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백년해로외전_박민정
영화나 드라마 시장에서 흥행에 성공하는 스토리는 아무래도
SF 또는 액션 스릴러가 많겠지만
의외로 많이 접하는 내용은 가족 간의 사랑과 갈등을 다루는
드라마장르도 꽤 많다.
주인공과 왕래 없던 친척의 유산 때문에 귀향했다
벌어지는 에피소드나
갑자기 어린아이를 떠맡게 된 고집불통의 노인이나
조폭을 개과천선 하게 만드는 감동 스토리,
서로를 극혐 하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같이 살게 되면서 산전수전을 겪다가
핏줄이 아니어도 서로 가족의 테두리가 되어
살아가게 되는 휴먼드라마 같은 이야기들.
그런 스토리를 볼 때마다 가족이라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휘둘리는 주인공을 보며
냉정하게 상대를 내치지 못하고 더 나은 본인의 삶을 위해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참 못마땅하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일할 때 걸려오는 부모님의 전화를 외면하다가 잠시 후 복도로 뛰쳐나가서
다시 콜백을 하며 안부를 묻는 나 같은 사람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가족은 매일 사랑하지만 표현하긴 부끄럽고,
서로를 잘 알기에 고통이 엮어져 있는 굵은 동아줄 같다.
‘백년해로외전’이라는 제목은 어느 노인들의 봄처럼 달달하고 지고지순한 사랑이야기련가
상상하게 했었다.
제목에 대한 힌트는 결말을 향해가면서 알게 된다.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은 가족이라는 동아줄에 얽히고 설킨 채, 긴 세월 동안 끊임없이 엮어져 있다.
책표지에 실린 능소화를 보면 유독
주택가의 담벼락을 타고 넘어와 골목에 치렁거리며 늘어져 있는 모습을 자주 보게 되는데,
쨍한 주황색이 여름이라는 청명한 색깔에 포근하게 녹아있오 계절과 참 잘 어울린다.
그렇지만 쉽게 피는 꽃은 없듯이 습하고 더운 한여름에 만개를 하는 꽃이 능소화다.
주인공 주현이는 어린 시절 부자인 큰아버지 집에
잠시 얹혀살며 그 집안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감당하며 살아야 했다.
가족 간의 균열 씨앗은 큰아버지가 재혼을 하기 전 딸들을 해외입양 보내버린 시점부터 보인다.
모든 가족들은 그 과정을 목격했고, 어긋난 유교사상과 남존여비가 버무려진 시대였으므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듯했지만, 가족이라는 테두리에 있어도 버림받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눈치를 챈 이상
그들은 편히 살 수 없었다.
그 기억들은 주현의 일상에서 피어났고,
결핍된 에너지를 충족시키듯 작가가 되어
가족의 이야기를 소설책으로 내게 되었다.
소설의 내용은 일가친척을 뒤집어엎을 정도로
파문을 일으켰지만, 거짓은 아니므로
나중에는 서로에게 다른 진실을 듣고
이해를 하게 되는 계기가 되어버린다.
가족이든 아니든 간에 서로의 집단에 속하게 되면 모르고 싶은 진실도 받아들이는 과정이 있어야
결속을 가지게 되는 것이 인간의 특징인지,
아니면 한국의 특징인지 의문이 들지만 말이다.
우리는 가끔 소설을 읽으면 주인공은 무조건 선하거나 도덕적인 사람일 것이라 암묵적인 정의를
내리게 되는데 성인이 된 주현이는 그렇지 않다.
학생들에게 상처를 주는 교수이면서
사회생활과 부부관계에서 갈등을 겪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 주변의 어른들은 성인이라는 타이틀을 얻은 어린이라는 걸 어른이 된 후에야 알았듯이,
독자들은 불완전한 그녀와 주변의 가족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가족 구성원들의 이야기는 한두 줄의 문장처럼 쉽게 끝나는 이야기는 아니다.
가족들 사이에서 갑과 을의 위치를 깨닫고 행동하는 어린아이 예리는 어른이 되어서도 변함이 없었고,
여전히 인간관계에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미혼모인 엄마와 큰집에 얹혀살면서 정서적인 학대를 참아내다 탈출하여 변호사가 된 소연언니는
자신 때문에 고통을 감내했던 엄마와의 미래만 생각하며 살아간다.
부잣집 장손으로 태어나 혜택을 많이 받고 자랐을 것 같은 장훈은
재혼가정의 자식으로 자라며 상처를 받았었고, 누나들이 해외로 입양 갔던 사건 때문에
소심한 영혼으로 살다가 자신을 영혼을 보호해 줄
강인한 외국여성과 국제결혼을 한다.
재혼에 방해가 두 딸을 해외로 입양을 보냈던 큰아버지는 아들이 외국인과 결혼하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모순에 시달릴 것 같았겠다.
친자식은 해외로 보내고 아들을 위해 며느리는 매매혼으로 데려왔을까 오해를 살까 봐 인지 주변 사람들에게 아들은 연애결혼임을 강조하며 사람들에게 며느리의 집안과 학력을 계속 어필하고 있다.
돈과 학력으로 포장하려 했던 것들은 모두 불완전한 인간을 드러나게 할 뿐이다.
장훈의 딸인 조카 수진이는 주현에게 살갑지는 않지만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가족 내의 어른들과 교류를 한다.
서로를 보면 아프고 외면하고 싶은 어른들 사이에서 색안경을 끼지 않은 수진의 모습은
주현이 과거로 가서 접하고 싶은 본인이 바랬던 유년시절의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해외로 입양 갔던 첫째 야엘은 그녀 혼돈스러운 유년시절을 보냈지만 양부모 사랑으로 자라서
의사가 되었고 자신의 뿌리를 찾는 과정에서도 강인하다. 찾을 수 없는 둘째는 아마 자신만의 인생을 만들어가며 꽃을 피우려 노력하겠지.
소설이 끝나도 끝나지 않은 것 같은 건 찾지 못한 둘째의 존재 때문인가 보다.
가족 모두는 능소화처럼 마당 모서리에서 피어나 자라나 담벼락에서 피어나려고 했고,
골목을 넘어서서 어느 곳에서도 발을 디디지 못하고 방황하고 있다.
계절을 인내하고 피어난 꽃처럼 어른처럼 자랐지만,
결국 큰 집에서 벌어졌던 일들과 주변인들에게 벗어나지 못하고 그 이후의 인연에게도 영향을 미치며 아직까지 괴로워하며 살고 있다.
서로 그것을 지각하고 있든 못하고 있든 간에 말이다.
그런데 왜 ‘백로해로외전’일까?
이 가족의 이야기는 사실 징용으로 끌려간 할아버지를기다리던 할머니의 사랑에서부터 시작되었던 것이다.
백년해로를 기약한 과거의 조부모의 이야기가 아름다워야 하지만 인간의 일생이 착했다, 행복했다, 괴로웠다 등의 동사와 형용사로 간단히 표현할 수 있을까?
백년해로를 꿈꿔서 아름다웠지만 한국의 사회적 배경은 굶주렸고 그래서 한때 사람들은 이기적이었고 자식문제에 있어서는 손녀를 해외로 보내버릴 만큼 잔인할 수 있었다.
양면에 양면을 거듭하는 얼굴로 살아가는 세상이었을 것이다.
할머니 후손들의 갈등은 할머니와 다른 갈등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급격한 사회의 변화에 움직이는 사람들의 상처 난 삶이라는 것에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또 다른 백년해로외전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핏줄들이 겪어버린 서로의 다른 삶을 애써 이해하고
해석하며 사는 모습은 아득한 불빛을 보며 미래를 향해가는 우리의 모습처럼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