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이 빠른 프리랜서
어쩌다가 마케터 (3)
B2B 마케팅
내가 일하게 된 회사는 미국계 엔지니어링 서비스 회사였다.
다양한 업계에서 특정 기술을 사용한 제품을 출시하기 전, 그 제품이 기술 표준을 잘 준수했는지 시험하고 인증하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또, 시험 서비스를 이용하기 전 회사 내부에서 자체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장비도 판매했다.
(국제회의 기획자였던 내가 이런 엔지니어링 회사로 어떻게 흘러들어가게 되었는지는 https://brunch.co.kr/@claire-another/13에 풀어놓았다.)
나는 이 회사에서 마케팅을 맡았다. 처음엔 프리랜서로 시작했는데, 당시 회사는 미국, 대만, 중국, 일본, 독일에 지사를 두고 있었다. 한국은 시장 규모가 작지만, 대형 전자제품 제조사가 있어 CEO는 몇 년 전부터 한국 지사 설립을 염원해 왔다고 했다.
웹사이트 구축, 그 시작
싱가포르에 본사를 둔 마케팅 헤드와 새로 임명된 한국 지사장과의 두 번째 면접을 마친 후 나는 바로 일을 시작했다. 첫 번째로 맡은 업무는 웹사이트 구축이었다. 기존에는 워드프레스를 사용해 영어 및 중국어 웹사이트를 관리했는데, 내가 합류하기 직전 마케팅 헤드가 새롭게 합류하며 브랜딩 작업과 함께 허브스팟을 도입했다.
당시 영어 웹사이트는 회사 창립 이래 많은 콘텐츠가 축적되어 있었고, 이를 기반으로 대만, 중국, 일본, 독일, 그리고 나를 포함한 각국 마케팅 프리랜서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웹사이트를 번역하고 만들기 시작했다.
손이 빠른 프리랜서
워드프레스를 잠깐 써본 적은 있지만, 허브스팟은 더 간단하고 편리했다. 원하는 항목만 잘 채워 넣으면 SEO에도 유리한 점수를 받을 수 있고 깔끔하게 정리된 페이지가 자동으로 생성됐다. 나는 손이 빠른 편이라 다른 마케터들보다 하루에 두 배가량 더 많은 페이지를 완성할 수 있었다.
한국 지사는 사무실이 없었기 때문에 집에서 근무했다. 보통 오전에는 카페에서 집중해서 몇 시간 일하고 집에 돌아오곤 했다. 오랜만에 큰 돈을 벌며 일을 한다는 것에 감사했고, 매일 나를 찾는 클라이언트가 있다는 것이 반가웠다.
그렇게 한 달 만에 영어 웹사이트 콘텐츠의 50% 이상을 한국어로 번역해냈고, 한국 웹사이트는 가장 먼저 오픈할 수 있었다. 클라이언트였던 마케팅 헤드와 한국 지사장은 크게 만족했다. 그들의 성과이기도 했으니 당연했다. 이후 나는 독일 웹사이트 관리까지 맡게 되었다.
웹사이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 회사가 제공하는 가치를 명확히 보여줄 수 있는 웹사이트 맵이 중요하다. 초반에는 업무를 따라가기도 바빠 그저 웹사이트를 생성해내는 로봇처럼 일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웹사이트의 구조가 보였다. 우리 웹사이트는 관리자급 인사의 가치와 엔지니어들의 관점에서 설계된 것 같았다. 아마도 우리 업계에서 가장 잘 나가는 회사의 구조를 벤치마킹 하며 만들어진 것 같았다. 업계 내 회사들은 대부분 비슷한 구조를 가지긴 했다.
그런데 "우리 고객들이 이 웹사이트에서 원하는 정보를 바로 찾을 수 있을까?" "둘러보다가 찾지 못하고 나가버리진 않을까?"라는 고민도 생겼다. 이 업계 사람이라면 이 구조가 익숙 할 수도 있지만, 나는 이 업계를 아예 모르기 때문에 '왜?''굳이?'라는 의문점이 생겼다.
일본 마케터
같은 시기에 합류한 일본 마케터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다. 의견을 아끼던 나와 달리, 그녀는 의견을 활발히 냈다. 특히, 웹사이트에 대한 다양한 개선점을 제안했지만, 마케팅 헤드는 "지금은 회사의 모든 페이지를 일관성 있게 만드는 브랜딩 작업이 우선"이라며 의견은 이메일로 보내면 검토 후 반영하겠다고 했다.
그녀는 우리처럼 작은 회사에서 의견이 애자일하게 반영되지 않는다면 고객은 계속 불편함을 겪게 될 것이라며 강하게 불만을 표시했다. 마케팅 헤드는 "말을 신중하게 하라"며 반박했다. 둘이 채팅으로 논쟁을 벌이는 것을 보며 나는 일본 마케터가 내가 알고 있던 일본인이라는 고정관념에 어울리지 않게 꽤 대담하고 용기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결국 그 다음 날, 그녀는 퇴사 의사를 밝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