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를 건드리지 않는 법
지직-
여수역 대합실의 스피커가 켜졌다.
씨이잉-
날카로운 쇳소리가 텅 빈 대합실 천정을 울렸다.
“잠시 후, 22시 15분 서울행 마지막 열차의 검표를 시작하겠습니다. 승객 여러분께서는…”
검표원이 개찰구의 쇠파이프 출입구를 열었다.
개찰구 앞에 서 있던 승객이 바닥의 가방을 잡아 들었다.
맨 앞 벤치의 할머니가 무릎 위 음식 가루를 털어내며 일어났다.
중년의 남자가 외투에 팔을 끼우며 기지개를 켰다.
갑작스러운 소란에 갓난아기가 잠에서 깨어 울었다.
젊은 엄마가 아기를 등에 업어 포대기로 감싸며 달랬다.
어린 형제가 소리치며 개찰구로 경쟁하듯 뛰어갔다.
정호는 그들을 조용히 눈으로 좇았다.
긴 나무벤치 등받이에 새겨진 버드나무 심벌을 바라보았다.
집에 있던 동그란 철제 약통에도 같은 나무가 새겨져 있었다.
정호는 갈색 나무벤치 모서리에 양손을 걸치고,
몸을 앞으로 내민 채 허리를 곧게 펴고 앉아 있었다.
“학교는 절대 빠지면 안 돼. 밥 먹고 양치질 꼭 하고.”
두호는 정호의 손을 가만히 잡았다.
“형이 올라가 대학 공부하면서 자리 잡아 놓을게.”
정호는 형을 지그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형도 검정고시 합격했으니 수험생이야.”
두호가 개찰구로 천천히 들어가는 승객들을 바라보았다.
“우리 선의의 경쟁해야지?”
정호는 대답 없이 두호의 강직한 턱 위로 살짝 들어간 보조개를 바라보았다.
1994년 1월, 두호는 스물일곱이 되었고 정호는 열아홉이 되었다.
눈이 풀린 창무는 벽에 기대 놓인 포대 같았다.
“아버지 방에 들어가서 누우세요.”
정호는 부엌방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아부지가 미안흐다…”
정호는 아버지 등을 벽에서 떼어내 외투를 벗겼다.
“너한테도 미안흐다만…
두호한테 젤 미안흐다…
다리를 병신으로 만들어서.”
“제발 술 좀 그만 드세요.
술만 드시면 한 얘기 또 하고…
그리 미안하면 형한테 잘하지 그랬어요.
딴 사람한테 인정 많단 소리 들을 것이 아니라.”
정호는 방문을 세차게 열었다.
“이눔이 이제 좀 컸다고….”
정호는 아버지 겨드랑이에 팔을 끼었다.
“그럼 이제 다 컸죠. 뭐.”
아버지를 들어보려고 했지만 어깨만 살짝 들썩였다.
“느그 형 다리를 볼 때마다 화가 났어…
너무 화가 났어.
내가 두호를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두호에게 화가 난 게 아니었는데…
두호한테 늘 화를 내고 말았어…”
창무는 커다란 주먹으로 자신의 가슴을 쳤다.
“고치려고 팔도를 다녔는데,
오른 다리는 못 살렸네.
내가 그러지만 않았으면…
두호 엄마가 두호 데리고 집만 안 나갔으면
느그 형이 소아마비도 안 걸렸을 텐데….
두호야… 두호야!”
정호는 아버지의 팔을 꽉 잡았다.
정호는 페인트 가게 건너편 보도블록에 앉아 있었다.
도로 입구에 차가 들어설 때마다 눈길을 보냈다.
동그란 헤드라이트를 밝힌 용달차가 입구로 들어섰다.
정호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고개를 내밀었다.
헤드라이트 사이에 ‘노루표페인트’라고 적혀있었다.
정호는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차는 페인트 가게 앞에 멈췄다.
두호가 조수석에서 내리더니 정호에게 손을 흔들었다.
두호는 용달차에서 가게 안으로 페인트통과 도구들을 옮겼다.
오른쪽 다리를 짚을 때마다 몸이 기울었다.
얇은 작업복은 막대에 걸린 천처럼 펄럭였다.
정리를 마친 후, 페인트 가게 사람들과 웃으며 인사를 나누었다.
두호가 활짝 웃으며 정호를 향해 길을 건넜다.
정호는 양쪽을 살피며 형에게 다가갔다.
“토요일인데 친구들이랑 놀지. 왜 왔어?”
두호가 정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품으로 끌었다.
“형이랑 같이 들어가려고요.”
두호에게 알싸한 신나 냄새가 희미하게 풍겼다.
“멀리서 보니까 교복이 양복 같아. 회사원 같아.”
두호는 두른 팔을 풀며 정호를 한 번 눈에 담았다.
“형이랑 요 앞에서 서대회 비빔밥 먹고 가자.”
그들은 손을 잡고 함께 큰길로 나섰다.
가로등이 뿌옇게 노란빛을 비추고 있었다.
공기는 바닷가 습기를 머금어 무거웠다.
형제의 발자국 소리가 엇갈리며 길 위에 남았다.
“두호야, 나는 봉두 작은할아버지 시골집에 들어가서 지내마.
근처 목간판 제작하는 공장에 일자리 있다 하니….
정호하고는 이야기했다.”
두호가 아버지와 정호를 번갈아 보았다.
“지금 허리가 아프신데 어떻게 일을 하신다고요?”
두호는 아버지를 향해 몸을 돌려 앉았다.
“일은 몸 좀 나아지면 하려고…
시골이라 먹을 걱정은 없으니,
들어가서 술, 담배도 다시 좀 끊고….”
아버지는 재떨이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두호야… 어떻게든 공부를 좀 해봐라.
어렵겠지만 똑똑하니까 공무원 시험을 보든지….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아버지는 검지로 방바닥을 천천히 두드렸다.
“형, 더 어렸을 때도 혼자 잘 지냈어요.
신문 배달하면 혼자 충분해요.”
정호는 종포 난간에 기대어 어두운 바다를 내려보았다.
“그래….”
두호는 말없이 벤치에 앉아 정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두호는 일어나 정호에게 다가갔다.
옆에 서서 손바닥을 정호의 등에 가만히 대었다.
“엊그제 목욕탕에서 때 밀어주던
손바닥 했던 등이 이렇게 자랐네.”
두호가 정호의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다섯 살 정도까지 형이랑 아버지랑 같이 갔었는데. 그죠?
목욕 끝나고 요구르트 먹고
집에 와서 낮잠 자고 일어나면
할머니가 콩국수 해주고.”
정호가 바다 건너 먼 곳을 바라보며 옅게 웃었다.
“그랬지. 그런데 가끔 나는 아버지가 미웠어.
아버지는 목욕탕에서 유독 더 냉정했어…
네 등은 밀어주는데, 내 등은 밀어주지 않았지.”
두호는 등을 난간에 기대며 돌아섰다.
“형, 그건 아버지가 형이 싫어서가 아니라
당신 때문에 형이… 형 다리가
그렇게 되었다고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형 다리를 보는 것이, 아버지는 너무 힘들었대요….
하지만 당신의 가슴을 치며 울게 아니라
형의 다리를 부둥켜안고 울었어야죠.
형은 고작 어린아이였는데….”
정호는 난간을 꽉 쥔 채 부르르 떨었다.
“정호야, 나도 알았어.
아버지가 내 다리를 보면 고통스러워했다는 걸.
그래서 오히려 나에게 화를 냈다는 걸.
아버지에게 단 한 번도 말대꾸를 하지 않았어.
손을 들어도 도망가지 않고 견뎠지.
국민학교 때까지는 그냥 화가 났었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그게 나와 아버지를 위해서였어.
아버지가 화를 내는 게 나았어.
그냥 성격이 맞지 않는 아버지와 장남이
계속 부딪히는 것처럼 지내는 게
상처를 건드리지 않는 방법이었어.
내 다리 때문에 누구도 죄책감에 휩싸이는 걸 원치 않았어.
그럼 내가 누군가를 원망하게 될 것 같았으니까.
난 그냥 이렇게 태어난 거지, 누구 때문이 아니야.
그래서 그런 것뿐이었어.”
두호는 조용히 목을 삼켰다.
“어찌되었든 무엇보다
아버지와 먼저 가신 어머니는
너를 나에게 보내준 것 하나만으로도
나에게 고마운 분들이야.”
두호는 난간을 꽉 쥔 정호의 손을 부드럽게 잡았다.
그들은 서로 엇갈려 선 채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밝은 달빛이 바다 위에 길게 내려앉아
그들에게 조용히 닿고 있었다.
위윙-
플랫폼에 매달린 스피커가 짧게 마른 소리를 내었다.
“기차가 곧 출발하겠습니다. 아직 승차하지 않으신….”
“들어가. 추우니까 플랫폼에 서있지 말고 바로 가.”
두호는 정호의 어깨를 두드렸다.
정호는 웃으며 창가에 앉아 있는 형에게 손을 크게 흔들었다.
두호는 어서 가라는 듯 손을 저었다.
정호는 뒤돌아 바로 층계로 올랐다.
그는 손을 꼭 쥐고 두 칸씩 계단을 올랐다.
두호는 멀어져 가는 정호를 눈으로 좇았다.
그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기차가 서서히 움직였다.
두호는 서울행 기차표를 손에 쥐었다.
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를 천천히 꾹 다물었다.
정호는 개찰구 입구에서 멈췄다.
기차가 발을 구르는 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여수역 대합실의 불이 꺼졌다.
구겨진 입장표를 가만히 보았다.
둥근 구멍이 하나 뚫려 있었다.
그는 개찰구를 나왔다.
컴컴한 대합실 마지막 벤치에 앉았다.
조용히 앞 벤치에 엎드려 머리를 기대었다.
멀리서 불규칙한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고단한 날들의 온기 – 산 37번지] 연재를 다시 이어갑니다.
지나온 시간 속, 마음 깊은 이야기들.
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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