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에 타지 않은 것
해는 돌산대교가 걸친 남산 뒤로 지고 있었다.
가막만에서 불어온 부드러운 바닷바람은
돌산대교 아래 좁아진 물길을 지나며 조급해졌다.
바람은 종포 수산시장의 비린내를 등 떠밀며
부둣가 얼음공장의 공중레일을 흔들었다.
가파른 고소동 산동네 집들의 지붕을
하나씩 훑으며 다시 차분해졌다.
탁 트인 산동네 작은 공터의 커다란 느티나무는
비린 바람에 살며시 몸을 떨며 붉고 노란 잎을 우수수 털어냈다.
공터에 떨어진 가을잎들은 바스락거리며 바람에 밀려다니다
구멍가게 미닫이 출입문 앞으로 두툼하게 모였다.
“수정 엄마, 88 한 갑만 주소.”
가게문을 열자 문턱 너머로 떨어진 잎들이 굴러 넘어갔다.
“정호 아버지, 담배 태우세요?”
가게주인은 머뭇거리며 담배를 건넸다.
“오랫동안 안 피웠는데, 오늘은 한대 피고 싶네. 흠… ”
창무는 코로 낮게 숨을 내쉬며 허리를 짚었다.
그는 느티나무 아래 와상에 걸터앉았다.
손가락에 끼운 담배 한 개비를 한참을 만지작거렸다.
바닷바람에 느티나무의 마른 잎들이 서로를 할퀴며 마른 소리를 내었다.
창무는 신문지로 겹겹이 쌓인 뭉치를 조심히 방바닥에 꺼내었다.
오래된 신문지를 벗겨 내자, 안에는 하얀 습지가 여러 겹 둘러져 있었다.
습지를 벗겨내자 두껍고 투명한 아크릴 덩어리가 나왔다.
두호의 이름이 적힌 문패였다.
“나중에 두호 명의로 집 사면 걸어두자.”
“우와.”
정호는 아버지가 만든 문패를 손에 쥐어 들었다.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그것을 구석구석 살펴보았다.
앞 면에는 한문으로 된 형의 이름이 굵게 조각칼로 새겨졌고,
그 안은 검은색으로 채워져 있었다.
뒷면은 하얀 배경색이 칠해져 있어 형의 이름이 입체적으로 보였다.
정호는 문패를 들어 안방 창문으로 들이치는 빛에 비추었다.
투명한 아크릴 문패는 아침 봄볕을 받아내,
새하얀 빛을 여러 갈래로 나누어 방안에 흩뿌렸다.
빛줄기 몇 갈래에는 옅은 무지개가 배어 있었다.
“두호 소식은 듣냐?”
아버지는 신문지에 담배가루를 말았다.
두호는 납부금을 감당하지 못해 고등학교 첫 학기에 중퇴했다.
그리고 소아마비로 굽은 다리로 절뚝거리며 집을 나갔다.
그 이후로 창무는 한 번도 장남 두호의 이름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네?”
정호는 집을 나서려다 돌아서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창무는 정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정호의 마른 얼굴엔 광대뼈가 도드라졌고 눈이 깊이 들어가 있었다.
창무는 무심히 허리를 짚었다.
‘애가 빼짝 말라가지고, 삼혜 고아원 애들이 더 낫지. 이 이쁜 거를…’
외상도 곧잘 해주던 구멍가게 무열이 엄마의 핀잔이 귓가에 맴돌았다.
“씩씩해라.”
창무는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네…”
정호는 출입문을 나섰다.
그리고 중학교 입학식을 하는 첫 등굣길에 올랐다.
골목길을 내려오다 멈춰 돌아섰다.
한쪽 아랫입술을 깨물며 집을 올려다보았다.
창무는 한참을 종이에 뭔가를 써 내려갔다.
종이를 접어 봉투에 담은 후 집을 나섰다.
창무는 사글세가 밀린 셋집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그리고 집으로 연결된 골목길 입구에 섰다.
바닥에 봉투를 놓고 무거운 돌을 그 위에 두었다.
그는 잠시 집을 바라보았다.
산동네에서 가장 높은 집은 바로 뒤가 산이었다.
아랫집까지도 두 단의 넓은 밭이 있었다.
외떨어진 집이었다.
창무는 곤로의 석유를 빼내었다.
나무마루 아래 책과 신문지를 던져 놓고 거기에 뿌렸다.
그리고 마루에 걸터앉아 소주 한 병을 단번에 들이켰다.
저 멀리 아래, 눈부신 아침 햇살에 돌산대교의 붉은 주탑이 반짝였다.
창무는 그 너머 가막만의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는 일어서며 성냥을 켜,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를 입에 문 채 까맣게 말라가는 성냥개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끄트머리만 남은 성냥불을 마루 아래로 던졌다.
짧게 남아 타고 있는 성냥은 마지막 불을 신문에 옮겼다.
후욱하며 가장자리의 마른 신문이 까맣게 타들어갔다.
창무는 마루를 지나 방으로 들어갔다.
미닫이문이 닫히고 곧이어 문고리를 거는 소리가 들렸다.
“김반장 님! 이거 섭섭해서 어쩌나?”
박계장이 목공실 입구에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네?”
창무는 작업 후 공구 회수 점검을 목공실담당 교도관과 함께 하고 있었다.
“이번에 삼일절 특사로 나가실 겁니다!”
창무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저도 너무 섭섭합니다.”
함께 작업하던 서주임이 웃으며 창무를 바라보았다.
창무는 한때 소목장이었다.
제 손으로 작은 집 몇 채를 거뜬히 올리던 오야지였다.
수감 기간 동안 그는 교정시설 목공 작업반에서 일했다.
손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같은 수의를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그의 기술은 눈에 띄었다.
가구점과 공사판에서 익힌 손이 곧 반장을 맡게 했다.
규칙적인 생활과 금주, 세끼 식사를 통한 충분한 영양은
파스에만 의지하던 허리 통증을 조금씩 가라앉혔다.
의무과의 기본 진료만으로도 몸은 눈에 띄게 회복되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인정을 받으며,
새카맣게 타버린 마음에도 서서히 희망이 싹텄다.
그는 한 푼이라도 더 모으기 위해 작업장려금을 아꼈고,
그 결심을 지키려 뼛속까지 파고드는 담배마저 끊어냈다.
“계장님, 저 오늘 연장 근무 좀 해도 되겠습니까?
나가기 전에 큰아들 이름으로 문패 하나 만들고 싶어서 그렇습니다.”
박계장은 말없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일 좋은 것으로 하나 만들어가요.”
서주임이 가장 상급의 아크릴을 창무에게 건넸다.
창무는 나무 작업대 바이스에 아크릴을 물렸다.
두꺼운 펜으로 두호의 이름을 한문으로 그렸다.
조각칼로 이름을 조심스럽게 파내었다.
날카로운 가장자리를 사포로 문질러 부드럽게 만들었다.
하얗게 묻은 가루를 입으로 후 불어 털어냈다.
아들의 이름을 가만히 쓰다듬었다.
“두호야….”
눈물이 아들의 이름 위에 맺혔다.
“정호야. 이제 신문배달 그만둬. 내가 돈벌테니.”
창무는 정호의 어깨를 감싸며 정리된 작업실을 돌아보았다.
아버지와 살기 위해 새로 얻은 방 두 칸짜리 집에는
가장자리로 별도의 작은 창고가 붙어 있었다.
아버지는 그곳에 조그맣게 제 목공소를 차렸다.
몇 달 동안 외지로 일을 다니며 창무는 돈을 모았다.
그리고 망치, 톱, 대패, 그리고 끌 등의 목공구를 사 왔다.
창무는 두 아들과 함께 나무를 자르고 다듬고 붙여
튼튼한 나무작업대와 선반을 능숙하게 짜 올렸고,
며칠 만에 멋지게 목공방의 골격을 채웠다.
두호가 작업실 입구에 뭔가를 ‘쿵’하고 내려놓았다.
“네가 어떻게 이걸…”
창무는 단번에 그것을 알아보았다.
그것은 창무가 가구공방에서부터 쓰던
메주보다 커다란 자연석 숫돌이었다.
옆면은 누런 흙빛이 배어든 채 거칠었지만,
과거에 매일같이 쇠붙이를 받아낸 윗면만큼은
반듯하게 길들여져 뽀얀 유백색을 띠고 있었다.
“그날 집에 들렀다가, 챙겨서 아랫집 행기네에 맡겨 두었어요.”
두호가 멋쩍게 웃으며 이마의 땀을 닦았다.
그날, 정호를 찾으러 달려갔던 집은 벽체만 남기고 모두 타 버린 후였다.
숫돌만은 부엌 바닥에 묵직하게 남아있었다.
두호가 어릴 때 아버지 공방에서 나무조각으로 장난감을 만들다
끌이나 조각칼을 갈며 놀던 숫돌이었다.
공방이 닫힌 뒤 숫돌은 부엌으로 옮겨졌고,
정호는 그 위에서 할머니의 부엌칼을 갈았다.
창무는 망치로 대패 끝을 툭 쳐서 날을 꺼내었다.
메말랐던 숫돌에 물을 뿌리고 대패날을 문대었다.
미색의 숫돌 표면 위로 검은 쇳물이 배어 나왔다.
대패날을 엄지와 검지로 쓱 닦아내었다.
부드러운 진흙 같은 걸쭉한 감촉이 손끝에 돌았다.
살짝 웃음을 머금고 쇳가루 섞인 젖은 가루를 몇 번이고 문질렀다.
“형님, 다른 일 하지 마시고 수석 받침만 납품해도 돈이 됩니다.”
수석 가게를 하는 창무의 후배가 어느 날 공방에 찾아왔다.
후배는 이미 창무의 실력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제시한 건당 금액도 기대보다 높았다.
후배가 가져다준 수석은 주먹만 한 것부터
어린아이 상반신만 한 것까지 다양했다.
창무는 후배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아름답게 받침대를 제작했다.
그에겐 수석의 바닥을 손으로 만져보고
받침을 깎아 수평을 정확히 맞추는 건 쉬운 일이었다.
수없이 골조를 세우고 문틀을 끼워 넣던 손이었다.
산을 담은 돌은 받침대에 평화로운 마을을 새겨 넣었다.
한쌍의 원앙에겐 잔잔한 물결의 호수를 놓아주었다.
창무의 받침을 얹자 돌은 전혀 다른 얼굴이 되었다.
후배는 약속한 대로 대금을 지불해 주었다.
창무는 무거운 수석을 몇 번이고 작업대에 올렸다 내리며
몸은 힘들었지만 그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는 않았다.
그러나 어느 날부터 일은 늘어났지만 결제가 늦어지기 시작했다.
쩍-
끌을 갈던 중, 숫돌이 사선으로 갈라졌다.
갈라진 윗덩어리가 작업실 바닥으로 떨어졌다.
날카롭게 잘린 모서리가 깨지며 파편을 뿌렸다.
“아!”
창무는 바닥에 쭈그려 앉은 채 갈라진 숫돌을 들었다.
갑자기 허리를 잡으며 앞으로 거꾸러지다,
겨우 다른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손바닥에 부서진 숫돌가루가 박혔다.
“아버지! 괜찮으세요?”
정호가 아버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응, 괜찮아. 갑자기 허리가…. 다녀왔어?”
창무는 작업대 의자에 앉아 허리를 쭉 폈다.
“아버지. 수석가게가 갑자기 문을 닫았어요.
안에 아무것도 없어요.”
정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정호는 다시 들고 온 수석과 나무받침을 담은 가방을 내려놓았다.
철커덕-
창무가 작은 철문을 열고 나왔다.
교도관 몇 명이 따라 나와 그와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었다.
“아버지!”
정호는 아버지에게 빠르게 걸어가며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정호 몰라보게 컸네, 이제 고2 되었지?”
창무는 웃으며 정호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깨는 단단했고 허리는 곧게 펴져 있었다.
눈빛은 흔들림이 없었다.
“두호야…”
창무는 천천히 다가오는 두호를 조용히 불렀다.
일찍 철이 들었던 눈빛은 그대로였지만,
그 눈빛을 둘러싼 얼굴은 어느새 아버지를 닮아 있었다.
“아버지…”
두호는 굳어 있던 얼굴을 풀고 조심스레 두 손을 모았다.
“아버지. 가요.”
정호가 아버지의 가방을 받아 매었다.
“그래, 가자.”
창무는 두호의 손을 잡아끌었다.
정문 앞으로 뻗은 길을 따라,
아버지와 두 아들은 함께 걷기 시작했다.
[고단한 날들의 온기 – 산 37번지] 연재를 다시 이어갑니다.
지나온 시간 속, 마음 깊은 이야기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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