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오래 듣지 못한 소리
드르르르-
바람은 다시 한 차례 지붕을 거칠게 밟고 지나갔다.
마루에 올라서 미닫이 방문을 붙잡고 흔들어댔다.
문틀 사이로 파고들며 쉭쉭 대었다.
새벽부터 시작된 바람은 점점 거세졌다.
정호는 눈을 떴다.
방안은 캄캄했다.
마당으로 난 방문을 바라보았다.
문살에 끼워진 반투명 유리는 아직 어두웠다.
몸을 일으켜 앉아 바닥의 라디오시계를 보았다.
AM 5 : 58
노란 장판 위로 반사된 초록빛 숫자가 희미하게 일렁였다.
그는 라디오를 켰다.
옆으로 긴 채널창 가장자리에 노란 불이 들어왔다.
치이익 -
잡음 속 목소리가 채널 노브를 살짝 돌리자 또렷해졌다.
“… 제13호 태풍 베라는 현재 목포 서북서쪽 약 80킬로미터 해상에서 시속 25킬로미터로 북상 중입니다. 여수를 포함한 전남 남해안 일대에는 태풍경보가 발효되었습니다. 태풍은 내일, 8월 29일 한반도를 가로질러 동해상으로 빠져나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정호는 문을 열고 나가 마루에 섰다.
차착- 차착-
마당의 빨랫줄이 바람에 팽팽해졌다.
빨래집게가 사납게 부딪쳤다.
시멘트 덩어리에 박힌 속 빈 철봉이
낮게 울었다.
하늘은 짙은 회색이었다.
빗줄기들이 공중에서 한 무리로 엉겨
바람에 밀려 이쪽저쪽으로 떠돌았다.
쏴아-
굵은 비가 먼저 쓸고 지나가더니
무거운 바람이 처마를 들썩였다.
산동네의 노란 창들이 촛불처럼 훅 꺼졌다.
정호는 저 아래 여수 시내를 내려다보았다.
불빛이 잠시 흔들렸다.
교회탑 위 붉은 십자가가 천천히 기울었다.
잠시 멈춘 듯하더니
붉은빛이 꺼졌다.
정호는 골목을 내려가다 멈췄다.
깡할아버지가 골목등 아래 계단참에 앉아 있었다.
정호는 담벼락에 몸을 붙이고 고개를 빼 아래를 살폈다.
내려왔던 골목을 한 번 올려다본 뒤
다시 아래를 살폈다.
작은 벌레들이 골목등 전구 주위를 어지럽게 날았다.
츳츳츳츳 … 찌르르르…
풀벌레 소리가 겹겹이 조용히 골목을 채웠다.
탱-
커다란 나방이 골목등 갓에 부딪힐 때마다
일정한 풀벌레 소리는 순간 사그라들었다.
골목등 아래 하얗게 빛나던 거미줄이 흔들렸다.
커다란 나방은 몇 번 날갯짓을 하다 멈추었다.
정호는 호흡을 한 번 가다듬었다.
입을 앙다물고 주먹을 살짝 쥐고 아래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정호는 잠깐 멈춰서 빠르게 인사를 하고 할아버지를 지나쳤다.
“어디 가니?”
할아버지가 정호를 불러 세웠다.
“네? 아버지 계신지 무열이 아저씨 점빵 가보려고요.”
정호는 몸을 아래 방향으로 튼 채 한쪽 다리를 뻗고 있었다.
“그럼 올라오면서 막걸리 한 병만 받아와라.
여기 있을 테니, 오늘따라 내려가는데도 숨이 가쁘네.”
할아버지가 500원 동전을 건넸다.
“100원은 너 과자 사 먹어.”
할아버지는 남방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정호야! 오일장에 말구경 가자!”
행기가 마당으로 뛰어 들어왔다.
연등천 옆 공터엔 오일장이 열렸다.
가끔 보부상들은 만화경 같은 신기한 물건을 가져왔고,
원숭이나 말같이 보기 드문 동물이 장에 나타나기도 했다.
정호와 산동네 친구들은 우르르 몰려가 장을 휘젓고 다녔다.
다라이를 두드리며 손님을 부르는 할머니들,
“만병통치요!” 목을 돋우는 약장수,
트로트 메들리를 끊어 부르는 각설이의 쉰 목소리,
뻥튀기 기계가 펑, 하고 터질 때마다
아이들이 귀를 막고 웃었다.
그 소란 한가운데
깡할아버지는 둥근 나무의자에 혼자 앉아 있었다.
‘이발 500 환’이라고 적힌 나무판이
무릎 아래로 조용히 기울어 있었다.
“야 저기 깡할아범이다.”
승민이가 구석을 가리켰다.
“저 할아버지 우물 위 꼭대기 집에 살잖아.
저번에 상식이 형이 산에서 내려오다 봤는데,
그 우물가에서 할아버지가 토끼를 산채로 껍질을 벗기더래.”
방금 전에 어린 토끼를 구경했던 아이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나도 그 이야기 들었어. 으…”
행기가 몸서리를 쳤다.
“정호야, 너 저번에 깡할아버지에게 머리 깎였잖아?
안 무서웠어? 너 울었잖아.”
정호는 얼굴이 붉어졌다.
“할아버지 쳐다본다. 도망가자.”
깡할아버지는 뒤돌아 달려가는 아이들을 무심히 바라보았다.
정호는 달리다 말고
한 번 뒤를 돌아보았다.
“니 아버지 없든?”
깡할아버지는 막걸리 담은 비닐봉지를 받아 옆에 두었다.
“왜 과자는 안 사 먹었어?”
그는 손바닥에 동전을 세어본 후 정호를 보았다.
“괜찮습니다.”
정호는 앞으로 손을 맞잡고 목을 움츠렸다.
“자 이거 받아. 심부름값이야.”
할아버지는 100원을 건넸다.
“네, 감사합니다.”
정호는 뒤통수를 긁적이다 두 손을 내밀었다.
“정호야, 나 좀 집까지 부축해 주라. 후우. 오늘 이상하게 힘드네.”
할아버지는 두 손으로 땅을 짚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제가 들게요.”
정호는 봉지를 들고,
할아버지 곁에 나란히 서며 어깨를 내주었다.
할아버지는 오른팔을 정호에게 둘렀다.
“할머니가 없어서 힘들지?”
할아버지가 정호의 어깨를 살짝 다독였다.
“열 살이라 그랬나? 나도 이북에 니 만한 손주가 있을라나? 후우”
할아버지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풀벌레 소리가 잠시 끊겼다.
할아버지가 다시 걸음을 떼었다.
기대는 무게가 조금 더 실렸다.
정호는 할아버지의 허리를 감싸고,
어깨 위에 놓인 손을 꼭 잡았다.
할아버지의 마르고 얇은 손등의 피부는 왠지 익숙했다.
정호는 조금씩 할아버지의 낮은 걸음에 박자를 맞추어 걸었다.
멀리서 개 한 마리가 짖었다.
“정호 왔냐? 아이고”
할아버지는 우물가에서 앉아 뭔가를 하다 허리를 폈다.
정호는 잠시 뒷걸음을 치다 멈추며 살짝 웃었다.
할아버지는 손빨래를 하고 있었다.
이발을 할 때 두르는 회색보자기와 감색 수건이었다.
회색 보자기를 양손으로 비틀어 잡아당겼다.
“아버지 아직 안 왔어? 라면이나 같이 먹자.”
할아버지는 집으로 힘겹게 올랐다.
장군산에서 내려오는 골짜기는 산동네를 가르고 있었다.
골짜기와 마을이 만나는 곳보다 위쪽에 공동우물이 있었다.
깡할아버지의 집은 동네에서 가장 높은 그 우물가보다 한 단 위에 있었다.
외떨어진 할아버지의 무허가 집은 부엌이 딸린 단칸방이었다.
“니 형 소식은 듣냐? 그 다리로 뭔 고생을 하고 있으까?
아휴 불쌍한 새끼들….”
할아버지는 막걸리잔을 비우고 밥상에 내려놓았다.
“니 다 묵어, 나는 라면국물만 있으면 돼.”
할아버지는 냄비를 정호 쪽으로 슬쩍 밀었다.
“할아버지는 형제 없으세요?”
정호는 젓가락을 놓았다.
“음… 8형제나 있었지. 개성에… 아직 살아있을란지 모르겄다.”
할아버지는 부엌문 밖, 골짜기 아래로 동네를 바라보았다.
“장가도 가서 어린 아들도 둘 있고, 안사람이 셋째를 배고 있었지.
예쁜 딸이길 바랐는데… 일본에 징용으로 잡혀가서 못 보고 말았네.
해방하고 귀국선 타고 여수로 왔다가,
돈 좀 벌어서 가려고 부두에서 일하고 간다고 기별했는데
38선이 그어지고 전쟁통에 완전히 소식이 끊어져버렸지…”
할아버지는 잔에 막걸리를 따랐다.
“죽을 때가 되었나… 왜 이런 이야기를 니한테….”
할아버지는 막걸리를 들이켰다.
“내일도 막걸리랑 담배 좀 사다 줘라.”
할아버지는 이불을 들추고, 아래 노란 장판을 뒤집었다.
장판 아래에는 지폐와 동전들이 깔려 있었다.
장판에는 동그랗게 눌린 동전자국들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통장 알지? 성철이 아빠. 내일 좀 꼭 들르라 말 좀 해줘.”
할아버지는 지폐며 동전을 잔뜩 집어 정호에게 주었다.
“매일 주는 게 귀찮다. 알아서 셈하고.
돈 떨어지면 이야기해. 100원씩 꼭 심부름 값하고.”
쏴아아아-
갑자기 비가 내렸다.
부엌에 널어놓은 보자기가 바람에 부드럽게 날렸다.
풀벌레 소리가 잦아들었다.
개구리울음이 대신 골짜기를 채웠다.
오전까지 강했던 바람은 늦은 오후부터 잦아들었다.
멀리 돌산대교 뒤 수평선 위로 붉은 노을이 구름을 밀어냈다.
태풍에 씻긴 세상은 티끌 하나 없이 맑았다.
촉촉하고 선선한 바람에 정호의 짧은 머리가 살랑였다.
정호는 막걸리와 라면 그리고 할아버지 안주로 참치캔을 샀다.
골목길이 어스름해지기 시작했다.
골짜기를 따라 난 생활하수로인 고랑에는
며칠째 내린 비가 모여 맑은 물이 시원하게 콸콸 흐르고 있었다.
골목길은 온통 계곡처럼 물 흐르는 소리로 가득 찼다.
정호는 우물로 이어지는 길에 들어서며 갑자기 멈추었다.
할아버지의 집 주위로 걸린 전구들이 노랗게 빛을 밝히고 있었다.
그리고 주변으로 여러 사람들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정호는 입을 반쯤 벌리고 눈을 크게 뜨며 주변을 살폈다.
그는 천천히 부엌문을 바라보며 집으로 다가갔다.
“아이고 혼자… 불쌍해서 어찌까.”
우물가에서 성철이 엄마가 울먹이고 있었다.
통장과 동네 노인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정호는 다가가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집을 바라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노란 전구들이 정호의 눈에 맺혔다.
그의 눈은 투명하게 일렁였다.
우물 저 깊은 곳에서 물이 낮게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정호 외에는 아무도 그 소리를 오래 듣지 못했다.
풀벌레 소리가 밤을 메웠다.
[고단한 날들의 온기 – 산 37번지] 연재를 다시 이어갑니다.
지나온 시간 속, 마음 깊은 이야기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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