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가이버를 동경했던 소녀는

만능의 어른에게

by 섬섬

물건을 잘 고치거나 재능이 많은 사람을 우리는 종종 '맥가이버'라고 부르곤 한다.

'맥가이버'라는 단어는 다기능 칼을 지칭하기도 하지만, 사실 이는 1980년대 미국에서 방영된 인기 드라마의 주인공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어쩌면 한국에서 이 드라마가 미국보다 더 큰 인기를 끌었을지도 모른다.

미국의 비밀 첩보단체 피닉스의 요원인 맥가이버는 특정한 거처 없이 다양한 지역을 이동하며 살아간다. 어느 날은 깊은 숲속에서 캠핑을 하며, 맥가이버 칼로 베이키드빈스 캔을 따서 끓여 먹고, 또 어느 날은 해변가의 작은 오두막에서 바다를 바라보며 지낸다. 그는 갑작스레 비밀 임무를 지령받고 수행하는 것이 주된 임무였다. 현실에 존재하는 인물이었다면, 외로움을 친구 삼고 웬만한 일에는 놀라지 않는 냉철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린이의 눈에 비친 맥가이버는 언제나 위기에 처하면 뛰어난 명석함으로 해결책을 찾아내고, 어떤 환경에서도 능숙하게 적응하는 멋진 영웅이었다. 그 모습은 어린 마음에 강한 동경을 불러일으켰다.

1980년대는 미국을 동경하던 시대였다. '미국'이라는 이름조차 아름다운 한자로 美國(아름다운 나라)로 표기했고, 마이클 잭슨을 비롯한 A-ha, Wham 같은 팝 그룹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이었다. NBA에서는 마이클 조던과 매직 존슨이 활약했고, 심지어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도 배우 출신이었다. 미국은 자유롭고 멋진 나라처럼 보였다. 경제 부흥기의 미국은 아시아 사람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시절, 드라마 '맥가이버'는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MBC에서 방영되었다. 당시에는 토요일에도 학교와 직장을 가야 했기에, 수업이 끝나는 12시가 되면 신발 가방을 흔들며 서둘러 집으로 돌아와 맥가이버를 시청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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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였던 나는, 악의 세력과 싸우는 금발의 외국인 맥가이버를 동경했지만, 단순히 그가 멋져서가 아니었다. 학교와 집밖에 모르던 내 작은 세계를 확장시켜 줄 존재, 불확실한 미래에서 나를 구해줄 어떤 희망 같은 존재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소련(현 러시아)의 세력과 대립하는 이야기를 다룬다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내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그가 사는 나라의 태양빛이었다. 그 빛은 한국과 다르게 보였다. 더 따뜻하고, 더 반짝거렸다. 기술적인 효과였을 수도 있지만, 나는 그 햇빛 아래를 걸어가고 싶었다. 해변가에서 해먹에 누워 있는 맥가이버, 노을이 타오르는 도로 위를 차를 몰고 떠나는 그의 모습이 마냥 부러웠다.

그때 나는 사랑도, 육체적인 관계도 몰랐다. 막연한 상상 속에서조차 맥가이버를 연애의 대상으로 삼지 않았다. 그를 향한 감정은 팬심도, 사랑도 아니었다. 오히려 보호받고 싶다는, 이해받고 싶다는 순수한 바람에 가까웠다.

나는 말수가 적었고, 친구를 사귀는 방법을 몰랐다. 고무줄놀이를 하는 아이들을 멀리서 지켜보기만 했다. 어른들은 내성적인 성격 때문이라고 했지만, 사실 나는 외로웠다. 무인도에 갇힌 '캐스트 어웨이'의 톰 행크스처럼, 사물에 이름을 붙여 친구로 삼을 정도로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었다. 하루하루 책을 읽으며 누군가 먼저 다가와 주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당시에는 딸보다 아들을 더 중시하는 분위기였고, 나는 어쩌면 내가 못난 아이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사업 실패로 인해 가정에 무관심했고, 어머니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보험회사에 다녔다. 나는 엄마의 짐을 덜어주려 노력했지만, 엄마는 어디를 가든 아들 걱정을 했다. 가게에서 오픈 기념품을 받을 때도, 내 것이 아닌 오빠가 쓸 물건을 받아왔다. 세상에 나를 완전히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던 외로움은, 마흔이 넘은 지금도 내 안에 남아 있다. 세월이 흐른 지금은 그 외로움을 친구 삼아 살아갈 뿐이다.

어른이 되어 부모님의 사정을 이해하게 되었고, 어린 시절 섭섭했던 기억에 대한 사과도 받았지만, 어린 마음의 상처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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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나는 어떤 어른이든 좋으니, 혼자서도 잘 살아가고, 어떤 위기에서도 살아남는 맥가이버 같은 사람이 나를 보호해 주기를 바랐다. 나는 맥가이버처럼 될 수 없었지만, 그가 나를 지켜주는 존재였으면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 마음은 너무나도 순수하고 간절했다.

마흔을 넘긴 어느 날, 따뜻한 햇살 아래 운전하다가 문득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그때 동경했던 햇살이 내 피부를 비추고 있었고, 문득 맥가이버와 함께 그 햇살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그런데도 아이러니하게도, 그렇게 오랫동안 동경했던 맥가이버가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아직도 그 햇살을 찾아 헤매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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