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위에 내린 눈

숨이 다시 들어온 날

by 따뜻한시선

슥-

덕트 위로 보온재를 밀어 넣었다.

천장과 덕트 사이로 회색 하늘이 보였다.

그 틈으로 하얀 꽃잎이 날렸다.

4월인데 눈이 내렸다.


비계 작업대에서 내려와 골조 가장자리로 다가갔다.

골조건물 8층에서 서울이 한 번에 열렸다.

함박눈이 고요하게 떨어졌다.


눈은 제 몸을 녹이며

북촌의 낮게 이어진 기와지붕을 어둡게 적셨다.

이내 천천히 마을을 하얗게 덮었다.


바람이 불면 골목의 벚나무들이 꽃잎을 털어냈다.

하얀 지붕 위에 분홍잎이 흩어졌다.

그 너머 북악산은 노랗게 물들어 있었다.


장갑을 벗고 손을 건물 밖으로 뻗었다.

손바닥에 떨어진 눈꽃은 따뜻함에 금세 저버렸다.




턱-

성민 형이 어깨에 들고 온 보온재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형, 잠시 쉬어요. 4월인데 눈이 오네요.”

나는 다시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으잇! 따가워. 와, 높은 데서 보니까 멋지다.”

형은 어깨를 털며 다가와 섰다.


우웅-

바람이 눈발을 밀치며 사방이 트인 골조로 들어왔다.

아직 보온재를 싸지 못한 텅 빈 함석 덕트가

바람에 긁히며 울었다.


우리는 하얗게 덮여가는 세상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콜록.

기침이 한 번 터졌다.








“그렇게 약사먹어라 해도 말 안 듣고, 안에서 기침소리가 계속 들려.”

점장님이 세척실 문을 열고 몸을 반쯤 내밀었다.


“이거 먹어.”

점장님이 조그만 물병약과 약상자를 금속테이블 모서리에 두었다.


“옷 좀 더 따뜻하게 입어. 아직 추워. 으이그.”

얼굴을 약간 찡그리며 눈을 흘겼다.


“넵! 감사합니다!”

나는 목소리를 돋우며 웃어 보였다.


“흐읍… 읍.”

배에 힘을 주며 올라오는 기침을 눌렀다.



쌓여 있는 무쇠철판에 물을 뿌렸다.

온기가 남아 있는 철판에서 천천히 하얀 김이 피어났다.








“정호야, 나머지 도급으로 하자. 일주일치 줄게.”

소장이 덕트를 둘러보며 말했다.


“일주일 더 걸리면 어떡해?”

성민 형이 고개를 갸웃하며 조용히 말했다.


“형, 조금만 서두르면 삼 일이면 돼요.”

나는 형을 보며 씩 웃었다.


“네, 소장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는 소장님을 바라보며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5층 건물을 8층으로 증축하는 공사였다.

6층, 7층, 8층이 골조인 상태에서 덕트가 설치되어 있었다.

나는 천장에 매달린 덕트에 보온재를 덮는 일을 했다.


유리섬유 롤을 잘라 작업대 위에 올라 덕트에 감쌌다.

철사를 둘러 비틀어 묶었다.

이음부는 알루미늄 테이프로 눌러 붙였다.


처음 일을 시작하고 사흘째 되는 날 6층을 모두 끝냈다.

작업은 점점 손에 익어갔고 성민 형과도 호흡이 점점 맞아갔다.

모든 자재도 7층과 8층에 옮겨 놓은 상태였다.

일의 순서는 이미 머릿속에 있었다.


우리는 사흘 동안 거의 쉬지 않았다.

덕트는 하나씩 은색으로 감겨 갔다.




“형. 이게 마지막이야.”

작업대 아래에서 절단한 보온재를 건네는 형에게 말했다.


나는 마지막 보온재를 펼쳐 팔 위로 올렸다.

두터운 노란 보온재에서 미세한 유리 가루들이 떨어졌다.

얼굴과 손등이 따가웠다.

머리를 흔들어 가루를 털어냈지만

땀에 엉겨 붙은 유리 가루는 더 깊이 박혔다.


콜록콜록-

기침이 또 터졌다.

가슴 깊은 곳이 따끔거렸다.


나는 고개를 들어 북악산을 바라보았다.

산은 가슴에 노란 개나리를 두텁게 둘렀고

선홍빛 진달래가 점처럼 번져 있었다.








“이거 같이 먹어.”

여수식당 이모가 구운 고등어를 테이블에 두었다.


“너 볼 때마다 살이 너무 빠져. 잘 좀 먹고 다녀.”

이모는 내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밥맛은 없지만, 잘 먹고 있어요. 으읍.”

올라오는 기침을 눌렀다.


“웁.”

갑자기 구토가 올라왔다.

첫 구토를 겨우 삼킨 채 출입구로 뛰었다.

열쇠를 낚아채어 골목 끝 화장실로 향했다.

다시 구토가 올라와 손으로 입을 막으며 달렸다.


자물쇠를 풀려고 손을 떼자

입에 있는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음식물을 모두 토하고 헛구역질로 노란 점액을 토했다.

복근이 당겨 허리를 펼 수 없었다.

가슴이 짓눌렸다.

눈물과 콧물이 함께 쏟아졌다.

골목 담에 기대 쭈그려 앉았다.


콜록콜록콜록-

기침을 누를 힘이 없었다.


으억-

진득한 핏덩이가 토사물 위로 떨어졌다.








“내과의사 소견대로 폐결핵이에요.”

보건소 의사가 청진기를 가슴에서 떼며 말했다.


“흉막염이 심하네. 여기 하얀 부분 보이죠?”

의사가 폐 엑스레이를 가리켰다.


“폐 아래쪽에 물이 찼어요.”

진단서에 영어로 무언가를 빠르게 적기 시작했다.


“이 지경이 되도록 뭐 했어요?”

의사는 진단서를 간호사 쪽으로 밀었다.


“감기인 줄 알고…. 하”

나도 모르게 짧은 실소가 터졌다.


“일단 6개월 동안 약을 먹을 거예요. 다른 병력 있어요?”

의사가 새로운 차트에 내 이름을 적었다.


“아니요. 병원을 가본 적이 없습니다.”

의사와 간호사가 나를 동시에 쳐다보았다.


“지금까지 병원을 가본 적이 없다고요?”

의사가 다른 종이에 또 무언가를 적었다.


“결핵관리수첩이랑 진단서 들고 연계병원 바로 가세요.”

간호사가 따라오라며 손짓했다.








연계병원 병실은 조용했다.

창밖에서 오후 빛이 희미하게 들어왔다.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았다.

베개를 끌어안고 몸을 앞으로 숙였다.

등이 드러나도록 환자복을 올렸다.


금속 트레이가 옆 탁자 위에 놓였다.

가벼운 쇳소리가 났다.

그 위에 굵고 긴 바늘이 보였다.


간호사가 등을 소독약으로 닦았다.

차가운 액체가 갈비뼈 사이를 따라 흘러내렸다.


“숨 참으세요.”


의사가 등을 짚었다.

잠시 뒤 갈비뼈 사이로 둔한 압력이 밀려 들어왔다.


이를 악물었다.


잠시 뒤

투명한 관 끝에서 노란 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유리병 바닥에 조용히 떨어졌다.


똑- 똑-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숨을 천천히 들이마셨다.


가슴을 짓누르던 무게가 조금씩 풀렸다.


“양이 많아서 며칠 동안 나눠서 흉수를 뽑을 거예요.”

의사가 유리병 속 탁한 노란 물을 들여다보았다.


며칠 동안 병실에 누워 있었다.

기침은 여전히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왔다.


창밖에는 벚꽃이 조용히 흩날리고 있었다.


카프카 『변신·유형지에서』 사이에 결핵관리수첩을 끼워 넣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숨이

조금 깊어졌다.



1995년 나의 스무 살 봄이었다.





벚꽃위에.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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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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