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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 백수, 고군분투의 기록 2년

어쩌다가 마케터 (2)

by 로하

판데믹 속 고군분투의 기록

본업은 아니지만 스스로를 컨설턴트라 부르는 사람들의 도움으로 내 영문 이력서는 꽤나 그럴듯해 보였다. 하지만 지원하려면 매번 이력서를 업데이트해야 했다. 특히, 직무 기술서(job description)에 나오는 키워드를 내 경력에 자연스럽게 녹여내는 작업이 필수였다. 내가 해왔던 일 중 가장 쉽게 연결할 수 있는 분야는 마케팅이었다. 그러나 내가 주로 했던 일은 ‘국제회의 기획’이었기 때문에 오프라인 마케팅이나 필드 마케팅에 가까웠다. 디지털 마케팅이 대세가 된 상황에서 그동안 해온 일과 지원직무의 연결고리를 짜내고 짜며 소설처럼 창작해야 했다.


창작의 시대

코로나 판데믹은 마케팅 부서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예산과 인원이 줄어드는 가운데, 소셜 미디어 콘텐츠 제작자와 광고를 다루는 퍼포먼스 마케터 공고만 간간히 보였다. 그런데 문제는 내 경험이었다. 이전 회사에서는 전문 에이전시와 함께 작업했던 탓에 직접 실행한 경력이 부족했다. 나는 그 한 줄의 실질적인 경험을 만들기 위해 움직였다.

먼저 Udemy 같은 강의 플랫폼에서 소셜 미디어 강의를 들었다. 프리랜서 친구의 소셜 미디어 계정을 자진해서 기획하고 콘텐츠를 제작했다. 콘텐츠 마케터로 지원하기 위해 글쓰기 강의를 듣고 블로그를 만들어 포트폴리오용 포스팅을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온라인 한인 커뮤니티에서 내 글을 싣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퍼포먼스 마케팅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몰랐지만, 부트캠프에서 광고 기초를 배우며 과제를 이어갔다. 그러던 중, 마케팅 직무에 지원하는 것을 아는 독일 친구는 내가 마케터인 줄 알고 새 온라인 사업을 시작하며 한국인을 대상으로 어떻게 마케팅해야 할지 물어왔다. 나는 전략을 설명하며 또 한 줄의 경험을 이력서에 추가했다. 이 모든 과정은 내 이력서 한 줄이라도 지원 직무와 연결 짓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었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회사를 구하던 취업준비생으로 다시 돌아간 것 같았다.


끝이 보인다

JD를 이력서에 녹이고, 경험을 케이스로 만들어 나가자 면접 기회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한국 회사가 아니라 독일 회사였다. 독일 회사에서 연락이 왔을 때, 마치 합격한 것처럼 기뻤다. 끝이 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면접은 쉽지 않았다. 소셜 미디어 성과나 콘텐츠 제작 경험을 묻는 질문에 내가 만든 한 줄의 경험은 면접관을 끄덕끄덕 공감하게 할 만한 탄탄한 이야기가 되지 못했다.

비자 문제는 더 큰 걸림돌이었다. 나는 서른이 훌쩍 넘은 나이에 무작정 독일에 간거라 유학준비비자를 받았는데 이 비자에 대한 회의적인 반응과 질문이 따라왔다. ‘공부 하러 왔는데 왜 직업을 구하게 되었어? 그럼 공부 할 생각은 없는거야?’ ‘이 비자는 변경하기가 어려워.’ ‘일할 수 있는 비자로 바꾸려면 시간 좀 걸리겠는데 요새 판데믹이라 더 걸릴 지도 몰라.’. 몇 번 겪고 나니 회사가 비자에 대해 물으면, 내 자신감이 급격히 낮아졌다. 비자 문제에 대해 더 자세히 물어볼까봐 목소리가 줄어들었다.

그 이후로도 수 번의 면접을 보았지만 면접은 화기애애하게 시작해서 질문은 더 이상 없어서 침묵이 길어지다 어색하게 끝이 났다. 결국 탈락은 이어졌다. 지원한 이력서는 150개가 넘게 쌓였고, 열댓 번의 면접 후기가 남았다.


생존의 방안

1년 동안의 고군분투 속에서 상황은 점점 더 어려워졌다. 통장 잔고는 바닥을 드러냈고, 정신적으로도 완전히 고갈되었다. 자신만만했던 나는 점점 작아졌다. 가끔 남자친구의 친구를 만나게 되면,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냐?”라는 질문을 받을까 두려워 얼른 인사만 하고 자리를 피하곤 했다.

한국의 상황도 전혀 나아지지 않았기에 돌아가서 원래 하던 일을 다시 시작할 수도 없었다. 나는 구직 활동을 이어가는 한편, 프리랜서 플랫폼과 한국어 교육 사이트에 프로필을 등록했다. 독일에 처음 왔을 때 주변 친구들이 파트타임으로 한국어 레슨을 하겠다고 했던 말을 들으며 시간 낭비라고 여겼지만, 1년이 지난 후에야 그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회사를 이직하는 법만 알았지, 회사를 떠나 스스로 살아남는 법은 몰랐던 9년 차 경력자인 나는 이제서야 ‘뭐든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라는 마음으로 모든 프리랜서 플랫폼을 찾아다녔다. 운 좋게도 플랫폼에서 신규 등록자를 우선적으로 노출해주는 덕분에 금세 학생을 만날 수 있었고, 학생들의 리뷰가 또 다른 학생을 유인하는 것 같았다. 수업을 몇 번 하다보니 어떻게 하면 Trial Lesson에서 정규레슨 등록으로 이어지는 지, 학생들이 어떤 부분에서 호응이 높은 지 노하우가 생겼다. 9명의 학생에게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시급은 낮았고 플랫폼이 높은 수수료를 떼어갔기에 큰 돈을 벌 수는 없었지만, 금전적인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었다. 독일에 온 지 어느덧 2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다. 그중 몇 개월은 독일어를 배우며 인생을 즐겼고, 반년은 이력서를 쓰는 데 보냈다. 나머지 반년은 면접 준비와 탈락의 연속으로 지나갔다. 그래도 한국어 레슨은 단순히 돈을 버는 일을 넘어, 내게 안정감을 주었다. 그 시간을 통해 구직의 실패가 주는 부정적 감정에서 잠시 벗어나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새로운 연결

나의 이력서는 왠만한 프리랜서 플랫폼과 링크드인에 업데이트 되어 있었고, 그러던 어느 날, 자신의 구두 브랜드를 한국 소셜 미디어에 노출할 수 있겠냐는 북유럽 구두 브랜드의 연락을 받았다. 몇 일 지나지 않아 한국 약사를 대상으로 영어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호주 간호사가 나를 찾았다. 이번에는 한국과 독일에 새 지사를 설립하려는 회사로부터 링크드인을 통해 메시지를 받았다. 한국어와 독일어를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면접이 진행되었고, 그 동안의 도전과 실패 속에서 나는 내가 무엇을 잘할 수 있고, 무엇이 부족한지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

회사 측은 제안서를 요청했다. 그동안 많은 제안서를 써왔던 경험을 바탕으로, 며칠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들을 중심으로 제안서를 작성했다. 할 수 없는 것들은 과감히 제외했다. 그리고 마침내, 함께 일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리모트로 가능한 일이었으며, 미국 엔지니어링 회사의 한국 지사와 독일 지사의 마케팅 채널을 세팅하는 프로젝트였다.

그렇게 나는 프리랜서 마케터로서 일을 시작했다. 마케팅 분야에서 깊이 있는 전문성을 갖추지는 않았지만, 프로젝트가 주어지면 혼자서도 척척 해낼 수 있는 능력을 인정받아, 곧이어 새롭게 설립된 한국 지사로 합류하라는 제안을 받았다.


돌아보며

처음 독일행 때 다짐했던 독일에서의 취업이라는 목표는 이루지 못했다. 자리 잡고 싶었던 베를린을 떠나야만 했다. 하지만 늘 바랐던 “외국 회사에서 외국어를 쓰며 일하고 싶다”는 꿈은 이루었다.

엔지니어링 업계, 마케팅 직무, 외국인 상사, 재택근무 등 모든 것이 새롭고 낯설었지만, 그 새로움은 곧 성취고 기쁨이기도 했다.

전직에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면, 모두가 능력이 출중한 것 처럼 보인다. 자신이 해온 일과 하고 싶은 일을 마법 자연스럽게 연결하거나, 또는 마법처럼 우연한 기회가 찾아든다. 하지만 내 이야기는 2년 가까운 시간 동안 한국을 떠나 판데믹 속에서 수없이 돌아서 돌아서 만들어진 결과였다.


문득

'만약 판데믹이 오지 않았다면, 나는 독일의 어느 박람회장에서 일하고 있지 않을까?'
'실패만 거듭할 때 한국에 돌아왔다면, 오늘도 야근과 새벽 퇴근을 반복하고 있지는 않을까?'
혹은 '비자 문제에 조금 더 당당했다면, 지금도 여전히 독일에 있지 않을까?'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물음표는 끝없이 이어진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나는 괴로운 탈락과 기다림의 시간을 견뎠고, 그 시간을 헛되이 흘려보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지나고 나면 모두 연결된다

처음에는 의미 없어 보였던 경험들도 시간이 지나면 하나의 점으로 이어진다. 수없이 탈락하며 좌절했던 시간들은 결국 내 강점과 약점을 정확히 인지하고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스스로 기특한 것은 포기 하지 않고 끝없이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섰다는 점이다.

“과거의 경험들이 결국 미래를 만들어 간다”는 말처럼, 내가 지나온 모든 시간은 나를 이 자리로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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