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을 취미로, 다시 직업으로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어린 시절에 나는 화가가 되겠다고 말했었다.
유치원 초등학교 시절엔 누구나 다 간다는 미술학원과 피아노 학원을 다녔었는데 피아노학원 선생님은 30cm 자를 들고 다니며 동그랗게 모아지지 않는 내 손가락을 보며 한숨을 푹푹 쉬고는 30cm 자의 날을 세워 내 손등을 탁탁 치는 게 너무 무서웠고, 미술학원 선생님은 밑그림으로 그려져 있는 선을 따라 색칠하지 못하고 크레파스가 삐져나간 것이 영 거슬리고 짜증 나서 울어버리는 나를 안아주며 잘 달래주어서 그랬을지도 모른다.
초등학교 1학년 자기소개 시간.
각자 장래희망을 그림으로 그려서 친구들 앞에서 발표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의 나는 갈색 베레모를 쓰고 한 손에는 붓을, 한 손에는 물감이 짜인 팔레트를 들고 윙크를 한 내 모습을 그렸다. 화가가 된 내 모습에 너무 만족스러웠던 나는 자신 있게 발표를 했는데 맙소사!
한 반, 대략 30명이 넘는 친구들 중에 화가가 되겠다는 친구들이 20명은 되었다. 서로 누가 더 멋진 화가를 그렸는지 그림을 놓고 비교하고 삐지고 울고 그랬었던 게 기억이 난다.
지금 생각해 보니 어린 시절에 우리는 누구나 예술을 꿈꾸고 창작을 갈망하는 그런 존재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20명의 친구들이 지금 모두 화가가 되었을지, 어렸을 때 한 때의 꿈으로 남았을지는 모르겠지만...
독일에서 살면서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져서 그럴까, 나는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연필을 쥐고, 색연필로 칠하고, 물감냄새를 맡으며 그림을 그리자니 엄마손을 잡고 처음 미술학원에 갔던 그 떨림과 설렘도 기억이 나고, 대학교 시절 내내 작업실에서 맡았던 흙냄새도 그립고, 그림은 취미로만 하겠다고 결심하며 대학 4년 내내 작업해 왔던 모든 작업물들을 버리고 사진도 지워버렸던 기억도 떠올라 두려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자 가장 싫어하는 것.
왜 나는 작업이 그렇게도 좋으면서 아프게도 싫었던 것일까. 누군가 나의 취미를 물어봤을 때 그림 그리기라고 말하는 것이 왜 어려운 걸까.
내가 막연하게만 생각해 왔던 화가라는 직업을 진짜 업으로 삼기 위해 실행에 옮긴 그 순간부터 나의 모든 그림과 작업에는 서사가 필요했고 내 삶의 이야기를 녹여야만 진짜 좋은 작업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물론 그 과정을 통해 많이 성숙해지고 과거의 많은 일들이 작업으로 승화되기도 했지만 그런 만큼 스스로를 더욱 상처 주고 그 상처를 또 헤집고 아프게 만든 것도 사실이었다.
이 과정들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반복될 때,
그러니까 내가 나를 못살게 굴던 시기가 더 강해졌을 때 즈음에 나는 그 모든 것을 그만두고 그냥저냥 살기로 시작했던 것 같다. 그냥 남들처럼 직장에 가고 평범한 보통의 인간으로 살며 바닷속 해파리처럼 조류에 따라 휩쓸려 버리는 그런 삶.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딱히 취미도, 좋아하는 것도, 잘하는 것도 모른 체 살아버렸다.
그런데 독일에 오고 나니 왜 이렇게 독일 사람들은 취미에 집착하는 것일까? 취미를 또 하나의 직업처럼 최선을 다해 해내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아니 나는 그냥 이렇게 흘러가다가 사는 것도 괜찮다고 생각했었는데... 취미를 생각해 내자니 결국 할 수 있는 말이 그림 그리기 밖에 없는데 또 그림을 그리자니 과거의 내 모습이 떠올라서 괴롭고. 그냥 제발 나도 간단해지고 싶고 명료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간절하게 했었다.
그냥 좋건 싫건 뭐든 해보자.
나는 이제 좋아하면서 싫었던 그것을 더 이상 좋은 것과 싫은 것을 구분하지 않고 통합시켜 보기로 결심했다. 일단 독일어 언어 자격증이 없어도 학생을 받아주는 사립학교들을 알아보고 내가 수업을 들을 수 있는 코스가 있는지 물어보고, 그동안 내가 그려왔던 그림들을 모아 나름의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수업 상담을 예약으로 잡고 내 포트폴리오를 아이패드에 담아 들고 독일살이 1년 반 만에 드디어 독일 학교에 첫 발을 내디뎠다. 약 40분가량의 진로 및 수업상담을 받으며 동화책에서 방금 막 걸어 나온 것 같은 할아버지 선생님이 나에게 말했다.
"그래서 당신이 진짜 하고 싶은 게 뭐예요?"
"저는... 그러니까...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어요."
내 입으로 이 말을 뱉어내고 나자 갑자기 내 안에 묘한 활력이 돌면서 기분이 이상해졌다. 맞아. 나 그림을 다시 그리고 싶어 했던 게 맞는구나? 아니 어쩌면 이건 내 일평생 하고 싶었던 일이었을지도 몰라!
그렇게 나는 독일에서 33살에 다시 학생이 되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