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애(narcissism)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모습이 떠오르시나요? 아마 대부분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실 겁니다. 자기애가 강한 사람이라고 하면 이기적인 사람이 먼저 떠오르기 마련이니까요. 마찬가지로 정신의학에서도 자기애적인 성향이 지나치게 강하면 일상생활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보고, 이 경우 자기애적 성격장애의 진단을 고려합니다. 그럼 정신과에서는 자기애적 성격장애를 어떻게 진단할까요? 현재 가장 흔히 쓰이는 진단기준인 DSM-5의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자기애적 성격장애 진단기준, DSM-5>
자신이 대단한 사람이라고 과평가하고, 타인에게 존경을 요구하며, 공감능력이 부족함. 이런 모습들이 청년기부터 시작되어 여러 상황에서 나타남. 앞에서 서술한 전제에 더하여, 다음의 9개 기준 중에 5개 이상을 만족할 시 자기애성 성격장애라고 진단할 수 있음.
1. 자신이 지나치게 중요하고 대단한 사람이라고 느낌.
2. 성공, 권력, 이상적인 사랑과 같은 공상에 몰두함.
3. 자신의 문제는 특별하고 특이해서, 특별히 높은 지위의 사람만이 본인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함.
4. 과도한 존경을 요구함.
5. 특별한 대우를 받기를 원함.
6. 대인관계에서 착취적임.
7. 공감능력이 결여되어 있음.
8. 다른 사람을 자주 부러워하고, 남들이 자신을 시기하고 있다고 믿음.
9. 오만하고 건방진 행동이나 태도를 보임.
흔히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표현할 때의 기준과 자기애적 성격장애의 진단기준을 비교해 보면 상당히 닮았죠?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도 자기애를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성향이라고 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초기의 정신분석 이론들에서는 자기애의 부정적 측면이 강조되었습니다. 그랬던 시대에서, 반대로 자기애의 긍정적인 측면을 들여다보았던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자기심리학(self psychology)의 창시자인 하인츠 코헛(Heinz kohut)이라는 사람입니다.
코헛이 이야기하는 자기애란 '스스로를 응축된 자기(cohesive self)로 경험하고 싶은 욕구'입니다. 응축되었다는 것은 안정적으로 결합된 상태를 의미합니다. 바꿔 말하면 충격에도 잘 손상되지 않는다는 뜻이지요. 그렇다면 자기(self)는 뭘까요? 코헛이 얘기하는 자기는 주도권의 중심이자, 느낌의 수용처이자, 개인의 야망, 이상, 재능, 기술의 자리라고 합니다. 도대체 무슨 소리일까요. 그만큼 자기는 상당히 난해하고 복합적인 개념입니다. 이해하기 편하시도록 정리해 본 응축된 자기의 뜻은 다음과 같습니다.
외부의 어려움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고 다음과 같은 삶의 요소들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응축된 자기를 가졌다고 볼 수 있다.
1. 자기 주도적 삶.
2. 안정적인 느낌을 유지하는 삶.
3. 야망, 이상과 같은 꿈을 가지고 나아가는 삶.
4. 본인이 가진 재능을 충분히 발휘하는 삶.
응축된 자기를 이처럼 정의 내려본다면, 결국 자기애는 자기 주도적으로 꿈을 향해 나아가고 싶은 욕구라고 정리해 볼 수 있겠습니다. 바로 이 부분에서, 코헛이 이야기한 자기애의 긍정적 측면이 드러납니다. 건강한 수준의 자기애는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욕망이자 원동력이 되거든요. 그래서인지 의외로 과도한 자기애적 경향을 보이는 사람들 중에서도 성공한 사람들이 꽤 많습니다.
결국 죄는 자기애 자체가 아니라, 건강하지 못한 자기애에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자기애가 건강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를 위해서는 코헛이 이야기하는 정상적인 발달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개인의 발달은 시작됩니다. 갓 태어난 아이는 배고프면 울음을 터뜨립니다. 아이의 울음을 들은 엄마는 아이에게 밥을 줍니다. 엄마의 입장에서는 우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스스로 못하는 아이를 보살펴준 것이죠. 하지만 아이의 입장은 다릅니다. 이때의 아이는 엄마가 자신의 일부처럼 느껴집니다. 우리가 배고프면 손을 뻗어 음식을 먹을 수 있듯이, 아이는 배고플 때 울면 엄마가 기꺼이 수족이 되어 음식을 먹여줍니다. 그래서 공감적 반응을 해주는 부모의 아이들은 매우 행복한 착각을 합니다. 현실은 엄마가 없으면 생존조차 어려운 상태이지만, 이 아이는 세상에서 자신이 못할 건 없다는 전능감(omnipotence)에 빠져있습니다
자신의 세계에서 마치 신처럼 전능했던 아이는 성장해 가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젠 아이가 운다고 부모가 무작정 밥을 주지 않습니다. 아침, 점심, 저녁처럼 다 같이 식사를 할 때가 되어야 부모님이 밥을 차려주지요. 이처럼 아이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세상을 살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더 이상 자신이 전능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행복했던 착각에서 벗어납니다. 이는 정상적인 발달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이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보자면 신과 같았던 자신이 평범한 일반인으로 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래서 정신분석에서는 이때 인생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거대한 좌절감이 찾아온다고 봅니다.
이제 아이는 좌절감을 줄이기 위해 부모를 전능하며 이상적인 대상으로 여기고, 그 부모를 자신의 일부로 느끼려 합니다. 정신분석에서는 전자의 과정을 이상화(idealization)라고 하고, 후자의 과정을 내면화(internalization)라고 합니다. 어떻게 아이들은 이런 과정들을 통해 좌절감을 줄일 수 있는 걸까요? 어린아이들이 서로 말다툼할 때, 어느 쪽의 부모님이 더 대단한 사람인지 비교하며 싸우는 것을 본 적 있으실 겁니다. 이때 논리적으로 따졌을 때는 불리했을 아이가, 상대 아이보다 더 대단한 부모님을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며 말다툼에서 이기는 경우도 있지요. 싸우는 사람들은 아이들인데 막상 싸움의 결과는 어느 부모님이 더 강한지에 달려있는 셈입니다. 이처럼 아이들은 해결해 내기 어려운 상황이 오면 강한 부모님에게 의지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현실의 부모는 슈퍼맨이 아니고, 또한 늘 아이 곁에 있어줄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아이는 부모를 누구보다 이상적으로 강한 사람으로 만들고(이상화), 항시 의지할 수 있도록 부모를 자신의 마음속으로 데리고 옵니다(내면화).
이렇게 태어나서 전능감을 가져보고, 성장하며 좌절감도 겪어봐야 정상적인 자기의 발달이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코헛은 최적의 좌절(optimal frustration)이 정상적인 발달을 위해 필요하다고 말했습니다. 최적의 좌절이란 쉽게 말해 아이가 견딜만한 수준의 좌절입니다. 혹시 아래와 같은 말을 들어보신 적 있으신가요?
나를 죽이지 못하는 고통은, 나를 더 강하게 해 줄 뿐이다.
철학자 니체가 했던 말인데요, 이 문구가 코헛이 최적의 좌절을 통해서 표현하고 싶었던 점과 상당히 비슷합니다. 최적의 좌절은 앞으로 아이의 인생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좌절에 대한 내성을 성장시킵니다. 과도하게 많거나 부족한 좌절만 겪게 된다면 어떨까요.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의 좌절을 겪는 경우에는 자기(self)가 죽어버립니다. 이미 상처가 많은 삶을 살았는데 더 이상의 좌절은 버틸 수가 없겠지요. 반대로 최적의 좌절조차 겪어보지 못한 사람은 좌절을 이겨내 본 적이 없기에 조그마한 좌절에도 크게 취약해집니다. 이처럼 최적의 좌절을 겪지 못할 경우, 그 사람은 자기의 발달이 멈출 가능성이 높습니다. 자존감에 조그마한 스크래치라도 나는 날에는 폭발적으로 분노합니다. 그래서 미성숙한 자기를 가진 사람은 평소에도 자존감에 상처가 날까 전전 긍긍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발표할 때처럼 남들에게 자신이 평가받는 경우에 더욱 불안해할 가능성이 높아요. 그래서 어렸을 때 최적의 좌절을 겪는 것은 아이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것은 도널드 위니컷이 이야기한 적당히 좋은 엄마의 개념과도 일치하는데요, 다음에 한번 다뤄보도록 하겠습니다.
과도한 자기애를 가진 사람들도 겉보기엔 성공적이고 화려한 삶을 살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속은 공허하고 취약합니다. 수많은 성공을 해냈어도 한 번의 실패를 겪으면 모든 인생이 실패했다고 느껴요. 그래서 실패하지 않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이기적으로 행동합니다. 심지어 이런 행동들 때문에 그들의 곁에는 진심으로 사랑이나 우정을 나눌 사람이 없거나 매우 적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렇잖아도 공허한 삶인데 더 인생이 공허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더욱 사회적인 성공에 매달리지만, 이 방법도 한계가 있습니다. 정말 만약에 늘 성공만 하는 인생을 살아가더라도 결국 사회에서의 은퇴를 준비해야 되는 나이가 되는 순간이 오기 마련입니다. 이때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사회적인 성공을 내려놓으면서 급격히 우울해지는 노년기를 겪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정상적인 자기애를 가진 사람은 이미 최적의 좌절들을 겪어봤기 때문에, 조그마한 상처는 조그맣게 받아들이며 크게 힘들어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사람들로부터 인정받지 못해도 크게 좌절하지 않고, 사람들을 대할 때도 마음의 여유가 있습니다. 이미 내면에 튼튼한 자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외부에서 자기를 공격하는 일이 있어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래서 코헛이 말한 건강한 자기애는 다음과 같이 정리해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건강한 자기애 = 자기(self)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서 찾고, 좌절을 겪어도 지나치게 힘들어하지 않고 잘 이겨낼 수 있는 것
우리는 좌절이 많을 때만 심리적으로 어려움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자기심리학에서 말하는 좌절은 다릅니다. 상처받지 않는, 좌절이 없는 삶도 건강한 삶이 아닙니다. 오히려 적당한 좌절이 건강한 삶을 위한 필수요소라고 하지요. 그래서 자기심리학은 과거나 현재의 상처가 있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위로를 건넵니다. 자기심리학, 매력 있는 학문이지 않나요?
좌절로 지금이 괴롭더라도 견뎌낼 수 있다면, 이번 좌절은 최적의 좌절이 될 것입니다.
이번 일을 통해 성장한다면 다음번에는 덜 힘들 수 있을 거예요.
혹시나 혼자서 힘들다면 우리 함께 이겨내 보는 건 어떨까요.
이번에는 함께해도 나중에는 당신 혼자서 이겨낼 수 있을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