넘어가기 전에 화면에 색상이 들어왔다.
화면 속의 얼굴들은 아래로 떨어지는 수평선이 지날 때마다 뒤틀렸고,
치익거리는 소음사이로 화면 속 말소리가 들렸다.
아래쪽 채널손잡이를 천천히 돌리자
떨어지는 수평선의 횟수가 줄며 말소리가 또렷해졌다.
“두호야! 잘 나온다. 들어와라!”
창무가 창문을 보며 외쳤다.
“형! 아부지가 들어오래!”
정호는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두호를 보며 웃었다.
두호는 마당 화장실 지붕 위의 주인집 안테나를 잡고 있었다.
조심스레 안테나에서 손을 떼고 벽을 타고 천천히 내려왔다.
정호는 두호가 벽을 내려오는 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두호는 벽에서 묻은 시멘트가루를 옷에서 털어내며 정호에게 웃음을 보냈다.
“할머니. 텔레비 나와요. 들어와!”
정호는 방문 너머 정지로 고개를 내밀었다.
설거지를 하던 할머니는 활짝 웃고 있는 정호를 보며
고무장갑을 벗어 다라이 모서리에 걸쳤다.
“텔레비 소리가 나오냐?”
할머니가 담뱃갑보다 작은 보청기를 가슴에서 꺼내
세 가닥으로 꼬인 살색 이어폰 전선의 연결부를 매만졌다.
“응, 할머니! 소리 나와!”
정호가 할머니 귀에 가까이 입을 대며 조금 크게 말했다.
“아이고, 약이 떨어졌는갑다.”
할머니는 보청기에서 건전지를 꺼내 정호에게 건네었다.
정호가 건전지를 살짝 깨물어 보청기에 넣고 뚜껑을 닫았다.
그리고 숫자가 새겨진 조그만 볼륨 스위치를 천천히 돌렸다.
할머니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자 멈추었다.
“인자 정호는 만화영화 집에서 보믄 되긋다.”
할머니가 보청기를 가슴주머니에 넣었다.
“어머니, 이 드라마 봅시다.”
창무는 채널손잡이에서 손을 떼고
방바닥을 손으로 짚어 엉덩이를 한번 끌어 옮겨
가족들과 나란히 앉았다.
창무는 왼편으로 붙어 앉은 가족들을 잠시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TV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자 고개를 돌려 화면을 보았다.
그리고 오늘 할부로 구입한 TV를 천천히 살펴보았다.
은색 손잡이 끝에 형광등 빛이 맺혀 반짝였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창을 타고 넘어와
화면의 가족 웃음소리에 정겹게 섞였다.
TV 바로 뒤 창문은 어느새 가을밤을 켜고 있었다.
보름달이 화장실 위의 은색 안테나에 살며시 붙어 있었다.
창무는 잠시 달을 바라보다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날아라 날아라 썬더보드호
비추어라 비추어라 천년여왕
아아아아~ 아아아~
정호는 주인집 마루 끝에 걸터앉아 방문너머로 TV를 보고 있었다.
“들어가. 더워. 은철이랑 선풍기 쐬면서 봐.”
은철이 어머니가 마당 장독에서 국자에 된장을 한 술 떠 부엌으로 향했다.
은철이가 정호에게 들어오라고 손짓을 한번 하고 다시 TV를 보았다.
정호는 자세를 고쳐 앉았지만 여느 때와 똑같이 방에 들어가진 않았다.
알록달록한 망을 뒤집어쓴 선풍기가 고개를 돌려 마루로 잠시 바람을 보냈다.
“은철이 형, 나 갈게.”
만화영화가 끝나며 주제가가 흘러나왔다.
“정호야! 딱지놀이하자!”
정호가 일어나 돌아가려 하자 은철이가 불렀다.
“넘겨먹기 하자.”
은철이는 동그란 종이딱지를 두 묶음으로 나눠, 마루에 뒤집어 놓았다.
“먼저 골라.”
정호는 오른쪽을 골라 손에 쥐고 맨 윗장을 마루에 놓았다.
은철이는 손바닥을 오므려 마루 바닥을 쳤고, 그 바람에 정호의 딱지가 뒤집혔다.
“얘들아. 이거 마셔라.”
은철이 어머니가 콜라를 내어주셨다.
“내년에 정호 학교 가겠네? 이제 은철이랑 같이 다니면 되겠네.
만화영화도 같이보고, 공부도 같이하고.”
“네, 아주머니. 잘 마시겠습니다.”
정호가 인사를 꾸벅하는 동안 은철이는 뒤집은 딱지를 자신의 패에 섞었다.
정호는 종이딱지를 다시 한 장 골라 쥐었다.
로봇 만화가 인쇄된 매끈한 면에 입김을 한 번 불었다.
인쇄면을 아래로 놓고 표면이 살짝 일어난 거칠한 뒷면을
손바닥으로 꾹 눌러 딱지를 바닥에 바짝 붙였다.
은철이가 다시 바닥을 쳤다.
하지만 정호의 딱지는 꿈적도 하지 않았다.
정호는 손바닥을 한 번 쳐다보았다.
종이먼지와 잉크냄새가 슬며시 올라왔다.
동그란 딱지 자국이 천천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는 손을 오므린 후 높이 들어 올렸다.
팍-
“형님 잠깐 들어오셔요.”
정호 아버지가 공청아저씨에게 지폐를 건넸다.
“아녀, 빨리 돌아야지.”
아저씨가 정호 아버지에게 동전을 거슬러 주었다.
공청아저씨는 정지에서 방으로 상체를 걸치고 방문 앞 발판에 앉아 있었다.
그는 볼펜이 끼워진 손바닥만 한 수첩을 오른손으로 안주머니에서 꺼냈다.
왼손은 항공잠바 주머니에 넣은 채 볼펜 끝을 입으로 물어 수첩에서 빼내었다.
수첩을 방바닥에 두고 볼펜을 쥔 오른손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뒤편의 빈페이지가 나오자 손날로 수첩을 꾹 누르고 글자를 적기 시작했다.
번지를 적으려고 하자 작고 두꺼운 수첩은 앞페이지가 무거워 자꾸 닫혔다.
그는 주머니에서 왼손을 급히 빼내 수첩을 눌렀다.
손이 붙어 있어야 할 곳에 손목뼈만 뭉툭하게 붉은 살로 덮여 있었다.
“인자 매달 26일에 공청세 내면 되네.”
수첩의 새로운 페이지 위칸에 정호네 집주소와 아버지의 이름이 적혔다.
그리고 82.10.26이라는 날짜 옆에 조그마한 도장이 찍혔다.
정호는 TV로 고개를 향하고 있었지만,
곁눈질로 아저씨의 뭉툭한 잘린 손목을 자꾸 살폈다.
아저씨는 왼손을 먼저 주머니에 넣고 오른손 하나로
도장과 인주를 주머니에 넣고, 수첩에 볼펜을 끼운 후 안주머니에 넣었다.
“정호야, 또 보자.”
아저씨는 방바닥을 오른손을 짚으며 일어섰다.
정호는 일어나 아저씨께 허리를 굽혀 인사를 드렸다.
그는 자신의 왼 손목을 오른손으로 살짝 쥐고
정지문을 나서는 아저씨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 혼자 있니? 할머니도 안 계셔?”
TV 할부금을 매달 받으러 오는 아저씨는 낯선 사람 한 명과 함께였다.
“오늘 잠깐 TV 가져갈 거야. 아빠가 다시 가져올 거야. 알았지?”
정호는 방안 쪽으로 물러나 고개를 숙이고 앉았다.
아저씨는 플러그를 뽑고 TV를 앞으로 약간 빼낸 후
뒷면의 안테나선을 풀어 뽑았다.
그걸 슬며시 지켜보던 정호의 얼굴이 붉어졌다.
“잘 지내렴.”
아저씨는 TV를 정지에 있던 사람에게 건넸다.
‘다음 주에 가게로 가져다줄게’
‘다음 달에 한 번에 주면 안 될까?’
‘정말로 이번엔 약속 지킬게. 응?’
식구들은 창문 너머 마당에서 들리는
아버지의 부탁을 삼 개월 동안 몇 차례 들어왔다.
그때마다 두호는 TV의 볼륨을 높였고,
고개를 숙이고 들어오는 아버지를 누구도 쳐다보지 않았다.
책상 위에는 TV가 남긴 사각형의 먼지만 뿌옇게 남아 있었다.
끊어진 두꺼운 안테나 동축선 끝이 허공에 흔들리며 창틀아래 매달려 있었다.
정호는 검지로 먼지를 쓰윽 한번 문질렀다.
그는 안테나선을 눈길로 쫓아 창문밖을 편안하게 바라보았다.
그리고 엄지로 검지의 먼지를 문대 털어냈다.
“조용허네. 안에 있는가?”
공청아저씨가 문을 열고 정지에 들어섰다.
“아이고 어서 오시오.”
할머니는 책상 위를 한번 바라본 후 방문을 열었다.
“오늘 공청세….”
아저씨는 방 안을 보자 말을 멈췄다.
텔레비전이 있어야 할 자리가 책상 위만 뭉툭하게 비어 있었다.
“어무니, 창무는 아직 안 왔어요? 음… 그럼 담에 다시 올게요.”
정호가 일어나 인사를 드리자 아저씨는 앉으라 손짓을 하며 정지를 나섰다.
공청아저씨는 대문을 나서 골목등 아래에서 수첩을 꺼내었다.
왼 손목으로 수첩을 벽에 꾹 놀러 고정하였다.
뭉툭한 손목 끝은 천으로 감겨 있었다.
그는 정호네 주소가 적힌 페이지를 폈다.
3개의 조그만 붉은 도장이 찍혀 있었다.
오른손에 쥔 볼펜으로 수첩을 몇 번 쿡쿡 찍더니
작은 숨을 내쉬며 정호네 주소와 아버지의 이름 위로 검은선을 그었다.
“아따, 오늘따라 많이 춥네.”
아저씨는 어두운 골목길을 따라 내려갔다.
홀쭉한 초승달이 화장실 위 갈치뼈 같은 은색 안테나에 살며시 매달려 있었다.
[고단한 날들의 온기 – 산 37번지] 연재를 다시 이어갑니다.
지나온 시간 속, 마음 깊은 이야기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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