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치를 올리던 날

스무 살의 청사진

by 따뜻한시선



톡톡- 톡- 토옥-

봄비가 조용히 멎었다.


또독또독-

외벽에 매달린 배수관 틈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얇은 플라스틱 지붕이

맑게 울렸다.


노량진 닭갈비 식당의 철판 세척실은

건물 사이의 좁은 틈에 있었다.

양끝에 간이벽을 세워 자투리 공간을 막아 썼다.

한쪽은 각목으로 틀을 짜고 플라스틱 패널을 얹은 세척실이었다.


건물 사이로 구름 걷힌 하늘이 붉어졌다.

낮게 누운 해가 틈 사이로 스며들어

한쪽 벽을 부드럽게 쓸었다.

몇 번이고 벗겨지고 덧발린 하얀 페인트의 마티에르가

봄비에 젖어 은은하게 빛났다.



“오늘도 노가다 다녀온 거야?”

점장님이 식당으로 통하는 비상구 문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얼굴은 괜찮아?”

며칠 전 가스폭발에 덴 내 얼굴을 살폈다.


“네. 점장님.”

작은 폭발에 휘말려 희극배우처럼 그을렸던

그날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멋쩍게 웃었다.


“들어와. 밥 먹자.”

점장님이 문을 더 밀어 열며 턱짓했다.








1995년 3월

겨울방학 동안 이어지던 무학여중 난방설치공사는 거의 막바지에 이르렀다.

개학 이후, 소음과 진동이 심한 배관작업은 주로 야간에 이루어졌다.

낮에는 잔해물을 치우고, 밤작업에서 쓸 자재를 옮기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야간 근무 할 수 있니?”

소장님이 철파이프를 내 어깨에 얹었다.


“저도 하고 싶은데, 저녁에 알바가 있어서요.”

나는 어깨를 들썩여 파이프의 위치를 고쳤다.


“일머리가 있어서 밤에도 일하면 좋을 텐데.”

소장님은 목장갑 낀 손등으로 훤한 정수리를 쓱 문질렀다.


어깨에 맨 강관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출렁이며 쇳소리를 내었다.

수업이 진행되는 교실 복도에 조심히 강관을 내려놓았다.

강관이 아래 쌓인 강관들 사이를 벌리며 바닥에 부딪혔다.


따당-

복도창으로 학생들의 시선이 한 번에 몰렸다.

수업을 진행하는 교사의 목소리가 잠시 끊겼다.

나는 구르는 강관을 잡고 허리를 구부린 채 숨을 죽였다.


탕-

교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교사의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나는 뒷걸음질로 조용히 복도를 벗어났다.



봄이 살짝 걸음을 내민 낮빛은 따뜻했다.

점심을 먹고 외떨어진 스탠드에 누웠다.

콘크리트가 내 등에 은근하게 온기를 내주었다.

목련은 새로 자란 연회색의 가지에

하얀 봉오리가 삶은 달걀처럼 가득 맺혀 있었다.


모자를 벗어 얼굴을 덮고 눈을 감았다.

운동장에 퍼지는 여중생들의 즐거운 목소리가 아련해졌다.


그 소리는 이상하게도

내 중학교 운동장을 떠오르게 했다.


비슷한 봄이었다.








“뭐해? 공부해?”

형태가 축구를 마치고 스탠드로 올라섰다.

그는 3학년 때도 같은 반이었고, 우리는 짝꿍이었다.


나는 축구 골대 뒤편에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형태의 목소리가 닿자 운동장의 소리가 돌아왔다.


성큼성큼 올라오는 형태 너머로 운동장이 보였다.

점심시간 운동장은 여러 팀이 뒤섞인 혼돈이었다.

허옇게 일어나는 흙먼지는 봄빛에 증발하는 수증기 같았다.


“그냥 책 읽고 있어.”

나는 읽던 부위에 검지를 꽂으며 책을 접었다.


“왜 이렇게 심각한 얼굴이야?”

형태는 책을 보자는 듯 손을 내밀었다.


“형태야. 여기 한번 읽어봐.”

나는 책을 펴서 건네며 검지로 한 부분을 가리켰다.


‘폭우가 쏟아지는 밤 동안 불타는 눈을 하고 머리털은 폭풍에 얻어맞아 산발되고 길 가운데의 돌멩이처럼 고립되어 내가 사람들의 거주지 주위를 배회할 때, 나는 굴뚝 안을 채우고 있는 그을음처럼 새까만 벨벳 조각으로 나의 멍든 얼굴을 감싼다. 눈으로 하여금, 절대자가 강력한 증오의 미소를 띠고 내 위에 덮어씌운 추함의 증인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이게 대체 뭔 소리야? 말도로르의 노래?”

형태는 문단을 읽은 후 책을 뒤집어 표지를 보았다.


“그냥 서러운데,

이유 없이 화가 나는 느낌, 안 들어?”

내가 내뱉는 말이 낯설었다.

커다란 철문이 뒤로 쿠웅, 닫혔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너 좀 이상해졌어.

종 쳤다. 들어가자!”








“네가 물어봐!”

“네가 궁금하다며!”

목소리를 낮춘 여중생들의 인기척에 눈을 떴다.


“아저씨. 몇 살이에요?”

스탠드 아래에 네 명의 학생들이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응? 스무 살이야.”

당돌한 질문에 나는 웃음이 나왔다.


“봐! 내가 맞지! 오빠 대학생이에요?”

유독 키가 큰 친구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대학생은 아니고…”

나는 화상으로 껍질이 일어난 얼굴을 손으로 가렸다.


“그럼 재수생이에요?”

친구들은 여전히 웃음을 머금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냥 어른이야.”

철문 닫히는 소리가 또 들리는 듯했다.


“오빠 어른이네요!”

친구들은 서로를 밀치며 즐거워했다.

나도 갑자기 덩달아 웃음이 나왔다.


“오빠 얼굴은 다쳤어요?”

교복치마 안에 체육복을 받쳐 입은 친구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르바이트하다가 화상을 입었어. 거의 다 나았어.”

나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썼다.


점심시간 종료를 알리는 예비종이 울렸다.


“오빠, 이거 드세요.”

키가 큰 친구가 딸기우유를 내밀었다.


“제가 주는 게 아니고, 얘가 주는 거예요.”

내 얼굴을 걱정했던 친구가 얼굴이 붉어졌다.


“안녕히 계세요! 끼야!”

친구들은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갔다.


“오빠 잘 생겼어요!”

그들의 웃음소리가 운동장에 피어났다.








“이거 오늘 연결하고 테스트해 봐야 되는데, 큰 일이네.”

소장님이 컨트롤 패널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제가 한번 해볼까요? 과장님이 좀 알려주셔서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보일러실 책상 위에 놓인 패널 도면의 말린 끝을 조심히 폈다.


중앙통제실의 배선 담당이던 과장님이 갑자기 결근했다.

다음날 원청의 배선공사 점검이 예정되어 있었다.

연락은 닿지 않았고, 소장님은 애를 태우고 있었다.


중학교 기술시간에 전기 이론과 도면을 배웠다.

회로 기호와 스위치, 릴레이의 기본 개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과장님은 전원 연결은 모두 마쳐 둔 상태였다.

단자번호와 전선 색상에 맞추어

스위치와 릴레이, 센서를 하나씩 물렸다.


플라이어로 전선 끝을 구부려 스프링 단자에 꽂았다.

청사진에 따라 제자리를 찾아가는 배선들.

내 삶에도 이런 도면이 있었다면 좋았을까.

청사진은 명확했고 번호는 어긋나지 않았다.

내 회로는 늘 조금 달랐지만

그날만큼은 내가 직접 선을 물리고 있었다.

화상으로 벗겨진 얼굴을 만질 때면

타버린 피복이 떠오르곤 했지만

적어도 이 패널 안에서는

아무것도 합선되지 않았다.


패널의 전선은 어느새 질서정연해 져 있었다.

복잡하던 선들이 색과 번호에 따라 제자리를 찾았다.

나는 잠시 손을 멈추고 그 안을 들여다보았다.


“소장님, 일단 연결은 다 했습니다.”

무거운 것을 운반한 것도 아닌데, 얼굴이 땀으로 젖었다.


“전원 켜고 1동 건물 1층부터 확인해 볼까?”

소장님은 나에게 무전기 하나를 건넸다.


커다란 메인 전원선에 손가락을 올렸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폭탄을 터트리는 것 같았다.

순간 얼굴에 뜨거운 열감이 스쳤다.


터억-

스위치를 올렸다.


딸깍- 딸깍- 딸깍-

릴레이들이 짧은 시간차로 붙는 소리를 냈다.


우우우웅-

커다란 펌프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후우.”

나는 숨을 크게 내쉬었다.

아무런 폭발도 일어나지 않았다.

갑자기 다리가 풀리는 느낌이 들어 책상을 손으로 짚었다.


“1동 1층 3학년 1반부터 밸브확인하겠습니다.”

나는 무전기에 말했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았다.








세척실을 정리하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얼굴에서 얇은 껍질이 모두 벗겨졌다.

오래된 피부를 한 겹 벗겨낸 것 같았다.

거울 속 얼굴은 생각보다 말끔했다.

붉게 달아올랐던 자리는 옅어졌고,

벗겨진 자리는 오히려 하얗게 정리되어 있었다.


전구의 전원 스위치를 내렸다.

투명한 플라스틱 패널 지붕으로 밤하늘이 떠올랐다.

건물 틈 사이로 바람이 고요하게 불어왔다.

목련의 서늘한 향기가 시큼하게 스며들었다.

어딘가에서 펌프 소리가 낮게 울렸다.

나는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고시원으로 향했다.




스위치2.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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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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