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예술가 알바로에게 첫 번째 사진을 선물하다.
5월 3일, 생장 피에 드 포르(St. Jean Pied de Port)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였다. 참고로 프랑스 루트의 첫 번째 날이 제일 힘들다. 산맥 하나를 넘는 코스거든. 근데 이쪽 동네 산은 뾰족하다기 보단 윈도 배경화면처럼 둥글둥글하다. 길 자체도 평평한 형태라 한국 산처럼 등반을 해야 하는 곳은 별로 없다. 하지만 높다 보니 해가 떴다가, 빠르게 구름이 끼다 비가 내리더니 다시 해가 뜬다. 그리고선 안개가 심하게 끼고 바람이 엄청 불더니 비가 오다 해가 뜬다. 이게 낮 동안 일어난 날씨 변화였다.
순례의 가장 힘든 코스를 걸으며 ‘난 천국으로 가고 있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던 차, 그가 나의 앞에 그가 나타났다(주님 말고). 180은 넘어 보이는 큰 키에 길쭉한 팔과 다리, 특히 바람에 휘날리는 판초우의는 정말 머릿속에 박혀있는 순례자의 이미지와 너무 어울렸다(근데 진짜 보통 예수를 그리는 모습처럼 생겼다). 그를 찍지 않고는 도저히 버틸 수 없었다. 사진영상 쟁이로써 머릿속으로만 이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다는 건 폐업하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내가 그토록 선물해주고 싶은 그림이었다.
그래서 그를 따라가 뒷모습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사진이 가장 잘 나올 위치를 예측해서 미리 뛰어가 자리를 잡는다. 찍고 난 뒤, 닌자스탭으로 멀어지지 않되 계속 사진을 보정하면서 따라간다. 보정이 완료되면 미니 프린터기로 사진을 인화한다. 그렇게 나온 사진을 전달하기 위해 동네 아주머니 워킹(빨리 걷기)을 시작한다.
앞서 말했듯 난 순례자들의 뒷모습을 찍어 선물하는 프로젝트를 실행하고 싶었고, 그 첫 번째 주인공에게 사진을 전해주기까지 머릿속으로 샤샤샥 걱정이 스쳐 지나간다. 귀찮아하면 어쩌지? 반응이 별로면 어떡하지? 뭐라고 얘기해야 하지? 영어를 할 줄 모르면 어떡하지?! 주저리주저리 머릿속으로 떠든다. 하지만 여기서 사진을 뽑은 채로 주지 않으면, 뭔가 순례길에 온 모든 이유가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이대로 주머니에 꼬깃꼬깃 넣어둔 내 이별을 향한 쪽지마냥 품고 간다면, 더 이상 길을 걸을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마음먹는다. '일단 잡자! 그리고 생각하자! 사진 기가 막히게 나왔으니까! 첫 대사만 싸지르면 어떻게든 되겠지, 하이! 아임 맥스! 아이 떼이끄 삑쳐 앤 기프트 투 유!'
나에게 붙잡힌 그에게 난 위의 준비한 첫 대사를 말하며 사진을 건넸다. 두근두근. 과연 뭐라고 할까. 그는 사진을 살짝 떨어뜨려 보더니 ‘와우! 정말 멋져! 이게 나라고?’라고 말했다. 생각보다 너무 좋아해서 깜짝 놀랐다. 그의 연신 감사하다는 표현을 다 알아듣지 못했어도 통하는 게 있잖아? 유남생? 느껴졌다. 내가 걱정했던 것들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고, 그는 이 일들을 어떻게 해냈냐고 나에게 계속 물어보았다. 신이 난 나는 핸드폰과 프린터기를 꺼내 보여주면서 주저리주저리 설명했다. 그러고 나서 나는 그에게 함께 인증숏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알바로와는 계속 걷지는 못했다. 길이 높은 데다가 날씨도 좋지 않아서 얘기를 하면서 걷는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내가 먼저 앞질러갔다. 순례길 첫날 보통 론세스바예스의 숙소에서 머무른다. 약 200명 이상이 머무를 수 있는 대형 알베르게가 있기 때문에. 하지만 그곳에서 그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아침 새벽에 길 위에서 그를 만났다. 그는 나보다 조금 늦었는데, 만실이라 3km 앞 마을에서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는 바르셀로나에서 조형 예술가로 작업하는 사람이었고, 아이들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4일만 걷고 집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왜 선물해주는 것을 두려워했을까. 선물을 해줘야겠다고 준비까지 했으면서도, 뭐가 무서웠을까.
20대 후반 힘든 시간을 보내면서 낮아진 자존감과 우울증은 내 삶의 바닥부터 흔들어놓았다. 좋아했던 것들은 모두 무너졌고, 나의 존재가 어색해졌다. 느껴지는 모든 것들은 의미 없어졌고, 이런 내 모습이 들켜질까 봐 무서웠다. 나는 타인 앞에서 왠지 모르게 죄인같이 굴었고, 아무것도 내세울 것 없는 쓸모없는 나라고 생각했다. 몸에는 쓸데없는 긴장이 생겨났고, 실패하지 않기 위해 도전하지 않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완벽하지 않으면, 존재의 이유가 없고, 상대방이 말하는 것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스스로를 바보 취급까지 했다. 나에게 상대방은 항상 '나를 평가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다른 사람을 만나는 일이 힘들어졌고, 대인기피증이 오기까지 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상대방이 무엇을 원하는지 명확히 알아야 하고, 그 충족을 채워줘야만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순례길을 다녀온 많은 사람들이 말하듯, 기준 없이, 자신만의 호흡대로 걷는 길이었다. 하루에 얼마큼 걷는지는 1도 중요하지 않다. 행복하기만 하면 된다. 혼자, 그리고 같이. 그곳에 오는 사람들이 부자이건, 환자이건, 노인이건, 어린이건, 순례자다. 그렇게 걷는 사람들을 생각하게 되니, 그리고 그 길을 걷는 나를 보게 되었다. 나는 누구일까, 그 길을 걷는 사람 중에서 갓 퇴사한 우울한 한국인? 돈도 없고 꿈도 없이 방랑하는 철없는 청년? 아직도 부모님 걱정시켜드리는 못난 효자? 그 모든 것으로 나를 결정지을 수 없더라. 그저 나도 이 길을 걷고자 하는 순례자일 뿐이었다.
모든 기준을 허물고 나를 보고, 타인을 보는 길. 타인이 어떤 명품을 입었고, 재산이 얼마이며, 직업이 뭔지는 중요해지지 않는 길. 그저 내 옆의 순례자가 이 길을 왜 30일씩이나 걸으려 하는지, 당신은 언제 즐거우며 왜 사는지, 과정을 듣는 길. 그리고 그 걸음을 축복하는 시간. 그런 시간 속에서 있다 보니 자연스레 벽은 허물어졌고, 누군가에게 주는 일도, 받는 일도 자연스러워졌다. 마음을 쓰고, 표현하고, 주는 것. 지금의 시간에 같이 걷게 해 준 것만으로도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은 마음, 선물이구나.
몸에 풀린 쓸데없는 긴장들은 사라지고, 타인에 대한 오해가 쌓일 어떤 모습들도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움직임만큼 흘리는 땀을 내며 정직하게 걷는 사람들이 모여있다. 경건하다. 물론 걷는 첫 번째 날이었지만, 나는 첫발을 내디딜 수 있었고, 이 프로젝트는 걷는 날이 많아질수록, 자연스레 이루어졌다. 그리고 뒤에 나올 친구들과의 소중한 추억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경직된 사고와 마음과 몸을 풀고, 언덕에서 불어오는 바람처럼 자연스럽게 맞아들이고, 보내는 시간. 순례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