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 먹는 하차푸리도 맛있다

역마살 이야기 42 Georgia Kazbegi

by 역맛살

하지만 평생 산 위의 꼭대기를 바라보고 오직 정상에 오르는 것을 목표로 걸어간 사람에겐 보이지 않는 세계가 있다. 천천히 걸었을 때에야 비로소 보이는 세상 말이다.


- 백영옥의 '빨강 머리 앤이 하는 말' 중에서


빼어난 자연만큼이나 날씨마저도 사랑스러운 조지아에는 아름다운 수도원이 정말 많다. 그중 나는 카즈베기에 있는 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 수도원에 오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등산을 준비했다. 사람들은 바람막이와 등산화, 누구는 등산스틱까지 들고 단단히 등산준비를 했다. 그러나 워낙 준비성이 없는 나는 반팔과 반바지에 집업후드티 하나 걸치고선 신발은 아쿠아슈즈인 크록스를 신었다. 비록 정상을 가기 위해 든든한 등산화도 없고 럭셔리한 등산복도 없지만 내게는 젊음이 있었고, 여기에 부록책처럼 딸려오는 열정과 패기가 있었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가진 것 많이 써야지.

다행히 수도원까지 가는 길은 크게 힘들지 않았고 구불구불 자동차도로를 걸어 올라가면 됐다. 물론 아스팔트 깔린 도로 위를 걷는 것은 지루한 일이지만, 길 위에서 만나는 소소한 즐거움들도 있었다. 그중 한 가지는 마치 자신들이 도로의 주인인 것처럼 한구석을 차지하고선 쉬고 있는 소떼들의 모습이었는데 어찌 그리 겁도 없이 평온할 수 있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신선한 재미였다.

얼마동안 길을 걷다 어느덧 산 중턱을 지나 정상에 다다르니 순백의 구름 아래로 카즈베기의 마을이 아기자기한 장난감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다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좁은 산비탈에서 내려오는 세 명의 여행객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들에게 물었다.

- “혹시 이 길이 지름길인가요?”

- “네, 이쪽으로 가면 30분은 일찍 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런데 미끄러우니까 조심하셔야 해요.”


지름길이라는 말을 듣고 시간을 좀 절약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그 길을 오르기 시작했는데 생각했던 것과 달리 길은 훨씬 가파랐고, 그 때문에 흙길에 미끄러져 몇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그래도 군데군데 박혀있는 큰 돌을 열심히 밞아가며 좀 더 이른 시간에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렇게 다다른 정상에는 초록동산 위에 하얀 구름이 가득한 성당의 모습은 참으로 평화로워 보였다. 워낙 멋진 광경이라 그런지 여러 커플들이 웨딩촬영을 하고 있었고, 관광객들 또한 삽시간에 몰려와 성당 근처는 북적거렸다. 수많은 그림자가 겹치는 인파를 뚫고 나도 어느새 한자리를 차지했지만 곧 사람들을 피해 한산해 보이는 푸른 잔디밭으로 발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시끌벅적한 수도원을 피해 떠나온 곳은 푸른빛으로 가득한 어느 언덕이었는데 그곳에 잠시동안 불어오는 산들바람에 몸을 맡기고 누웠다. 그리고 들숨을 크게 들이쉬자 말갛고 상쾌한 풀내음이 나의 콧구멍을 헤집기 시작했다. 눈을 뜨면 보이는 것은 하늘이고 눈을 감으면 느껴지는 것은 시원한 바람이었다. 이렇게 좋은 곳에 있으면 지나가는 시간이 너무 아까워 잠깐만이라도 잡아두고 싶은 생각이 들곤 했다. 하지만 시간을 속절없이 흐르고 잡아둘 수 없었기에 매 순간을 소중히 여기며 행복을 맘껏 느껴야 했다.

그리고 아름다움 앞에 멍하니 앉아 바라볼 때면 세상의 걱정만큼이나 시간의 감각 또한 무감각해졌다. 그렇게 나도 몰래 흘러간 시간이 얼마간 지난 뒤, 어느새 햇빛은 구름에 가리기 시작했고 반바지를 입은 맨살에 닭살이 돋아날즈음 하산하기로 했다. 다시 한번 아까 올라왔던 지름길로 향하자 분명 올라올 때와 똑같은 비탈길이지만 막상 내려다보는 지름길은 훨씬 가팔라 보였다. 하지만 굳이 길을 돌아가면서 30분이나 낭비하기 싫었다.

그렇게 객기로 똘똘 뭉친 용기를 가지고 길을 나서다 결국 내려가는 길에 몇 발자국도 떼지 못하고 시작부터 흙에 미끄러져 엉덩방아를 크게 찧었다. 밑창이 다 닳아버린 아쿠아슈즈는 건조한 흙밭에서 시원하게 미끄러지기 일쑤였고 혹여나 가파른 길 아래로 떨어지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멀리 돌아가는 길보다는 빠른 길이 택했기 때문에 끝끝내 오기를 부렸다. 그리고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겨우 부여잡고 거의 앉다시피 해서 겨우 비탈길을 내려왔다. 다행히 크게 다친 곳 없없지만 옷차림을 확인해 보니 반바지의 엉덩이 부분은 이미 흙으로 얼룩져 있었고 아쿠아슈즈 안으로 들어온 모래알갱이는 맨발에 달라붙어 노란색의 떼자국을 만들어냈다.


생각해 보면 그렇게 빨리 내려올 이유도 없었는데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끝끝내 지름길로 내려왔다. 흙먼지로 만신창이가 된 모습을 보며 차라리 조금 돌아가더라도 천천히 마을을 보며 내려오는 게 훨씬 나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속절없이 빠르게 가는 흘러가는 시간 속인데 나는 뭐가 그리 급하다고 서둘렀던 것일까. 나는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 있었고 새로운 곳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고작 30분 빨리 가려고 하다 보니 많은 것들을 놓치고야 말았다. 삶은 속도와 반비례하듯 머물수록 더 깊은 세상을 보게 되고, 느릴수록 더 많은 것들에 녹아들 수 있는 법인데 말이다.

그러다 문득 각자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친구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스쳤다. 이미 직장을 다니고 있는 친구들은 알아줄만한 좋은 곳에 취직했음에도 여행을 하고 있는 내게 참 부럽다는 말을 자주 했었다. 비록 열심히 공부해서 남들보다 일찍 좋은 회사에 들어갔지만 결국 빠르게만 달려온 길에 놓쳐버린 것들이 아쉬운 듯 보였다. 그래서 사실 내가 부럽다는 친구들의 넋두리를 들을 때면 멋쩍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이해가 가기도 했다.

생각해 보면 인생에는 늘 적령기라는 것이 존재했다. 20살 성인이 되어서는 대학진학, 26살 졸업을 하고서는 취업, 32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갈 즈음에는 결혼.

그렇게 적령기라는 데드라인을 맞추기 위해 살다 보니 쉽사리 마음 놓고 푹 쉴 수 있는 여유를 가지기 쉽지 않았다. 한편 뒤처지는 느낌이 들곤 할 때면 자존감을 잃기도 했고 무기력해지기도 했다. 그런데 여행하면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인생의 길이란 우회로로 가든 지름길로 가든 결국 앞으로 향해 가는 길이었다. 그렇기에 서로의 속도는 다르겠지만 우리는 어딘가에 도착해 있을 것이고, 그곳에서 무언가 하고 있을 것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한 가지 상상해 본다. 내가 만약 친구들처럼 공부에 전념해서 적당한 시기에 좋은 직장에 가게 되어 내 삶을 책임질 수 있는 사회의 구성원이 되었다면 나는 과연 지금보다 행복할까.

겪어보지 않는 일은 단정 지으며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만약 떠나지 않았다면 안정적인 삶을 살면서도 내가 살아보지 못한 누군가의 삶을 부러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산을 하고 나서 반쯤 거지 같은 모습을 하고 허름한 식당에 앉아 하차푸리를 먹는다. 하차푸리가 참 맛있다. 그래서 행복하다. 나는 아마 30분 늦게 내려왔더라도 이 맛있는 하차푸리를 먹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처럼 똑같이 행복했을 것이다.


그러니 훗날 내가 인생에 있어 지각생이라고

느껴질 때면 이렇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빨리 가서 먹는 하차푸리도

늦게 가서 먹는 하차푸리도

똑같이 맛있는 법이다!


멋진 풍경 앞에 있노라면

가끔 시간이 멈춘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는 한다.


하지만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

멈췄던 것은 바로 내 발걸음.


그리고 멈춘 뒤 알게 됐다.

행복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는 것을.











구름 위를 걷는 기분?


구름과 걷는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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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191119_094620491_01.png 도로 위의 주인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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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akaoTalk_20191119_100525938.png 글 쓰기 참 좋다





낭만 없는 여행 에세이 담고 있습니다.


글/ 사진_ Instagram@jongmin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