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로이 앤더슨, 2000)

by NY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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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특히 제목에서부터 시작할 필요가 있겠다. 영화가 개봉한 2000년은 21세기의 시작이자 20세기의 끝물이다. 다시 말해 연도가 1XXX년에서 2XXX년으로 바뀌는 순간인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층계를 올라가는 것으로 본다면 2000년은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시기이다. 즉, <2층에서 들려오는 노래>라면 2000년대의 인류가 막 2000년대로 진입하려고 하는 1000년대의 인류에게 불러 주는 노래인 것이다. 이건 2000년대를 앞서서 살아간 미래인이 현재의 우리에게 암시하는 묵시록과도 같다. 너희들이 살아가게 될 세상은 이런 모습일 것이라고.


미래인이 그린 21세기는 서로가 단절된 파편화로 시작한다. 아예 단절이라면 모를까, 직장에서 해고당하는 동료를 두고 살짝 열린 문 틈으로 그가 애원하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장면 1) 젠틀하게 표현해서 지켜보는 거지 사실상 관음한다고 봐도 무리가 아니다. 아예 닫혀 버린 문보다 저렇게 살짝 열린 문이 더 무서운 거다. 뒤이어 기대를 배반하는 여러 장면들이 등장한다. 억울하게 칼에 찔리고 두들겨맞는 사람을 두고 버스 정류장의 군중들은 그저 침묵할 뿐이고, 신체 절단 마술을 선보이는 마술사는 진짜로 청중의 몸을 (일부) 썰어 버린다.청중이 치료받은 병원의 의사와 간호사는 불륜 관계이며 간호사는 의사가 아내와 언제 이혼할지를 계속 추궁하지만 의사는 그저 침묵으로 일관한다.


모두가 우리가 사회에서 '마땅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기대들을 배반하는 장면들이다. 즉, 더 이상 기존의 상식과 예상이 통하지가 않는 시대인 것이다. 두들겨맞는 사람은 군중들이 자신을 도와 주기를 기대했고, 청중은 마술사의 마술이 제대로 들어가기를 기대했을 것이다. 의사의 아내는 죽을 때까지 부부 관계가 유지되기를 바랐을 것이고 간호사는 의사가 빨리 이혼해 주기를 원했다. 그리고 이 모든 기대들은 배신당한다. '도덕적으로 타락했다'보다는 좀 더 넓은 범위이다. 마술사의 마술이 제대로 들어가기를 예상하는 것은 도덕과 무관하고 불륜 상대방의 이혼을 원하는 게... 도덕적인 바람과는 거리가 있지 않은가?


스크린샷 2025-05-18 오후 6.00.32.png <장면 1 : 해고당하는 동료를 지켜보는 사람들>


밤이 되자 길거리는 끔찍한 교통 체증으로 인해 몇 시간 동안 채 수십미터도 이동하지 못하게 되고 갈 길을 잃은 사람들이 술집을 들어왔다 나가곤 한다. 그 밤 사이에 누군가는 직장에 불을 질렀고 폐허가 된 가게 뒤쪽으로 일군의 시위대가 행진을 한다. 이들은 줄지어 서서 앞선 사람에게 채찍질을 가한다.(장면 2)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입히기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 폐허가 된 가게 주인의 첫째 아들은 시를 쓰다가 그만 미쳐 버렸단다. 그러니까 현대인들은 어둠 속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는 deadlock 상태에서 헤매다가 어설프게 낭만을 좇다가는 제정신을 유지할 수 없는 거다.


스크린샷 2025-05-18 오후 6.19.18.png <장면 2 : 앞사람을 채찍질하는 행렬>


흥미로운 부분은 지금부터다. 폐허가 된 가게 주인(칼)은 인생의 가장 큰 목적이 물건 가격에 0을 하나 더 붙여서 물건을 파는 거다. 박람회에서는 2,000번째 생일을 맞은 예수상에다가 0을 하나쯤 더 붙여서 팔 궁리를 한다. 아무래도 그 다음은 3,000번째 생일인데 칼이 그 때까지 살 것 같지는 않으니 이번이 마지막 기회인 셈이다. 그 거래 현장 뒤쪽에서 한쪽 팔에 고정된 못이 빠져 버려 덜렁덜렁거리는 십자가 예수상이 아주 압권이다.(장면 3) 앞에 보이는 저 남자가 예수상 판매자(우페)인데 이 사람은 방금 전에 돈이 안 될 것 같은 손님을 아주 매몰차게 내쫓았다. 바로 예수상을 앞에 두고 말이다 하하.


아무튼 예수상을 하나 사서 돌아가는 길에 예전 친구(스벤)를 조우한다. 그런데 사실 스벤은 칼에게 돈을 빌려 준 뒤, 돌려받기 전에 그만 자살해 버렸고 따로 친척도 없어서 우리의 칼은 사실 돈을 갚을 필요가 없다는 점에 속으로 안도했단다. 그런데 스벤은 자살한 흔적을 보여 주면서 손목에 있는 상처를 드러내는데 이건 영락없는 예수의 모습 아닌가. 그래서인지 계속해서 칼을 따라다니면서 그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든다. 결국 종국에 다다라서는 칼은 못 참고 스벤에게 일갈한다. 왜 나를 자꾸 따라다니느냐고, 이제 어찌할 수 없는 과거는 묻어 둬야 하지 않겠느냐고, 나는 하루하루 식탁 위에 올라갈 음식을 위해 싸울 뿐이라고.


스크린샷 2025-05-18 오후 6.27.55.png <장면 3 : 예수상 거래의 현장>


결국 전체적인 초점은 풍요를 향한 질주와 무형적 가치의 실종이 현대 사회의 대표적인 초상인 것처럼 보인다. 우페는 극의 마지막에 악성 재고가 되어 버린 예수상을 쓰레기장에 몽땅 내버리면서 다음번에는 0을 하나 더 붙여서 팔 만한 물건을 반드시 찾아내리라 다짐한다. 그러면서 십자가를 차로 즈려밟고 발로 차고 하는 게 신성모독이라고 화낼 사람들도 있겠지 싶다. 결국 예수의 은유로 등장한 듯한 스벤이 자살한 것 역시 '너희들 하는 걸 보고 있자하니 속이 터져서 내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전에 자살하고 말겠다'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는가.


다만 이게 자본주의 비판의 방향은 아니다. 예를 들어 켄 로치의 영화는 자본주의의 병리 현상을 특정 개인을 통해 적극적으로 드러내면서 그에 대한 적극적인 교정을 통한 휴머니즘의 회복을 강조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로이 앤더슨은 최소한 현대 사회에서 자본주의를 부정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 다음에, 그런 사회를 그저 목도할 뿐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고 체념 아닌 체념을 하는 뉘앙스가 일부 느껴진다. 우리는 하루하루 먹을 음식을 얻기 위해 살아갈 뿐이니까. 이를 반영하듯 주요 등장인물들은 일부러 창백하게 분장을 해서 마치 시체처럼 보인다.


사실 개별 에피소드들이 단속적이어서 불가피하게 일부 에피소드들은 제외했지만 옴니버스 영화로 보더라도 흥미로운 에피소드들이 많다. 엄청난 부를 쌓았지만 결국 늙어서는 관 같은 요양원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는 신세가 된다던가(장면 4), 많이 배웠고 경험도 쌓았다고 자칭하는 노신사 양반들이 모여서 하는 게 어린아이 하나 희생시키는 거라던가(장면 5) 전반적으로 미친 듯한 시니컬함을 자랑한다. 전자는 왠지 하루 종일 땅을 마련하기 위해 돌아다녔지만 결국 죽은 뒤에 자신이 누운 만큼의 땅만을 가질 수 있었다는 톨스토이의 단편이 떠오른다. 에피소드들을 어떻게 연결시키느냐에 따라서 자본주의와 인간의 물화(物化) 외에 다른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리라 보인다.


스크린샷 2025-05-18 오후 10.22.38.png <장면 4 : 100세가 된 억만장자>


스크린샷 2025-05-18 오후 10.27.39.png <장면 5 : 희생자 어린아이>


아무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미래인이 세기초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예언해 준 묵시록은 이런 내용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 전망에 대해 답할 차례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 속에서도 여전히 인간일 수 있다고, 어둠 속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마침내는 찾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더 이상 내 앞사람에게 채찍질을 하지 않을 것이라고, 우리 뒤를 따라다니면서 끊임없이 양심을 찔러대는 예수를 이제는 쫓아낼 필요가 없다고.(정말? 진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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