껍질을 벗던 날

뚝, 그리고 여름이 시작되었다.

by 따뜻한시선

플라타너스가 싱그러운 잎을 뻗고 있었다.

나무들은 둥근 그림자를 운동장 위에 내려놓았다.


바람이 불어 흙먼지를 부드럽게 일으켰다.

먼지는 운동장 한 편의 씨름장으로 낮게 밀려가

둘레에 쌓인 모래포대에 부딪히며 흩어졌다.

흙먼지 사이로,

씨름장 모래알이 윤슬처럼 반짝였다.


정호는 교실 창가에서 그 빛을 한참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침의 봄햇살이 창으로 비껴 들어왔다.

고등학교 3학년, 반친구들의 떠드는 소리가 둔하게 퍼졌다.


투명한 눈동자에 세상이 볼록하게 맺혀 있었다.

반듯한 콧날 끝, 콧방울은 과육처럼 맑았다.

인중에는 작은 그림자가 고여 있었다.

선명한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정호야, 이 노래 들어봐.”

짝꿍인 우현이가 전람회 카세트테이프를 건네며

이어폰 한쪽을 정호의 귀에 꽂았다.


그들은 교실 뒤편 사물함에 기대어

함께 ‘기억의 습작’을 들었다.


딸깍-

Side A가 끝나고 B가 시작되었다.

정호는 순간 눈을 크게 뜨며 몸을 바로 세웠다.


“갑자기 왜?”

우현이가 이어폰을 빼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아니야… 뭔가, 뚝- 하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아.”

정호는 창밖으로 5월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텅- 텅-

야외 농구 코트의 녹색 바닥은 한여름 열기에 끈적였다.

정호는 여름 방학 동안 주말엔 종종 여수수대 도서관을 찾았다.

공부가 손에 잡히지 않을 때면, 코트로 내려왔다.


범호가 상대와 뒤엉켰다.

순간, 3대 3 농구는 패싸움으로 번졌다.


“지훈아! 하지 마! 범호 내 친구야!”

반대편 코트에 있던 정호가 뛰어들었다.


그는 둘 사이를 억지로 벌려 세웠다.


“범호야! 너도 그만해! 지훈이 내 중학교 친구야.”

범호는 정호를 뿌리치며 다시 달려들려 했다.



턱-

날아온 농구공이 정호의 손에 걸렸다.


누군가 정호에게 들이받듯 달려들었고,

그는 반사적으로 공을 던졌다.


퍽-

공에 맞은 한 남자가 얼굴을 감싸 쥔 채 쓰러졌다.


또 다른 한 명이 낮게 파고들었다.

허리를 잡힌 정호는 다리를 벌려 버티며

상대의 몸을 위에서 눌러 안았다.


“그만해! 정호 내 친구야.”

지훈이 자신의 친구를 붙잡았다.


“야! 너희들 그만해!

도서관에 공부하러 왔으면 공부만 할 것이지.”

제복을 입은 ROTC 두 명이 코트에 들어섰다.


정호는 자신의 손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방금 전까지, 아무 일도 없던 손이었다.








딩- 동- 댕- 동-

4교시 종료음이 울렸다.


“다음 주부터 기말고사야. 알지? 반장!”

영어선생님은 교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인사가 끝나자마자 교실이 들썩였다.

책이 덮히고, 몸이 풀어지고, 도시락이 올라왔다.

몇은 뒷문으로 뛰어갔다.




두 번째 줄인 정호와 우현이 책상으로

영권이와 석환이가 도시락을 들고 왔다.

바로 앞 범호와 승길이는 뒤돌아 앉았다.


“와, 기말이 정말 얼마 안 남았어.”

우현이가 도시락 뚜껑에 밥을 덜었다.


“다음 주면 아직 시간 많아.”

석환이도 뚜껑에 밥을 덜었다.


“너만 많지!”

범호가 석환이의 목을 손날로 가볍게 툭 쳤다.


“야, 사랑을 그대 품 안에 어제 봤냐?”

범호가 뚜껑을 승길이에게 건넸다.


“뭐야? 지도 시간 많네. 차인표 머리 너무 멋지더라.”

승길이가 범호에게 눈을 흘기며 뚜껑을 영권에게 건넸다.


“너도 머리 그렇게 한쪽으로 해봐.”

영권이 뚜껑에 밥을 덜며 승길에게 턱짓을 했다.


“난 얼굴은 되는데, 아쉽게 머리가 커서 안 돼.”

승길이가 아랫입술을 내밀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보기엔 머리는 적당한데, 얼굴이 문제야.”

정호의 말에 모두가 웃음이 터졌다.

승길이도 웃으며 장난스레 정호에게 주먹을 휘저었다.


“오늘도 일용할 양식을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님! 아멘!”

정호는 짧게 고개를 숙였다.








“학생들! 보호자 분들이랑 다 들어오세요.”

사복을 입은 경찰이 조사실 문을 활짝 열었다.


“양쪽 조서 다 읽어보니까, 농구하다가 싸움이 난 거고,

많이 다치지도 않았고, 여수수대도 문제 삼지 않는다고 합니다.

애들도 서로 아는 사이고 하니,

부모님들도 서로 양보하고 마무리하시죠.”


“네, 뭐 그렇게 하시죠.”

지훈이 아버지가 먼저 이야기하자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자 그럼 보호자분이 서약서에 사인하시면 보호자 인계하겠습니다.”

경찰이 서류를 부모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박경사! 정호? 이 친구는 왜 아무도 안 오지?”

사복을 입은 경찰이 다른 경찰에게 물었다.


“네, 경위님, 혼자 산다고 하네요.

그래서 학교 담임에게 연락하였습니다.”

박경사가 정리한 조서를 경위에게 건넸다.


“너는 보니까 싸움 말리다가 괜히 휘말렸네. 맞아?

경위가 조서를 뒤적였다.


“네.”

정호는 선풍기 바람에 펄럭이는 조서를 가만히 보았다.


“보호자 인계 없으면 훈방이 안 돼. 행정이 그래… 에휴.”

경위는 조서를 책상에 툭 던졌다.


벽걸이 선풍기가 목을 꺾을 때마다 뚝- 소리를 내었다.

정호는 그 소리를 피하지 않고 들었다.




선생님은 경위와 경사에게 허리 숙여 인사하였다.


“방학 때에도 내가 그렇게 보고 싶었냐?”

경찰서 정문을 나오자마자 선생님은 정호의 귓불을 당겼다.


“연락할 때가 없었어요….”

정호는 귓불을 만지작거렸다.


“요 앞 유명한 중국집에 짜장면이나 먹으러 가자.”

선생님은 정호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로수 꼭대기가 노을에 붉게 물들고,

참매미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정호는 탁상등의 줄을 당겨 불을 켰다.

천장에 노란 둥근 빛이 그려졌다.

읽던 채로 뒤집어 놓았던 키에르케고르의 책을 폈다.


“죽음에 이르는 병은 절망이다.

절망은, 자기 상실이다.”

정호는 몇 번을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카세트플레이어를 가지고 창가로 갔다.

창문으로 시원한 밤의 바닷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마크노플러의 테이프를 넣고 버튼을 눌렀다.

Going home이 흘러나왔다.


잔잔한 기타가 서서히 고조되었다.

둥- 둥- 둥- 둥-

드럼이 긴장을 쌓아 올렸다.

그리고,

색소폰이 높게 터져 나왔다.


거친 언덕을 넘자

한 번에 열리는 풍경 같았다.



정호는 돌산대교 아래로

멀어지는 여객선을 바라보았다.

노랗게 켜진 창마다

고향을 향하는 사람들의 들뜬 마음이

함께 켜진 것 같았다.





[고단한 날들의 온기 – 산 37번지] 연재를 다시 이어갑니다.



지나온 시간 속, 마음 깊은 이야기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에세이 #가족 #산동네 #90년대 #형제 #여수 #선생님 #친구 #도시락 #따뜻한시선

이전 10화작은 방의 누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