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도 야근이었던 사무실을 나서는데 우산을 챙기지 않은 것을 그제야 기억했다. 돌아가서 가져올 힘도 없었다. 하루 종일 에어컨 바람에 지친 몸과 마음으로는 다시 돌아서기도 싫었다. 그냥 비를 맞기로 했다.
첫 빗방울이 이마에 닿는 순간, 시원했다. 젖은 어깨가 예상과 달리 가벼웠다. 이 무게가 마음에 들었다. 빗물이 옷깃을 타고 흘러내리면서 하루 종일 쌓인 무언가들도 함께 씻겨 내려가는 기분이었다. 무거운 생각들도 빗소리에 묻히면서 드디어 조용해졌다.
바짝 마른 아스팔트에 첫 빗방울이 떨어지자 흙냄새가 코끝까지 올라왔다. 나도 저 땅처럼 메마른 상태였구나 싶었다. 빗방울이 굵어질수록 젖은 흙냄새가 온몸에 스며들었다.
이상하게도 젖은 옷이 불편하지 않았다. 공기 자체가 촉촉해지면서 숨 쉬는 것만으로도 무언가 촉촉한 것을 마시는 기분이었다. 공기에 마른 부분은 없었다. 세상 전체가 하나의 부드러운 숨결 안에 있는 것 같았다.
가로등 불빛이 빗방울에 반사되어 반짝였다. 물감처럼 번진 모습들은 낮에는 못 보던 풍경이었다. 아마 평소에는 우산 속에 갇혀 있어서 못 봤을 것이다.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을 보니 오래된 친구였다.
"지금 뭐 해?"
"걷고 있어."
"비 오는데?"
"응, 그래서 더 좋아."
친구는 잠시 말이 없더니 웃으며 말했다. "너답다."
신호등에서 기다리는 동안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우산을 반쯤 내밀어 주셨다. 고맙다고 인사드렸지만 괜찮다고 했다. 그분도 이해하는 눈빛이었다. 때로는 비를 맞고 싶을 때가 있다는 걸.
통화를 끝내고 보니 비가 그쳤다. 방금까지 회색이었던 하늘에 구름 사이로 햇살이 스며들고 있었다.
길바닥 물웅덩이에 비친 구름이 유난히 선명했다. 실제 하늘의 구름보다 물 속 구름이 더 완전해 보였다.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고요를 잠시나마 담고 있는 웅덩이와, 줄기에 맺힌 물방울을 털어내며 향기를 흔들어대는 들풀들 모두 비로 인해 한껏 충만해진 모습이었다.
지하철 안에서 물기를 털어내며 생각했다. 때로는 하루에 이렇게 많은 이야기들이 찾아올 때가 있다. 마치 세상 전체가 하나의 큰 흐름 속에서 나에게 무언가를 전하려 하는 것 같은 날들. 각각의 순간들이 별개의 일이 아니라 하나의 이야기를 이루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 날들.
집에 도착해서 젖은 옷을 갈아입고 샤워를 하면서 문득 떠올랐다. 어릴 때는 비 오는 날이 그렇게 신났는데, 언제부터 비를 피해야 할 것으로만 생각하게 됐을까. 언제부터 우산 없는 날을 불운으로 여기게 됐을까.
내게 찾아오는 작은 선물들은 미세해서, 마치 비 온 뒤 길 위에 반짝이는 것들이고, 그리운 사람이 딱 맞는 타이밍에 걸어오는 전화이고, 물웅덩이에 완전하게 비친 하늘 같았다. 내가 뒤돌아 알아봐주길 조용한 미소를 머금고 기다리고 있는 느낌이었다.
예상과 다른 길로 흘러가는 하루에도 정교한 리듬이 있다는 걸, 오늘에야 느꼈다. 지나고 보니 하루 전체가 하나의 완성된 문장 같았다. 비가 시작되는 것으로 문장이 열리고, 친구의 전화가 쉼표가 되고, 물웅덩이 속 하늘이 감탄부가 되어, 풀잎의 상쾌한 향기로 마침표를 찍는 문장. 누군가 정성스럽게 써내려간, 의미가 있는 문장 같았다.
가끔은 계획에 없던 일들이 더 소중한 경험을 선사한다. 준비하지 못한 상황에서 오히려 진짜 필요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오늘의 비가 그랬다.
몸은 젖었지만 마음은 마른 스펀지처럼 그 모든 순간을 흡수했다.
우산을 두고 온 오늘, 비가 필요한 순간을 알고 나를 찾아온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