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을 긁어 내린 봄

민법전과 하얀 봉투

by 따뜻한시선

커다란 은행나무 노목 두 그루가

마른 몸을 짙은 녹색 잎으로 덮어 가리고 있었다.

5월의 봄바람이 잎을 빗어 넘길 때마다

오백 년의 시간을 견딘 단단한 피부가 햇살에 드러났다.


나는 명륜당 툇마루에 앉아 고요한 마당을 바라보았다.

은행나무 그늘이 마당을 조용히 쓰다듬고 있었다.

젊은 유생 하나가 도포 자락을 흩날리며 마당을 바쁘게 가로질렀다.

유생의 발자국마다 부드러운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봄볕을 머금은 마당은 따뜻했지만

툇마루의 그늘은 서늘했다.



1995년 5월이었다.

두호 형을 만나러 성균관대학교에 갔다.

형은 스물여섯에 서울로 올라왔다.

한 해 동안 입시공부를 버틴 끝에

성대 법대에 합격했다.



형이 마당 멀리 저편에서 걸어왔다.

나는 형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짧은 오른쪽 다리를 디딜 때마다 몸이 기울었다.

형은 나를 보자 커다란 웃음을 띠며 성큼 걸어왔다.

몸이 약간 기울었지만 걸음은 빠르고 힘찼다.

짙은 눈썹 아래 얇은 쌍꺼풀은 갈색 눈을 더 깊게 만들었다.

미간 사이로 용마루처럼 솟은 콧대에 빛이 길게 맺혔다.

미소로 입을 살짝 다물린 턱은 강직했다.

20년을 보아온 형이지만

가끔 나는 조각상 같은 형의 얼굴을 넋 놓고 보았다.



“정호야! 오래 기다렸어?”

형은 곁에 앉으며 나에게 팔을 둘렀다.


“방금 왔어요.”

나는 형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마당의 빛이 형의 얼굴을 비추었다.


형은 낡은 민법전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있었다.

책에는 형의 이름이 반듯하게 적혀 있었다.

나는 두꺼운 그 책 위에 가만히 손을 올렸다.

서늘하던 가슴이 순간 뜨거워졌다.








“폐병은 못 먹고 못 자서 걸리는 병이야.”

닭갈비집 점장님은 진단서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으휴, 살이 너무 많이 빠지는 것 같더니….”

점장님은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주방장, 삼계탕 하나만 지금 바로 끓여줘.”

그는 냉장실에서 닭을 꺼내 주방으로 건넸다.


“오늘은 삼계탕 먹고 집에 가서 쉬어.”

점장님은 식탁을 가만히 규칙적으로 두들겼다.


“철판 닦는 게 뭐 대단한 일이라고, 퇴원해서 여길 오냐?”

그가 갑자기 진단서를 말아 내 머리를 툭 쳤다.


“테이블 번호 다 알잖아? 내일부터 주문만 받고 계산대 맡아.”

그가 진단서를 나에게 건넸다.








삐삐- 삐삐-

호출기에 여수 국번의 전화번호가 찍혔다.

가슴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고모 저 정호예요.”

딸깍. 동전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빨간 숫자가 100에서 50으로 바뀌었다.


“아이 정호야, 니 영장이 나왔다. 그리고….”

숫자가 0으로 바뀌자 백 원을 주입구에 넣었다.

동전을 쥔 손바닥에 땀이 배었다.


“음…. 니 아버지가 허리를 크게 다쳤다.”

동전이 안으로 또 떨어지며 쇠가 울렸다.


“니들한테 말하지 말랐는데, 에휴.”

나는 동전을 쥔 손을 꽉 쥐었다.


“목발 짚고 다니긴 하는데, 일을 못하니….”

동전을 쌓아 전화기 위에 올렸다.


“동사무소에서 쌀도 나오긴 하는데….”

동전이 또 떨어졌다.


“네 고모, 제가 다음 달에 바로 내려갈게요.”

공중전화부스 구석에 쌓인 바랜 벚꽃 잎을 바라보았다.


“고모, 일단 돈 좀 보내드릴게요.”

난 전화기의 숫자 버튼을 의미 없이 꾹 눌렀다.








“정호야. 밥 먹으러 가자.”

우리는 성균관을 나와

혜화동 뒷골목을 함께 걸었다.


“이모 백반 두 개랑 제육볶음 하나 주세요.”

형이 지내는 고시원 앞에는 학생식당이 있었다.


“이모, 제 동생이에요.”

식당 아주머니가 쟁반을 들고 왔다.


“동생이야? 형제가 둘 다 인물이 훤하네.”

그녀가 반찬을 식탁에 두며 형과 나를 번갈아 보았다.


“제 동생이 훨씬 미남이죠.”

형은 내 등을 툭툭 가볍게 두드렸다.




“너 살이 너무 많이 빠졌다. 얼굴색도 안 좋고.”

형은 제육볶음 접시를 내 앞으로 밀었다.


“괜찮아요. 어제 잠을 못 잤어요.”

갑자기 기침이 올라올 것 같았다.


“오늘 형 고시원에서 자고 갈게요.

내일 현장이 종로라 가까워요.”

제육을 내 밥그릇에 덜고 접시를 다시 식탁 가운데 두었다.


“방 좁은데 안 불편하겠어?”

형은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는 넓은 방이었어요?”

우리는 함께 웃었다.





손목시계의 알람에 눈을 떴다.

옆방에 나란히 걸친 창으로 희미하게 빛이 들어왔다.

참새 몇 마리가 창턱에 앉아 조그맣게 재잘거렸다.

난 조용히 일어나 옷을 갈아입었다.


가방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었다.

봉투 위에 내 이름을 반듯하게 적었다.

가방 안쪽에서 지폐를 더 꺼내 봉투에 밀어 넣었다.

입구를 접어 닫고 책상 서랍에 봉투를 넣었다.


늦게까지 책상불을 밝히고 있던 형은 아직 자고 있었다.

형의 굽은 오른발이 이불 밖으로 비죽 나와 있었다.


나는 이불을 조심히 펴 형의 발을 덮었다.


방문을 닫기 전에 방을 돌아보았다.

책상 위의 법전을 잠시 바라보다 조용히 문을 닫았다.


새벽 공기가 차가웠다.

나는 고시원 계단을 조용히 내려갔다.








“점장님, 영장이 나와서 4월까지만 하고 그만두겠습니다.”

나는 손을 앞으로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입대는 7월 초인데, 고향에 좀 내려가야 할 일이 있어서요.”

점장님을 조심히 올려다보았다.


“정호야…. 지금 그 몸으로 군대를 가겠다고?”

점장님은 의자에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너 다 나을 때까지 잘 먹고 쉬어야 해.

내 아버지가 폐병으로 돌아가셨어.”

그는 내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만두고 집에 내려가라고 하려던 참이었어.”

점장님은 계산대로 향하더니 금전등록기를 거칠게 열었다.


“너 이리 와.

이거 4월 치 채운 거니까 내일부터 나오지 마.

공부고 아르바이트고 다 그만두고 집에 내려가.

입대 연기하고 집에서 해주는 밥 먹으면서 쉬어.

집이 아무리 힘들어도 네가 힘들 땐 기대야지.

그게 가족이지.”


점장님이 하얀 봉투를 나에게 건넸다.








“0624 호출하신 분?”

커피숍 직원이 수화기를 막고 홀을 향해 말했다.


“여보세요? 정호니?”

형의 목소리를 듣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네, 형. 저 지금 서울역이에요. 막차 타고 여수 내려가려고요.”

전화기선을 끌어 약간 안쪽으로 몸을 틀었다.


“아. 영장이 나왔데요. 7월 초 입대인데,

내려가서 아버지랑 지내다 그냥 군대 먼저 다녀올게요.”

나는 이를 꾹 다물었다.


“아니에요! 먹고 자고 입을 걱정이 하나도 없는데, 뭐가 고생이에요! 하하.”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형, 의정부 훈련소니까. 입소전에 들렀다 갈게요.”

형은 말이 없었다.


“형?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로 목젖 삼키는 소리만 들렸다.


“형, 여기 전화 기다리는 사람이 많아서….

내려가서 연락드릴게요.”

나는 쫓기듯 빠르게 말했다.


“응….”

형은 목소리를 눌러 짧게 대답 후 전화를 끊었다.


“띠이—.”

나는 수화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나는 수화기에 입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형. 걱정하지 마세요.

내 세상은 어디를 가더라도

형이 비틀게 걷는 세상보다 나으니까…

난 아무것도 힘들지 않아요.

…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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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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