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부리 밴드의 건반주자

새벽의 B면

by 따뜻한시선

타닥- 타닥-


계단을 오르는 소리가 일정하지 않았다.

한 발이 늘 늦었다.


후우-

골목이 붙는 자리, 가로등 아래에서 두호는 잠시 멈췄다.

뒤돌아 내려다본 계단이 새벽어둠 속으로 길게 누워 있었다.


고소동 산동네로 이어지는 골목 계단.

골목 사이로 장군섬의 귀퉁이가 보였다.

돌산대교의 가로등 불빛이 수면 위에서 흩어졌다.


두호는 소실점처럼 사라진 계단 끝을 바라보았다.

그의 오른 다리는 소아마비로 덜 자라, 마른 지팡이처럼 가늘었다.

그는 벽을 짚고 몸을 왼쪽으로 기울였다.

오른 다리를 먼저 올리고,

그것을 버팀으로 삼아 왼발을 끌어올렸다.

오른손에 쥔 비닐봉지가 흔들렸다.


한 칸씩, 같은 방식으로.

타닥- 타닥- 소리가 먹구름 아래로 사라졌다.




지붕에 잘린 가로등빛이 길게 마당을 가로질러 부엌까지 이어졌다.

두호는 부엌에서 조용히 방문을 열고 문턱에 앉았다.


“형 왔어요?”

정호가 눈을 뜨고 머리맡의 시계를 보았다.

야광시침이 희미하게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응, 더 자. 아침에 사과 먹고 가.”

두호는 작은 냉장고에 비닐봉지를 넣었다.


“날씨가 흐려, 비옷 챙겨서 나가. 비 맞고 배달하지 말고.”

두호는 정호의 옆에 가만히 누웠다.


창문으로 들이치는 옅은 빛이 정호의 얼굴을 비추었다.

새벽 일찍 출항하는 작은 배의 엔진소리가 멀어져 갔다.

두호는 정호의 이마를 한 번 쓸고 몸을 돌렸다.








“내가 마저 할 테니까. 무대 올라가.”

장미 마담이 주방의 커튼을 젖히며 들어섰다.


두호는 과일 물이 묻은 손을 급히 닦고 무대로 향했다.

드럼을 치는 밴드 리더가 고개로 신호를 주었다.


두호는 악보를 보고 건반 위에 손을 얹었다.

손끝에서 사과 냄새가 올라왔다.


그가 첫 코드를 누르자, 색소폰이 울리며

미러볼 조명이 천천히 돌아갔다.

“안녕하세요! 코리아나 관광나이트를 찾아주신 여러분!

오늘도 감사드리며 첫 곡으로 옥경이 올리겠습니다!”

반짝거리는 양복을 입은 가수가 박자에 맞춰 몸을 들썩였다.


"희미한 불빛 아래 마주 앉은..."




30분의 라이브 공연이 끝나고 가수가 감사인사를 올렸다.

그동안 두호는 무대 뒤 테이프 데크로 달려갔다.

‘2부 발라드’라고 적힌 테이프를 오디오에 넣었다.

가수의 말이 끝나자 플레이버튼을 눌렀다.

잔잔한 음악이 홀을 채웠다.


홀에는 가장자리에 5개의 바가 있었다.

장미, 백합, 목련, 매화, 동백

담당 마담의 예명이 바 이름이었다.

두호는 주방으로 돌아가기 전 바를 돌며 안주주문을 받았다.


“과일이랑 오징어 하나, 마요네즈 좀 듬뿍 줘.”

장미마담이 바 너머로 주문서를 건넸다.


“동생이랑 밥 사먹어.”

그녀가 주문서 아래 만원을 함께 건네며 눈을 찡긋했다.




“두호야, 3부 때 신청곡 몇 개만 불러라. 만식이가 오늘도 목이 안 좋아서… ”

장사장이 미안한 얼굴을 지었다.


“네, 삼촌. 대신 사과 좀 챙겨갈게요.”

두호는 껍질을 벗기고 남은 사과를 한입 베어 물었다.


홀에서 B면의 마지막 곡이 먹먹하게 흘러나왔다.

쓸쓸한 남자의 목소리가 새벽을 긁고 있었다.








“형. 공고 가려고요.”

정호는 형을 힐끗 보고, 시선을 책상 위로 떨어뜨렸다.


“왜? 성적 충분한데, 여수고 안 가고?”

두호는 읽던 책을 뒤집어 내려놓았다.


“빨리 돈 벌어서 형이랑… 할머니랑… 아버지….”


툭-툭- 투둑-

눈물이 교과서 위에 번졌다.


두호는 아무 말이 없었다.


끄득-

그는 오른 다리의 청바지를 움켜쥐었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


“네가 정해.”








“할만하니? 외삼촌이 사장인데 어찌 더 부려먹는 거 같아?”

장미 마담이 웃으며 장사장을 흘겨봤다.

포장마차에 둘러앉은 나이트 식구들의 웃음이 한 번에 터졌다.


“네 이모. 할만해요. 주방일과 건반연주하는 게 다인데요.”

두호도 덩달아 웃었다.


“이모라니. 너 스물넷이지? 장미는 서른둘밖에 안 됐는데. 누나라고 불러. 자식아.”

목련마담이 두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래, 앞으로 마담들 다 누나라고 불러. 다섯 명이 누나 해 줄게.”

장미마담이 소주잔을 두호에게 내밀었다.


“너 밴드 했다며? 대학에서 밴드 했어?”

회식 자리의 나이트 식구들은 술이 조금씩 올랐다.

몇 명씩 짝을 이루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니요, 그냥 마음 맞는 친구들이랑 작년까지 했어요.”

두호는 미간을 살짝 들어 올리며 손으로 입을 쓸었다.


“대학은 무슨… 여수고 다니다 중퇴했어… 학비가 없어서…”

장사장이 취기가 오른 목소리로 말했다.


“부모 잘 만났으면 서울대 갔을 놈이여….

얼마나 공부를 잘했는데…”

그는 두호를 잠시 바라보다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그럼 사장님이 공부 좀 시켜주면 되겠네!”

장미마담이 장사장 술잔에 술을 따랐다.


“네 엄마가 못해준 거…. 내가 할 거다….”

장사장은 테이블에 조용히 엎드렸다.


“사장님 오늘따라 많이 취하셨네.”

목련마담이 장사장의 등을 가만히 두드렸다.


“내가 사람 많이 겪어봤는데, 넌 여기 있을 애가 아니다.”

장미 마담이 소주잔을 들이켰다.


“오부리밴드에서 건반 치고, 과일 깎으면서 살고 싶니?”

그녀는 포장마차의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다르게 살아. 남들보다 배로 힘들겠지만.”

그녀는 잠시 말을 멈췄다.

“공부 다시 해봐.”

그리고 그의 오른 다리를 가볍게 두들겼다.


“네, 누나.”

두호는 장미마담을 보고 가볍게 웃었다.

잔을 비우고 오른 다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포장마차의 벌어진 천막사이로 밤하늘이 걸려 있었다.








삐비비빅-


정호는 빠르게 알람시계를 껐다.

저 아래 해안도로에서 낡은 트럭 한 대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깊이 잠든 형을 바라보았다.

입을 살짝 벌린 채 턱이 아래로 약간 떨어져 있었다.

그 모습이 낯설지 않았다.


“아버지….”

정호는 아주 작은 소리로 말했다.




끽-

녹슨 대문의 경첩이 새벽을 깨웠다.

정호는 잠시 멈칫했다.

손에 든 신문배달 가방을 어깨에 메었다.

그는 계단으로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두호는 잠에서 깨었다.

정호가 누웠던 자리를 한 번 쓸었다.


탁- 탁- 탁- 탁-

정호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렸다.


자산공원과 돌산 사이,

좁은 수평선 아래로 희미한 빛이 오르고 있었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는 발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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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단한 날들의 온기 – 산 37번지] 연재를 다시 이어갑니다.



지나온 시간 속, 마음 깊은 이야기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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