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집에 혼자다.
문 열고 들어서는 순간부터 무언가 달라진다.
아무도 "어디 갔다 와?" 묻지 않는 침묵, "뭐 먹을래?"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움.
신발 벗어두고, 문턱을 넘으면서 가방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거실에 서서 숨을 내쉰다.
하루와 밤 사이 어딘가에서, 이 시간이 온전히 내 것이 된다.
급할 게 없다는 게 이렇게 좋은 거였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머리 묶었던 고무줄 풀고, 양말 벗고 맨발로 집안을 돌아다니고.
나만의 작은 의식들로 하루 종일 꽁꽁 싸매고 있던 몸과 마음을 하나씩 풀어낸다.
겉으로 드러나는 나에서 진짜 나로 건너가는 시간.
냉장고 열어서 뭐가 있나 천천히 구경하고, "오늘은 뭐 먹지?" 혼자 중얼거리고, 결국 간단한 걸로 정하고.
라면을 끓여도 좋고, 밥에 김치만 먹어도 좋고, 과일만 먹어도 좋다.
화요일 밤에는 냉장고 앞에서 한참을 서있었다.
별로 배고프지도 않았는데 뭔가 먹고 싶어서 문을 열었다 닫았다를 세 번이나 반복했다.
'나는 지금 배가 고픈 게 아니라 심심한 거야.'
내 마음을 알아챈 내가 뿌듯했다. 냉장고 문을 닫고 창가로 갔다. 밖을 바라보며 차가운 공기를 깊게 들이마셨더니 마음이 시원해졌다.
어제는 샤워를 하다가 물을 너무 뜨겁게 틀었다. 보통이라면 바로 온도를 낮췄을 텐데, 뜨거운 물줄기가 하루 종일 굳어있던 근육을 풀어주는 것 같았다. 멍하니 그렇게 뜨거운 물에 몸을 달구는 시간도 나만의 작은 보상이었다.
낮에는 선명했던 경계가 저녁이 되면 부드럽게 번져간다. 창밖 어스름한 하늘밑에 모든 것의 윤곽이 부드러워지며 나와 함께 쉬어가는 것 같다.
신기한 건 이렇게 혼자 있을 때 오히려 마음이 더 열린다는 것이다.
좋아하는 음악을 틀고, 좋아하는 자세로 앉아있고, 먹고 싶은 것을 먹는다. 누구의 취향도 맞춰줄 필요 없이.
책을 읽다가 좋은 문장을 만나면 소리 내어 읽어보기도 하고, 재미있는 영상을 보며 혼자 박장대소하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고양이 영상을 보다가 너무 웃어서 배가 아플 정도였다.
"아 진짜 내 목소리로 마음껏 크게 웃을 수 있어서 좋다."
낮에는 바쁘게 지나쳤던 좋은 순간들도 저녁에는 하나씩 떠오른다. "오늘 아침에 마신 커피가 정말 맛있었지." "동료가 해준 농담이 참 재미있었어." "점심때 만난 강아지가 너무 귀여웠네."
가끔은 예상치 못한 기억들도 찾아온다. 어렸을 때 엄마가 해주시던 미역국이 그리워지거나, 오래전 친구와 밤새 웃으며 했던 이야기가 떠오르거나, 좋아했던 노래의 가사가 문득 생각나거나.
어떤 날은 내가 이루고 싶은 작은 목표들을 하나씩 떠올리며 "조금씩 해보자" 혼자 다짐하기도 하고, 어떤 날은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떠올리며 "고마웠다" 마음속으로 말하기도 한다.
바쁜 일상에서는 놓쳤던 내 감정의 결들을, 아무렇게나 펼쳐놓고 천천히 들여다볼 수 있다.
가끔 거울을 보며 "오늘도 수고했어"라고 혼자 말하기도 한다. 좀 우스꽝스럽지만, 그 말이 내 귀에 들리는 순간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된다.
오늘 무엇이 나를 기쁘게 했는지, 무엇이 나를 속상하게 했는지, 내일은 무엇을 다르게 해보고 싶은지.
내가 만들어낸 부드러움이 집안을 따뜻하게 채운다.
불을 하나씩 끄고 침대에 누우면서 오늘 하루를 천천히 정리한다. 힘들었던 순간들은 "그래도 잘 버텨냈네"라고 토닥이고, 좋았던 순간들은 "그래 이렇게 좋은 날이 또 올 거야"라고 기대한다.
어둠 속에서 어둠을 통과하며 생각한다.
혼자만의 시간이란 단순히 혼자 있는 게 아니라, 작은 문턱들을 넘는 시간이라는 것을.
바쁜 하루와 조용한 밤 사이의 경계를,
남을 의식하는 나와 진짜 나 사이의 경계를,
어제의 나와 내일의 나 사이의 경계를.
매일 저녁 이 작은 문턱을 넘으며, 나는 조금씩 더 나다워진다.
조용한 자신감 같은 것을 얻는다.
나 혼자서 충분히 그 모든 경계선을 잘 넘어서왔구나라는 위로를 하며.
내일 아침, 그때의 나는 오늘보다 나를 더 잘 알고 조금 더 기대하는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
각자의 저녁, 각자가 건드려야 할 경계선들이 부드러워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