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마살 이야기 43 Armenia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지만 가는 길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히치하이킹이란 그런 거다.
만나는 사람이 곧 길이 되는 것.
- 양정훈의 '그리움은 모두 북유럽에서 왔다' 중에서
아르메니아를 여행하며 느낀 것은 교통이 잘 발달돼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가지 흠이 있다면 관광지로 가는 대중교통은 잘 발달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마 유명한 관광지들이 시내와는 워낙 멀리 떨어져있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경우라면 몇 명이서 모여 택시를 대절해서 여행하지만, 나는 혼자 여행하기도 했고 내가 묶었던 숙소에서는 아르메니아에 여행이 아니라 일을 하러 온 친구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 부득이하게 혼자 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사실 뭐 그래 봤자 유일한 방법이라고는 최대한 대중교통으로 목적지의 근처까지 간 후 히치하이킹을 하거나 걷는 것이다.
그러나 히치하이킹을 해봤던 게 까마득한 탓에 엄지손가락에 녹이 슬고 뻣뻣해진 느낌이다. 그래도 문제는 없다. 원래 히치하이킹이라는 것은 그저 잘될 거라는 희망 하나 믿고 떠나는 거니까.
[호르비랍 수도원]
호르비랍 수도원으로 향하는 길, 엔진음이 사나운 버스를 타고 가다 기사 아저씨께서 내리라고 일러준 장소에 내렸다. 그리고 구글 지도로 검색해보니 내가 내린 곳에서 호르비랍 수도원까지는 4.2km 떨어져 있었다. 물론 걸어가도 문제없지만 뜨거운 열기 아래서 4.2km되는 거리를 1시간 넘게 걸으면 호르비랍에 도착하고 나서 아마 다 죽어가는 모습으로 골골될 것이다. ‘그래, 일단 걷다가 차가 오면 히치하이킹을 하자.’
그렇게 생각하기가 무섭게 마침 차가 한 대 오기 시작했다. 당당하게 엄지손가락을 펴보지만 이미 승객이 꽉 찬 대절택시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두 번째 차가 왔고, 내가 소심하게 엄지를 슬쩍 펼쳐 보이자 차가 서서히 멈추더니 흔쾌히 나를 태워주었다. 이제 막 제대로 해보려고 엄지손가락에 기름칠을 하려던 참에 기분 좋게 성공해서 호르비랍 수도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수도원에서는 장엄한 아라랏트산을 허리띠처럼 두르고 있는 구름의 모습은 입을 쩍 벌리게 만드는 절경이었다. 아라랏트산이 얼마나 높았던지 구름을 뚫고 솟아있는데, 구름은 마치 아름다움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딱 아라랏트산 주위에만 몰려있다. 그리고 그 미모가 벌써 파다하게 소문이 났는지 구름은 이곳 저곳에서 바람을 타고 하나 둘 접근하고 있었다. 저 아라랏트산에는 노아의 방주도 떠내려가다 멈췄다고 하는데 노아의 방주도 아마 그 아름다움에 사로잡혀 방주를 멈추지 않았을까. 믿거나 말거나 알 수 없는 이야기지만 확실한 것은 누군가 멈춰 세워 바라보게 할 만큼 충분한 아름다움을 가진 것은 확실하다.
그리고 호르비랍에 갔을 때 한국인 관광객 두명을 보았는데, 아직은 많이 알려지지 않은 코카서스에서 한국인을 만나게 되어 정말 반가웠다. 그들은 이곳에 택시를 대절하고 왔는데 나와 함께 가자고 제안했지만 아름다움에 좀 더 머물고 싶었던 나는 그들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그러나 막상 호르비랍을 떠나려고 하니 막막하기만 했다. 우선 주변 사람들에게 버스시간표를 물어보았지만 2시간에 한 대씩 있다고만 이야기할 뿐 정확한 시간을 아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 버스에서 내렸던 길로 일단 걸음을 옮기기로 했지만 뙤약볕 아래 4.2km나 거리를 걸어갈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났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는 나는 오늘도 벤츠보다 값진 두 다리를 믿으며 일단 걸었다. 그러던 중 뒤에서 들리는 사나운 소리에 잠시 뒤를 돌아보니 마치 자동차박물관에 있어야 할 것 같은 허름한 자동차가 내 앞에서 서서히 멈추기 시작했다. 그리고 지긋이 나이 든 할아버지는 군말없이 내게 타라는 손짓을 보냈다. 영어를 못하시는 할아버지는 별말없으셨지만 뜨거운 햇살아래 크록스를 끄시며 걸어가는 내 모습이 여간 안쓰러웠나보다.그리고 금방이라도 퍼질 것 같은 자동차는 사나운 엔진소리와 반대로 아주 여유로운 속도로 나아갔다. 사실 속도 따위가 뭐가 중요한가, 이마저도 그저 감사할 따름이지.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
[세반 호수]
세반 호수는 50km 정도 떨어진 근교였다. 다행히 호르비랍수도원과 다르게 세반 호수는 근처까지 가는 버스가 있었다. 다만 고속도로같이 보이는 길 중간에서 내렸는데 정류장도 없는 큰 도로에서 무슨 수로 버스를 타고 가야하나 벌써부터 걱정되기 시작했다. 뭐 일단 세반 호수에 왔으니 걱정은 나중에 하기로 했다.
잠시 뒤 마주한 세반 호수는 아름답다 못해 마치 천국의 형상과 같았다. 토머스 그레이는 “다른 어떤 논증의 도움이 없어도 무신론자에게 경외감을 일으켜 신앙으로 이끄는 장면들이 있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장면이라 하면 바로 내가 서 있는 이곳이 확실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신은 천국을 보여주지 않지만 상상할 수 있게 했다. 바로 이런 곳을 통해서 말이다. 구름이 호수를 집어삼킬 듯 떠있는 모습과 평화로운 호수 아래 수영하는 사람들을 보니 나도 모르게 눈물이 맺혔다. 경외감 때문이기도 하고 세차게 부는 바람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보는 이가 없기에 굳이 맺힌 눈물을 닦아낼 필요도 없었다. 왜 이리 여행하면서 마주한 아름다움에 눈물이 맺히는지 모르겠다. 고행에 가까운 여행탓에 둔하던 감수성이 예민해진 탓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호수에서 바람막이가 되어줄 어떠한 건물도 없으니 끈질기게 바람을 맞다보면 머지않아 아랫턱이 일정한 진동으로 덜덜 떨려오기 시작했다. 당연히 낯이라 더울 거라고 생각했던 주먹구구식 지레짐작으로 인해 옷을 너무 얇게 입고 와버렸다. 그래서 손바닥을 겨드랑이 사이에 끼고 뜨뜨미지근한 그곳의 온기를 느끼지만,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온 몸은 파르르 떨려왔고 이제 그만 떠나기로 했다.
그러나 올 때는 시내에 있는 정류장에서 탔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었지만 막상 갈 때는 정류장도 없는 고속도로 같은 곳 한가운데서 버스를 멈춰 세워야 했으니 또다시 막막하기만 했다. 그리고 어떤 버스가 예레반 시내를 가는 줄도 모르는데 지나가는 버스마다 모두 멈춰 세울 수도 없는 일이었다. 더 큰 문제는 1시간 가까운 시간동안 기다렸는데 버스가 단 한 대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일단 뭐라도 해보기 위해 고속도로 갓길에 섰지만 역시 자동차는 살기가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지나갔다. 그탓에 엄지손가락을 빼들었지만 세차게 지나가는 자동차를 보며 자꾸 주먹안으로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어쨌든 집에는 가야 했기에 간절할수록 입꼬리와 엄지손가락을 더 높이 더 당당히 올렸다.
그렇게 몇 번의 시도를 거듭했는지 헤아릴 수도 없던 찰나에 흰색 승용차 한 대가 비상등을 켜며 내 앞에 멈추었다. 내게 자리를 내어준 차량은 중국 여성 두 명이 대절한 택시였고 앞좌석이 비어있어 나를 태워주었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길 세반호수에서 슬퍼게 앉아있던 내모습을 봤다며 다시 보니 반갑다고 인사했다.
보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처량하게 보였을 내 모습을 상상하니 그저 쑥스러울 뿐이다. 역시 남자의 눈물을 무거울 필요가 있는 법이다.
[타테브]
아르메니아의 아라랏트산과 세반 호수가 찬란한 아름다움을 가졌다면 타테브는 소박한 아름다움을 가진 곳이었다. 마치 우리 시골 할머니 집에 온 것만 같은 구수면서도 정겨운 정취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또한 이런 시골에 오면 도시적 삶에 대한 최후의 저항 같은 것이 깃들여져 있었다. 회색빛 시멘트가 넘실대는 도시의 선두를 따르지 않고 시골은 그들만의 흐름으로 서서히 흘러간다. 그런 면에서 시골은 고집스럽다.
그래서 나는 비슷하게 살아가는 도시를 여행하는 것보다 억척스러운 시골 여행이 더 좋았고, 매연냄새가 가득한 도시보다 사람사는 향기가 가득한 시골이 참 좋았다. 그래서 타테브라는 곳이 정말 좋았다.
타테브의 길을 걷다보면 바람이 불어오는대로 살랑거리는 갈대와 사방으로 흐드러지게 피어난 야생화들을 볼 수 있다. 또한 아스팔트도로 옆에서 송이송이 잘 익은 블랙베리는 갈증나는 여행자의 목을 심심치 않게 위로했다. 양을 치는 목동은 먹음직스러운 풀을 찾아 양 떼들을 묵묵히 이끌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길 위의 모든 것들은 마치 잘 그려놓은 수채화처럼 모두 낭만적인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낭만도 무거운 배낭으로 인해 어깨가 슬슬 아파오면 모두 사라지기 시작했다. 이놈의 가방에는 언제나 욕심만 잔뜩 들어 정말 무거워 죽겠다. 소유가 많을수록 고통도 커지는 법, 하지만 그럼에도 공간의 여백을 만들지 못하는 것은 살아왔던 인생의 관성 탓일 것이다. ‘텅빈 충만’을 경험하기에 나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이제 드디어 나의 엄지를 뽑을 때가 온 것 같았다. 길가에 앉아 기다리는 동안 한 허름한 자동차가 느릿느릿 오고 있는 것을 바라보며 과감하게 엄지손가락을 뽑았는데 운 좋게도 딱 한번의 시도만에 성공했다.
차 안에는 40대 정도로 보이는 부부가 있었는데 차 안에 아까 먹었던 블랙베리가 한가득인 걸 보니 블랙베리를 채집하는 분들인 거 같았다. 그리고 그들은 짤막하게 딜리셔스(delicious)라고 말하며 블랙베리를 한주먹 건네며 먹으라고 권했다. 이미 길을 걷던 중 갓길에 잘 익은 블랙베리를 수없이 먹었지만 맛있는 것은 언제 먹어도 질리지 않기에 그들의 달작지근한 호의를 듬뿍 받아먹었다. 참으로 감사할 따름이다.
누군가 그랬다. '바람'과 '천'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다고. 과연 바람과 천만 있다고 해서 어디든 갈 수 있을지 의문이지만 바람과 '천만 '원이 있다면 분명 어디든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천만 원이라는 큰 돈이 없으니 이렇게 말하고 싶다.
엄지손가락 하나면 어디든 갈 수 있어.
가끔 인생도 히치하이킹처럼 살아보면 어떨까
비록 우리의 앞날을 예상할 수는 없지만
그냥 잘될 거라는 희망 가지고
당당히 나아가는 것처럼
낭만 없는 여행 에세이 담고 있습니다.
글/ 사진_ Instagram@jongminz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