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길이 지나간 자리

1995년 봄

by 따뜻한시선



쏴아아-


모래사장을 쓸며 파도가 다가온다.

부드러운 모래를 한 뼘 더 적시고

반대편으로 잔잔하게 사라진다.

남국의 옅은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머리칼 사이로 흩어진다.


이곳은 어디일까?

눈을 뜨고 싶지 않다.

잠에서 깨어났지만 몸은 다시 잠에 들기를 간절히 바란다.


혈관으로 모래알이 흐른다.

근섬유 사이로 혈관은 모래알을 토한다.

온몸의 근육이 모래알에 쓸린 듯 부어오른다.


흰자위의 실핏줄이 부어오르다 모래를 내뱉는다.

눈알과 눈꺼풀의 서걱거림은 끝내 수면욕을 짓누른다.


눈을 뜬다.

나는 바닷가에 누워 있다.

정오의 햇살이 내 얼굴을 내려보고 있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다.

내 몸은 얼굴만 내놓은 채 젖은 모래에 묻혀 있다.

급작스런 한기에 몸을 부르르 떤다.

몸이 차가워져 가는데 얼굴은 뜨거워진다.

얼굴이 뜨거워 흐물흐물 풀린다.

모래알이 박힌 후두근의 고통으로

외마디 신음조차 내지 못한다.



눈을 떴다.

한평 남짓한 천장 모서리가 천천히 눈에 맺혔다.

옅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조심스럽게 열기가 있는 얼굴을 만졌다.

말랑한 돌기들이 만져졌다.


문을 살짝 열어 복도의 불빛으로 눈을 잠시 달랬다.

새벽의 선선한 공기가 얼굴을 식혀주었다.


고시원 책상 위 서랍장 아래 매입등을 켰다.

책상 안쪽에 붙여진 조각거울을 바라보았다.

어젯밤의 불길이 흔적을 남겼다.

얼굴 여기저기에 물집이 올라와 있었다.

밤새 조용히 부풀어 오른 것들이었다.


새벽 4시의 알람은 아직 울리지 않았다








3월 초의 새벽은 아직 겨울에 걸쳐 있었다.

첫 버스를 기다렸다.

가로등은 도로를 따라 매달린 노란 솜사탕 같았다.

‘띠이-‘ 하는 가로등의 정전류 소리만이 도로를 채웠다.


멀리 신호에 걸린 차들이 노란 눈을 뜨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자 어둠 속에서 무리 지어 다가왔다.

도로를 잠시 채웠다 이내 반대로 사라졌다.

다시 정전류 소리만이 흘렀다.


엄지와 검지로 버스 토큰의 구멍을 쥐었다.

느슨히 쥐고 청바지에 토큰을 위아래로 굴렸다.


양재역행 버스가 도착했다.

모자를 더 깊숙이 누르고 버스에 올랐다.



틱-, 스르르- , 텅-

토큰은 아크릴판에 부딪혔고,

경사로를 미끄러져 내리다,

비어 있는 철제 통 안으로 떨어졌다.


뒷 좌석에 앉아 있던 승객 두 명이 앞을 바라보았다.

난 빠르게 버스 기사 뒷좌석에 앉았다.


버스는 노들길로 들어서 한강을 따라 달렸다.

차창 너머로 검은 한강이 흘렀다.

이내 유리 위에 내 얼굴이 떠올랐다.

그림자 같은 얼굴에 작은 빛방울이 흩어져 있었다.

물집 위에 버스 천장의 긴 등이 휘어져 매달려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버스 앞유리를 바라보았다.

앞유리에 비친 뒷좌석 할머니의

숙인 고개가 천천히 흔들리고 있었다.

할머니는 어제 막 파마와 염색을 한 듯했다.

오래 버텨야 할 곱슬은 촘촘했고, 염색은 독하게 까맸다.

어릴 적 할머니의 파마 중화제 냄새가 떠올랐다.


내 할머니…








내 할어머니.


1983년 국민학교 1학년 입학식 전날이었다.

동네 친구들과 산으로 쏘다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

할머니는 얼굴이 하얗게 불어 있었다.


“할머니, 얼굴이 왜 그래?”

나는 걱정보다 약간 겁이 났던 것 같다.


“물이 팔팔 끓는지도 모르고 솥뚜껑을 열었드만,

뜨건 김이 확 들이쳐서 얼굴을 데었네.”

할머니는 별일 아니라는 듯 말씀하셨다.


“목욕 좀 하자.”

할머니는 아궁이 아래 동그란 공기조절판을 돌려 구멍을 모두 막았다.

그리고 멀찌감치 팔을 뻗어 부뚜막 위,

커다란 솥의 뚜껑을 살짝 밀어 열었다.

뜨거운 하얀 김이 천장으로 훅 퍼졌다.


할머니는 커다란 빨간 다라이에 찬물을 먼저 부었다.

솥에서 뜨거운 물을 한 바가지씩 퍼 옮겼다.

다라이 위로 김이 다시 피어올랐다.

할머니는 손을 담가 물 온도를 가늠했다.



“뜨거? 괜찮아?”

할머니는 다라이에 몸을 담근 나에게

바가지로 따뜻한 물을 끼얹었다.


“낼부터 학교 가니까, 이쁘게 하고 가야지.”


할머니는 손으로 내 얼굴을 씻겼다.

귓바퀴와 귓불까지 구석구석 닦았다.

내 볼의 튼살에 할머니의 거친 손마디가 스칠 땐

아프다며 투정을 부리기도 했던 것 같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는 내 등을 때수건으로 밀고,

내가 스스로 씻은 부위까지 다시 한번 문질렀다.

피부가 따끔하게 달아올랐다.


목욕을 마치고 할머니는 내 얼굴과 손의 튼살에

바셀린을 조심히 펴 발라주었다.


“할머니도 얼굴에 바셀린 바르자.”

수증기에 덴 할머니의 얼굴은 조금 붉어졌다.

나는 할머니 얼굴에 바셀린을 곱게 발랐다.


수증기가 가득한 부엌에서

빨간 다라이 속 물이 천천히 식어갔다.

할머니 얼굴의 붉은 기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할머니의 물집은 닷새 되던 날 조용히 꺼졌다.

일주일이 지나자 껍질이 벗겨졌고,

그 아래서 고운 새살이

햇빛을 처음 만난 아이처럼 드러났다.




처럭- 처러러렁-

버스기사가 요금통의 레버를 당기자,

토큰과 동전들이 회수통으로 사라졌다.


반포동을 지나 고속터미널에 이르자 버스는 만원을 이루었다.

뒷 자석의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향하는지 모를 할머니의 오늘 하루는

고단하지 않기를 바랐다.








“곰보 될까봐 걱정했는데, 깨끗이 나을랑갑다.”

인력사무소 사장님이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오늘은 얼굴도 그런디 여기 가서 일하믄 되겄다.

중학교 난방공사 현장인디, 실내공사라 먼지가 덜할 거다.

2호선 한양대역 건너편 무학여중으로 가면 된다.”

사장님은 현장 주소를 적은 메모지를 나에게 건넸다.



일주일이 지나자 가라앉은 물집은

하얗게 말라 붙어 떨어지기 시작했다.


물집이 가득했던 모습보다 한결 나아진 모습이었지만,

여전히 몇몇 사람들은 놀란 눈으로 내 얼굴을 살폈다.

눈이 마주치면 아무 일 아니라는 듯 시선을 돌렸다.


일용직을 마치고 알바를 하는 노량진 닭갈비집으로 향했다.

모자를 눌러쓰고 여중생들과 섞여 교문을 빠져나왔다.


한양대역으로 이어진 육교를 올랐다.

자동차들이 일으킨 바람에

모자가 벗겨질까 챙을 댕겨 고개를 숙였다.


사람이 없는 마지막 승강장으로 향했다.

한 무리의 학생들이 승강장 한켠에 모여있었다.

그들은 검은 학과 잠바를 맞춰 입고 있었다.

오른쪽 가슴에 ‘H’가 두껍게 박혀 있었다.

등에는 ‘HANYANG’이 아치 모양을 그리고 있었고,

그 아래 ‘1995’가 새겨져 있었다.


나는 급한 일이 있듯 그들을 빠르게 지나쳤다.

승강장 끝에서 지하철이 들어오는 방향을 보고 있었지만

내 귀에서는 그들의 활기찬 웃음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전철은 지상역인 한양대에서 왕십리역을 향해 지하로 내려갔다.

나는 마지막 칸의 가장 끝 열차문 앞에 서 있었다.

창밖의 구름 낀 흐린 풍경이 점점 빠르게 지나갔다.

갑자기 바람이 밀려들고 열차문이 거칠게 떨렸다.

잠시 뒤, 창밖이 어둠으로 잠겼다.

열차문 유리에 하얀 껍질이 핀 얼굴이 비쳤다.

입술 옆의 새끼손톱 반만큼 일어난 껍질을 조심히 떼었다.

떼어낸 하얀 껍질을 가만히 보았다.


잡부일은 거의 공치는 날이 없었다.

빠르게 돈을 모을 수 있다는 기대감이 일었다.

매달 고시원비 8만 원을 포함해 생활비는 20만 원 정도면 충분했다.

7월에는 저렴한 종합학원이라도 장기 등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때부터는 닭갈비집 저녁 알바만 해도 생활을 유지하며

재수공부를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전철은 합정역을 지나 지상으로 나와 당산철교에 올랐다.

선유도 공원 너머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붉은 해는 한강을 금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출입문 사이의 고무패킹은 딱 맞물리지 못한 채 약간 틈이 벌어졌다.

손가락에 가만히 쥐고 있던 얇은 껍질을 그 틈으로 내보냈다.


하얀 꽃잎이 빛을 받아 잠시 떠올랐다.


껍질은 철교 아래로 떨어졌을 것이다.


나는 손을 주머니에 넣었다.



불길이 지나간 자리.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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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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