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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ax Apr 08. 2020

두 번째 산티아고 - 여유를 허락하니, 사람을 찾더라

성진, 재성씨 이야기

파리에서 생장 갈 때 저기로 GARE, 몽파르나스 역으로.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고, 어젯밤 미리 싸 둔 짐을 싸고 숙소를 나온다. 파리의 이른 아침은 전 날의 낭만 있는 밤의 도시와는 다르게 창백한 느낌이었다. 아마 어젯밤의 파리가 너무 낭만낭만해서 그런 것 같다. 거의 도시에 취해 저녁 12시까지 걸어서 돌아다녀서 그런가. 


 순례길로 출발하는 발걸음, 오랜만에 느껴보는 설렘이었다. 순례길 가려고 퇴사했다고 해도 무방할 만큼 기대되는 순간이니까. 


 알랭 드 보통은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에서 말했다. 이동하는 순간에 가장 행복하다고. 그 순간에 본인이 행복할 수 있는 상상을 하는 시간이라고. 그리고 여행지에 도착하는 순간, 상상의 열차에서 현실의 땅으로 자리를 옮기는 순간, 그 행복은 무너진다고. (적어도 나에겐 맞는 이야기였는데, 상상의 열차에서 이렇게 빨리 내릴 줄은 몰랐지)


 이동수단을 좋아하는 또 다른 이유는, 뭔가 아늑하다. 그 시간이 여행 떠나는 시간에서 가장 여유롭다. 내가 어딘가를 가기로 정해져 있는 상태이고, 그곳을 꼭 가야만 하는 지점에 도착하기까지 나에게 주어진 그 시간은 너무 평온하고 행복하다. 뭔가 다른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고, 그 안에서 내가 즐기고 싶은 것들을 즐길 수 있으니까. 마치 내가 하고 싶은 것을 내가 정확히 알고 있고, 그것이 즐거우며, 그런 삶을 살아가다가 만나는 취미 같은 시간이랄까. (진짜 삶은 아직 그러지 못해서 슬프다)


좌측은 편의점에서 산 샌드위치와 에뷔앙. 샌드위치 구성은 햄과 치즈뿐인데 생각보다 맛있었다. 우측은 TGV 1등석 자리. 왼쪽 1인석이 내자리였다.


 그래서 산티아고에 도착할 때까지는 편하게 가고 싶었고, 출발 3개월 전에 미리 약 50유로로 TGV의 1등석 자리를 예매했다. 아주 일찍 예매해서 아주 저렴한 가격에 예약하긴 했지만, 플렉스 좀 해보았다. 곧 있으면 출발할 1등석 좌석에서 열심히 먹고 잘 준비를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안내방송이 나오기 시작하더니 열차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내리기 시작한다. 방송이 불어로만 나와서 나는 ‘뭐 알아서 출발하겠지’ 하는 마음으로 앉아있었는데, 친절하게도 한 남자분이 내려야 한다고 알려준다. 그래서 짐을 챙겨 나오고, 플랫폼의 모니터를 계속 쳐다본다. 10분 딜레이 된 열차는 15분, 20분 증가하기 시작한다.


기다리는 사람들과 비어있는 플랫폼. 이런 일이 흔한지, 방송이 나올 때 당황하던 사람은 없었다. 나 빼고.

 영문도 모른 채 기다렸다. 이 상황을 알고 있고, 나의 궁금함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사람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1순위는 프랑스어를 정말 잘할 것 같은 한국인, 2순위는 야놀자 수강했을 것 같은 한국인, 3순위는 나와 같이 길을 잃고 헤매는 한국인이었다. 뭐랄까, 나서서 조별과제 조장하기는 싫고, 점수는 잘 받고 싶은 그런 느낌으로 찾았달까. 그렇게 사람들을 찾아다니다 누가 봐도 순례자인 한국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성진 씨와 재성 씨. 그 두 분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3순위 당첨. 나와 같은 상황.


 그래도 몇 마디 말만 섞었음에도 불구하고 혼자 있는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너무나 좋았다. '나는 혼자가 아니야. 난 외롭지 않아. 정말 이 상황에 대해선 1도 모르지만, 난 괜찮을 거야. 함께잖아? 그리고 저들은 순례자잖아...!'라는 이상한 긍정이 생기면서 안심이 되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두 분과 함께 신나게 떠들다가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하는 곳을 차분히 따라가다가 만난 역무원에게 물어봤다. "난 몰라요" "왔!?" 우리는 그 시점부터 뛰어다니기 시작했고, 근처 역무원처럼 보이면 다 물어봤지만 아는 이들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다 한 역무원을 만나서 물어봤는데, "아, 출발했어. 저거야." "왔왔왔?!" 


바로 앞에서 열차를 놓쳤다.

아? 순례길 도착도 안 했는데 벌써 현실로 내려야 한다고?


들리십니까? 내 가슴의 목소리가 닿을 때까지! (사무실에서 티켓 변경중)

 

 그 승무원은 우리를 사무실로 데려갔고, 세 얼간이 들은 초조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여기저기 찾으러 다녔는데 아무도 몰랐다, 다음 무료 티켓으로 바꿔줘요, 제발 너희 잘못은 없다고 말해줘요’을 말하고 싶은 표정으로 안 되는 영어를 내뱉었다. 다행히 그는 우리의 대화를 모두 알아 들었는지(아니면 원래 그렇게 해주는 건진 모르겠으나), 무료로 1시간 반 뒤의 다음 열차의 티켓으로 바꾸어주겠다고 했다. "나는? 1등석인데?" "응, 돌아가. 변경안돼"


 3개월 전 부터 바라던 시간이었는데! 취소라니! 게다가 일반석은 1/2보다 더 저렴한 가격이었으며, 일정금액 환불도 안되고, 심지어 도착 예상시간보다 3시간 더 딜레이 되는 일정이라니! 혹시나 덩치 큰 사람 옆에 앉아서 찌부될 수 있는 불안함까지!!!! 보통 형님이 말해주신 그 행복의 시간을 누리지도 못하게됐다니!!!!!!!! 라고 좌절하려고 했다.


바뀐 티켓들과 어벤져스 엔드게임 포스터. 차량에 탑승중인 세얼간이들. 이 때 까진 몰랐지. 행운아인걸.

 

 하지만 이상하게도 순례자들끼리 있으니까, 1등석이 필요 없게 느껴졌다. 그냥, 주어진대로 가자는 마음이 더 컸다. 물론 언어가 잘 안돼서 답답한 감에 말을 못 한 것도 있지만, 그걸로 인해 포기했다고 하기엔 마음이 편-안했다. 그냥, 그럴수도 있지 뭐. 그게 산티아고 가는데 큰 문제는 아니니까. 이 분들과 함께 있어서 즐거웠고, 1등석이 아니더라도 더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달까. 여유가 없었다면 가지지 못할 마음이었다.

 

 열차를 기다리면서 셋이서 여행자들이 여행길에서 할 법한 대화들로 시간을 보냈다. 왜 왔는지, 어딜 갈 건지, 예산은 얼만지, 어디가 제일 좋았는지 등등. 그렇게 서로의 여행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열차가 도착했고, 우리는 열차에 탑승했는데, 이게 웬 걸? 우리 칸에는 4명의 가족 말고는 아무도 타지 않았다! 그 열차의 맨 뒷자리는 노는 형들의 지정좌석인 관광버스 맨 뒷자리처럼 5자리가 연이어 붙어있는 형태였는데, 우리도 그 시절을 생각하며(물론 나는 쭈구리였음) 뒷자리에 앉아 누우면서 갔다. 심지어 1등석보다 넓은 공간을 이용했다.


떼제베의 흔한 풍경. 우측 사진은 우리가 사용했던 좌석들.

 

 그렇게 다들 쾌재를 부르며 각자 자리에 앉았고, 새벽부터 일어난 해프닝으로 긴장이 풀려 다들 잠을 청하려 해도, 바깥의 프랑스 시골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 잠을 들 수가 없zzzZZzzZZ. 잘 잤다. 그러다 두 분이 식사하러 가시는 때 깨어나 2층에 있는 식당으로 가서 커피와 빵을 시켜 먹었다. 꽤나 맛있었던 기억이다. 2층에서 바라보는 뷰도 기가 막혔다. 왜 이렇게 다 맛있고 멋있는 거지. 그중 파티시에였던 재성 씨도 빵이 맛있는 축에 속한다고 말해주었다. 그래서 더 맛있는 것 같은 느낌이? 


일일히 손으로 그려 설명중이신 차장님(좌측). 열차 2층에 있는 식당칸(우측).

 

점심을 먹고 자리로 돌아와 쉬고 있었는데 차장 같은 분이 우리 쪽으로 오셨다. 우리의 티켓을 확인하셨고, 우리에게 바욘에서 다음 열차를 어떻게 갈아타야 하는지 영어로 설명하셨으나 못 알아 들어서 직접 그림을 그려주셨다. 알고보니 2개의 열차가 이어져있는 형태였고, 잠시 들리는 역에서 이 칸의 열차는 다른 곳으로 이동하니 현재 연결되어있는 앞 칸의 열차로 옮겨타야한다고 설명해주셨다. 만약 그것도 모르고 계속 타고 있었다면, 우리는 아주 멀리 어딘가로 여행을 새롭게 출발했어야 하는 처지에 놓였을지도 모른다. 


바욘에서 헤어지는 두 분에게. 건강하게 보자는 약속을 지켰다.

 

  바욘에 도착했다. 우리는 헤어졌다. 두 분은 북쪽 길을 통해 산티아고를 가시는데, 그 길은 바욘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나는 그들에게 사진을 뽑아 선물해드렸고, 부디 부엔 까미노 하셔서 산티아고에서 만나길 바라며 인사했다.

 

산티아고에서 재회한 세명과 손님 한 분. 제가 이름을 까먹었습니다 ㅠㅠㅠ


 약 36일 후, 내가 피스테라까지 돌아오는 날과, 두 분이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날이 같아서 우리는 산티아고에서 만났다. 그곳에 있는 한인식당에서 한국 음식과 소주를 먹으며 개고생(?) 한 이야기를 서로 나누었고, 산티아고의 정말 행복한 순간 중 한 순간이 되었다. 아는 사람을 산티아고에서 만난다는게 정말 재미있고 즐겁고 기쁘고 행복하고 신기한 일인지 모를껄!


 물론 혼자 걸었어도 즐겁게 걸었을 테지만, 혼자 박박 우겨서 1등석을 타고 갔다면, 그다음에 만나 또 다른 행복을 주었던 사람들을 하나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역에서부터 느꼈던 여유를 잘 이어갈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글을 쓰면서도 깨닫는다.


 여유가 중요한 것은, 문제를 넘어 사람을 볼 수 있는 시야를 준다는 데 있는 것 같다. 그래서 순례길이 좋다. 30일이라는 아주 긴 시간의 여유를 나에게 주기 때문이고, 내게 준 그 여유로 인해, 어떤 일이 발생해도, 사람을 먼저 발견하게 되고, 가까워질 수 있게 만들어 주었으니까. 그러니, 당신에게도 여유를 허락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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