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으로 가는 마른 봄날

결핵 치료를 시작한 봄, 고향으로 내려가던 길

by 따뜻한시선

찌익-


두터운 비닐 약봉지를 찢었다.


투두둑-


크고 작은 흰 알약들이 손바닥 가득 쏟아졌다.

그 위로 적갈색 캡슐 두 알이 떨어졌다.

보건소 치료실의 냄새가 희미하게 올라왔다.


고시원 휴게실의 형광등 하나가 깜박거렸다.

나는 가만히 알약들을 내려다보았다.


엄지로 큰 알약 네댓 알을 눌러 잡았다.

남은 작은 알약 열 개쯤을 먼저 입에 털어 넣었다.


빠르게 물을 들이켜 삼켰다.

숨을 멈췄다.

오래된 소독약 같은 냄새가 코로 넘어오지 않게.


물을 한 번 더 들이켰다.

입안에 남은 쓴맛을 삼켰다.


하지만 목구멍 안에서

과학실 복도 같은 냄새가 다시 올라왔다.

침을 삼키며 혀뿌리로 목구멍을 눌러 막았다.


남겨둔 큰 알약들을 입에 넣었다.

곧바로 물을 들이켜 함께 삼켰다.

목구멍을 긁으며 천천히 내려갔다.


물을 한 컵 더 들이켰다.


하지만 녹슨 쇳가루 같은 맛이

혀뿌리를 타고 다시 올라왔다.

끝내 삼키지 못한 것처럼.



그치지 않는 누군가의 사나운 기침소리가

고시원 베니어합판을 뚫고 나와 복도를 울렸다.

나도 모르게 입을 틀어막았다.








“숨소리는 이제 괜찮네.

천자로 거의 다 뽑았지만, 물이 조금씩 다시 찰 거예요.”

의사가 청진기를 등에서 뗐다.


“결핵약은 아침 공복에 먹고, 흉수 말리는 약은 저녁에 먹어요.”

의사가 약이 가득한 봉투 두 개를 차례대로 내밀었다.


“2주 뒤에 엑스레이와 가래 검사 있습니다.”

그는 내 결핵관리수첩 두 번째 줄에 날짜를 적었다.

1995년 5월 1일


그리고 그는 검지로 수첩의 주의사항을 가리켰다.

나는 결핵관리수첩을 가만히 보았다.


약은 반드시 규칙적으로 복용할 것.

가족 또는 타인에게 전염시키지 말 것.

가래를 함부로 뱉지 말 것.

술과 담배를 금할 것.

충분한 휴식과 영양 섭취를 할 것.


나는 문장들을 한 줄씩 읽었다.

‘하지 말 것’과 ‘할 것’을 모두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갈비뼈 사이의 바늘구멍들로

바람이 빠져나갔다.








서울역에서 출발한 여수행 막차는

종착역을 앞두고 마래산 해안터널 앞에서 속도를 줄였다.


터널을 지나자 바다 건너 해남반도 끝에서

막 아침해가 떠올랐다.


나는 창밖으로 바다를 붉게 물들인 해를 바라보았다.

연탄공장의 굴뚝들이 지나가며 아침해를 서너 번 갈랐다.



기차는 연탄공장 지대를 지나며

새벽공기를 갈라 판자촌으로 밀어 넣었다.


머리를 붙인 긴 지붕 위의 눅눅한 해무가

아침해에 쫓겨 찬찬히 좁은 골목 통로로 가라앉았다.

햇빛은 통로의 모서리마다 천천히 스며들고 있었다.



‘귀환촌’


일제강점기 강제징용에서 살아 돌아온 사람들의 터였던 곳.

그렇지만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들의 터인 곳.

내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려 했던 곳.


그곳에

내 아버지가 있었다.








“다른 사람에게 전염은 안 될까요?”

나는 등까지 올렸던 상의를 내렸다.


“오늘 가래검사 보니 결핵균은 나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한 달 동안은 어린이나 노약자랑 함께 지내지 마세요.”

의사가 내려간 마스크를 코 위로 고쳐 올려 썼다.


“여수로 간다고 했죠? 6월부터는 여수보건소로 가면 됩니다.

흉수 줄이는 약은 그만 먹을 겁니다. 결핵약은 절대 거르면 안 됩니다.”

그는 결핵관리수첩에 날짜를 적었다.


“약 성실히 먹으면 5개월 뒤에 완치 판정받을 거예요.”

날짜 옆에 조그맣게 붉은 도장을 톡- 찍었다.


“성실히… 하아….”

나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나는 수첩의 비어있는 칸들을 바라보았다.

한 달 간격으로 날짜와 도장을 눈으로 그렸다.

다섯 달을 빨리 감아버리고 싶었다.








통로를 따라 다닥다닥 집들이 붙어 있었다.

집마다 출입문 아래 짧은 하수관이 통로로 혀를 내밀었고,

그것은 노출된 좁고 긴 하수로에 혀끝을 대고 있었다.


통로에는 어젯밤의 비린 설거지물 냄새와

아침의 선뜻한 비누 냄새가 섞여 있었다.


나는 문 앞에 조용히 섰다.

출입문의 나무판자 사이로

새어 나온 전구 빛이

컴컴한 통로 흙바닥에

노란 선을 희미하게 그었다.




“아버지, 저 왔어요.”

나는 출입문을 열고 부엌으로 들어섰다.


“네가 왜 왔니….”

아버지의 목소리가 끝에서 조금 꺼졌다.

눈이 깊게 들어가 있었고, 볼은 안쪽으로 말라붙어 있었다.


갈비뼈 사이의 바늘구멍이 다시 찌릿찌릿했다.

나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코로 숨을 내쉬었다.

아침 일찍 먹은 약의 녹슨 냄새가 올라왔다.


부엌과 붙은 방문 앞엔 목발이 세워져 있었다.

그 옆에는 스테인리스 요강이 좁은 집을 늘려 담고 있었다.

가장자리엔 내 모습이 홀쭉하게 길게 휘어져 비쳤다.


“고모가 전화했냐?”

아버지는 재떨이를 뒤져 담배꽁초를 하나 물었다.


“해준 것도 없는데, 니들 발목까지 붙잡고 싶지 않았는데….”

손에 쥔 담배꽁초 불이 붉게 조용히 떨렸다.


천장에 연기가 천천히 퍼졌다.

요강에 비친 아버지의 모습이 점점 일그러졌다.



귀향.p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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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시선으로 세상을 기록합니다.

매일의 삶, 지나온 기억, 그리고 작고 소중한 온기들.

이야기의 다음 장은 곧 찾아옵니다.”


토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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