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맨(데이미언 셔젤, 2017)

by NYX


감독의 전작들과 비교해 볼 때 이번에는 꿈에 대해 어떤 미화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각오가 보이는 듯 하다. 기실 <위플래쉬>와 <라라랜드>는 음악 영화를 표방하고 있는 만큼 우선 청각적으로 즐겁다. 따라서 꿈을 향한 고통의 과정도 다소 아름답게 미화된 경향이 있다 할 것이다. <위플래쉬>의 그 기이한 훈련 과정을 제법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반응들이 많았던 것으로 설명된다. 하지만 <퍼스트맨>은 이렇게 관객의 시선을 왜곡할 요소를 제거해 버렸다. 심지어 아이맥스는 극히 일부에서만 사용되어 시각적으로 현혹될 여지도 없다.


꿈 3부작을 진행하면서 꿈에 대한 비전도 점점 어두워진다. <위플래쉬>에서는 꿈에 다다른 그 순간 엔딩을 맞이했고, <라라랜드>에서는 꿈을 이루고 셉스 바를 방문한 미아의 옆에는 배우자가 있었다. 하지만 <퍼스트맨>의 닐은 유리벽 저쪽 너머에 있는 자넷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즉 엔딩을 기준으로 볼 때 주인공은 점점 성취의 순간에서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결국 <위플래쉬>에서의 꿈이 광적인 것이고 <라라랜드>에서는 달콤쌉쌀한 것이었다면 <퍼스트맨>에서는 사무치도록 고독한 것이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점점 바깥 세계와 단절되고 외로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전작들과 달리 <퍼스트맨>에서는 닐의 주변에 그 누구도 허용하지 않는다. 우주 비행 장면에서는 이러한 고독감을 극대화하기 위해 닐의 POV샷과 얼굴로 가득 채운 익스트림 클로즈업 샷이 주로 사용된다.


하지만 그렇게 고독함에도 불구하고 동경할 수밖에 없는 것이기도 하다. 달에서 돌아와 검역소에 앉아 있는 닐에게 시간을 돌려 줄 테니 똑같은 도전을 똑같은 과정을 거쳐 다시 하겠느냐고 묻는다면 그는 주저하지 않고 'Yes'라고 했을 것이다. 우주 개발 비용을 복지 예산으로 사용하라고 주장하는 시위대들의 주장은 일견 타당해 보인다. 닐 역시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부인하지는 않으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는 닐이 어떤 합리적인 이유에 의해 달에 가려는 것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판단에서 비롯되었음을 의미한다. 원래 꿈이란 건 합리적 수지타산을 생각하다 보면 찾을 수 없는 거다. 그러니까 The fools who dream이지.


전작에서 이중적 결말을 선사해 온 감독은 이번에도 여러 방향으로 해석의 여지를 열어 놓은 엔딩을 제시한다. 여담이지만 <위플래쉬>와 <라라랜드>는 해피엔딩 쪽에 마음이 가는 편이다. 음악적으로 성공하고 싶은 주인공에게 다소 거친 과정을 통해서라도 거기에 도달할 수 있게 해 주었고(위플래쉬), 커리어적으로 성공함과 동시에 과거를 마주하더라도 다소 씁쓸한 웃음으로 넘길 수 있게 되었으니(라라랜드) 이게 해피엔딩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인가. 그런데 <퍼스트맨>에서는 왠지 모르게 새드엔딩처럼 보인다.


검역소 유리를 사이에 두고 손바닥을 마주한 둘은 그 순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온갖 역경을 딛고도 결국 이루어내고야 말았다는 서로에 대한 벅찬 격려였을까, 아니면 인류사에 남을 업적의 주인공이 되었지만 우리 사이에는 유리벽같이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장벽이 생기고야 말았다는 자조였을까. 혹시 닐은 더 이상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는 자넷을 그제서야 바라보고 이 관계를 원상복구시키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것을 직감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서 <퍼스트맨>은 꿈을 향해 외롭게 살아가도록 운명지어진 사람들의 미래에 대해 보내는 위로의 비가()이다.


개봉 당시 <퍼스트맨>을 보고 이제 꿈 3부작을 완성했으니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을 차기작으로 선택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재미있게도 차기작 <바빌론>에서는 유성 영화의 발달에 의해 시류에서 밀려나는 무성 영화 시대의 영화인들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이제 또 다음 작품에서는 꿈에 대해 또다시 얼마나 마음 아픈 비전을 보여 줄지 귀추가 주목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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