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방의 누나

봄밤, 우물가에서

by 따뜻한시선


“행기야!”


정호는 행기네 마당에 들어섰다.

마당 감나무 잎이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가지 사이로 주황빛 감들이 조용히 매달려 있었다.

처마 아래 그늘진 곳에 갓 캐낸 고구마가 쌓여 있었다.


그는 마루로 가까이 다가섰다.

안방문 한쪽이 열려있었다.

낮인데도 안방은 컴컴했다.


정호는 조심히 고개를 기울여 안을 살폈다.


“행기야….”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마루에 이어진 작은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정호는 마루 디딤돌에 조심히 발을 올렸다.


작은방의 창호문을 안쪽으로 밀었다.

문틀 위와 옆이 먼저 살짝 벌어졌다.

아래쪽은 아직 문을 붙들고 있었다.


끄윽-

터엉-

빡빡하게 끼여있던 아랫부분이 풀리며 문이 떨렸다.

정호는 빠르게 문고리를 꽉 쥐었다.


문틈 사이로 까만 파리가 튀어나왔다.


그는 문을 살며시 열었다.

문 앞에는 파란 플라스틱 소쿠리에 삶은 고구마가 담겨 있었다.


문소리에 놀랐던 파리들이 방안을 어지럽게 돌다 다시 앉았다.


방 가운데에 빨간 담요가 작은 무덤처럼 볼록했다.

담요 끝이 아주 조금 움직였다.

중얼거리는 소리가 점점 또렷해졌다.


“아버지! 엄마한테 왜 그래! 왜! 왜!”

행기 둘째 누나의 목소리였다.










행기네 집 뒷마당에는 창고가 있었다.

청소부였던 행기 아버지는 길거리 청소를 하며

쓸만한 고물들을 가져와 창고에 보관했다.


창고는 정호와 행기의 본부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다

나무칼을 들고

뒷마당과 이어진 밭을 지나

장군산에 오르곤 했다.


그들의 목적지는 항상 장군바위였다.

커다란 바위 위에 오르면

여수 시내가 한눈에 들어왔다.


“라면 먹자.”

정호가 생라면을 바위에 두고 팔꿈치로 으깨었다.

봉지 위를 조심히 뜯어 스프를 꺼내었다.

스프를 뜯어 반만 봉지에 넣었다.

입구를 말아 쥐고 봉지를 흔들었다.


둘은 라면 봉지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다.

볕은 아직 따가운데 바람은 선선했다.


“진서 누나…. 많이 아파?”

정호는 손에 묻은 라면 스프를 문질렀다.


“모르겠어…. 엄마가 신병이라고 하는데.”

행기가 라면 가루를 검지로 모아 찍어 먹었다.


“아! 임춘애 선수가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세 개나 땄데!”

정호가 새끼와 약지를 구부리며 손가락 세 개를 내밀었다.


“맞아. 라면만 먹고 금메달 땄다는데! 너는 뭐 안 따냐? 크크”

행기의 말이 끝나자 그들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렸다.










밤이 깊어지자 봄의 싱그러운 냄새가 돋아났다.

동네 중턱 우물가의 버드나무 연두 잎들이

골목등 불빛에 반짝이며 물결처럼 흔들렸다.

낮은 돌담 뒤로 개나리도 노란 더듬이를 뻗고 있었다.


정호는 우물가 골목등 나무기둥에 등을 기대었다.

골목길 위쪽에서 두 사람이 흐릿하게 내려오고 있었다.

두 사람은 골목등의 주황빛 속으로 들어왔다.


“정호야. 뭐 하니?”

진서는 훌쩍이는 행기의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아버지가 아직 안 와서요.”

정호는 눈물을 훔치는 행기를 보았다.


“음… 그래? 행기야. 정호랑 같이 있자. 여기 앉자.”

진서는 층계에 앉으며 정호에게 손짓했다.


“중기 오빠 내려오면 그때 올라가자.”

진서는 행기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여기 있었네. 엄마는 칠성이 집에 있으라 했어.”

중기가 상기된 얼굴로 다가왔다.


“오빠. 팔 왜 그래? 다쳤어?”

진서가 긁혀 핏자국이 비치는 중기의 팔을 잡았다.


“행기야, 이따 아부지 주무시면 엄마 데리고 들어가.”

중기가 아무렇지 않은 듯 팔을 빼내었다.


“그리고…. 후우.”

중기가 말을 끊고 아랫입술을 깨물며 돌아섰다.


“오빠! 어디가?”

진서는 갑자기 아래로 향하는 중기를 붙잡았다.


“모르겠어. 그냥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아.”

중기가 바닥을 세차게 차며 내려갔다.


중기의 발소리가 골목 아래로 사라졌다.

우물가에는 봄밤 냄새가 가만히 번지고 있었다.








[고단한 날들의 온기 – 산 37번지] 연재를 다시 이어갑니다.



지나온 시간 속, 마음 깊은 이야기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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